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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화 통리원장, 어떤 분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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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8-01-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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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0 18:54 조회 4,7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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총지화 통리원장, 어떤 분인가?
용맹정진과 교화의 화신

총지종 제 11대 통리원장으로 임명된 총지화 지수는 본명이 김점순이고 1936년 전주 태평동에 서 김용선씨와 임충근, 부모님의 8남매 가운데 차녀로 태어났으며 어릴 때부터 종교적인 성향이 강해서 평상시 항상 생사의 문제나 우주의 근원에 대하여 막연하나마 혼자만의 생각을 가다듬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에는 이웃의 권유로 얼마 동안 교회에 나가게 되었는데,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창조주에 의하여 창조되었다는 설교를 듣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절대적 차별을 수긍하기 어려웠고 창조주는 왜 피조물에게 고통과 장애 등 불완전한 모습을 부여했는가에 대한 의구심을 버릴 수 없었으며, 이런 의문이 거듭 되면서 알지 못하지만 어떤 정도라 할 수 있는 우주적 섭리가 있을 것으로 믿고 이를 찾아 정신적 고뇌의 방황을 하였다. 이 무렵, 한 번은 소학교 산수시간에 갑자기 “ 선생님, 죽음이 무엇입니까? ” 하고 질문을 하고 질문을 할 정도로 남다른 면이 강했다고 한다.

이날 집으로 오는 길에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것이 있었는데, 할머니의 관이 보이고 고양이가 부엌 아궁이 로 들어가는 이상한 광경이었 다고 한다. 집에 와 보니 죽 음에 대해 질문하던 바로 그 산수시간에 77세된 할머니가 돌아가셨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고 한다. 그 일이 있은 뒤부터 삶과 죽음에 대하여 더욱 진지하게 생각 하던 점순소녀는 전주 여중을 졸업하고 어머니를 따라 절에 다니게 되었는데 “옴마니반메훔”이라 는 진언과 함께 “내가 짓고, 내가 받는다”는 글귀 를 보고 갑자기 앞이 환해지는 것을 느꼈다고 한 다. 그것이 밀교와 첫 만남어었다. 이때 가정 형 편이 어려워 학업을 계속하지 못하게 되자 솟구 치는 향학열을 참기 어려워하는 강한 갈등 속에 13세에 진각종에 입문했다. 20세 때 스승이 되어 처음으로 죽비를 잡은 뒤부터 줄곧 교화에 힘쓰 며 진언에 의한 득력을 하여 신탄진에서 교화를 하는 시절에는 환자를 손으로 만지기만해도 병을 치료하는 능력이 생겼다고 한다. 6.25전쟁 때 학 도병으로 참전하여 부상을 입은 뒤부터 18년동안 투병을 하던 남편 계당 정사의 병도 이때부터 낫 고, 또 하나의 이상한 경험을 하게 되었다. 꿈에 어떤 스님이 현현하여 발우에 든 어떤 액체를 입 에 부어주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이 때가 1970 년, 이 꿈을 꾸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더니 마침 원정 종조께서 준제법을 연구하고 계시던 참이었 는데, 준제법을 받아든 순간, 자신이 찾던 진정한 밀교의 수행방법이라는 생각이 들었다고 한다.

그 뒤, 곧 신탄진으로 돌아와서 진각종의 스승 직을 미련없이 버리고 하심(下心)과 용맹심(勇盟心)과 지혜로써 정진에 들어갔다고 한다. 정진하는 가운데 이상한 경험을 했다. 크기나 빛깔이 당 구공과 비슷한 5주보말이 방석 밑으로 들어옴과 동시에 "이것은 차돌이 아니라 주춧돌이니라. ”라 는 소리를 듣게 되었다. 이때부터는 현교에 입문 하라는 권유에도 현혹되지 않고 오직 밀법에 의지 하여 깨달음의 본질에 다가가려고 했다고 한다.

준제법의 실천으로 교화에 자신이 생기자 곧 바로 교화에 주력했는데 처음에는 조그만 방 한 칸을 세내어 다라니를 모시고 법을 펼쳤다. 이후 교화는 급속도로 발전하여 신탄진에 기반을 두고 대전과 전주를 번갈아 가며 준제법을 펼쳤다. 총 지화 지수로부터 가르침을 받은 보살들은 이 당시의 전법에의 정열은 가히 초인적이었다고 이구 동성으로 말한다. 신탄진과 대전 및 전주를 오가며 차안에서 잠을 자더라도 교도들 중 누구라도 일이 생기면 천리길도 마다않고 어루만져 주러 가며, 오직 이 한 몸이 있어 누군가가 고통을 덜 수 있다면 불속이라도 뛰어들 겠다는 관음보살의 살아있는 화신으로서 교화를 펼쳤다고 한다.

이렇게 자비를 펼쳤던 신탄진 서원당이 지금의 백월사의 전신이며, 언니의 단칸집을 빌려 교화를 펼쳤던 전주의 서원당은 지금의 흥국서로 발 전했다. 이후 대전 삼성동으 로 교화 중심을 옮겨 관음서 원당을 개설하고 그것이 발전 하여 현 만보사가 되었다.

용맹심과 하심과 지혜를 강조하시는 총지화 지수는 진리의 요점을 알아서 참되게 행하는 것이 정도(正道)이며 교화를 실천하는 가운데 성불의 길이 있고 참된 진리를 알고 실천하는데 모든 것을 이루어 진다고 가르치신다.

젊은 시절 솟구치는 향학열을 다하지 못한 총지화 지수는 정진하는 용맹심으로 52세부터 56세 시절에 스리랑카 불교대학 한국분교에서 수업하실 때, 대전에서 서울을 통학하며 노력하는 모범을 보여 스리랑카 불교대학 본교에서 노력상을 수여 받기도 하였다. 이 시절에는 밤낮의 구분이 없고 건강상의 무리를 두려워 함이 없어 학교 수업을 마치고 대전에 도착하면 자정에 이르는데도 이어서 새벽녘까지 금강경 공부를 마치고서야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시 눈을 붙이면 곧 새벽에 정진하는 보살님들의 출입 소리에 다시 하루 일과를 시작하는 초인적인 노력을 하였다고 한다. 26 여년을 만보사를 이끌어 오며 부산의 고(故) 정각원 대전수와 함께 총지종의 두 기둥으로서 중부지역의 교화를 담당해온 총지화 지수는 밀교계 최초로 여성 통리원장의 자리에 오름으로 우리나라 불교계의 새로운 장을 열어 갈 것으로 기대 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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