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3년, 교화의 거점을 세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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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불교총지종 사원사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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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2-11 13:36 조회 2,168회본문
1973년, 교화의 거점을 세우다
고려시대 이후 맥이 끊겼던 진언 밀교는 서울 상봉동의 자그마한 2층 양옥집에서 시작됐다. 정통하고 바른 한국 밀교 종단의 재탄생을 발원한 원정 대성사는 1972년 8월 27일 상봉동 서울선교부(정심사)에서 교화를 단행했다. 진각종에서부터 대성사를 따르던 스승과 교도들이 모여들었다. 준제법의 가르침을 전해 듣고 모두가 깊은 감화를 받았다.
대성사는 법을 알리라고 독려했다. 그렇지만 직접 사원을 열어 교화에 나서는 건 다른 문제였다. 마음은있으나 자신이 없었다. 망설이는 제자들에게 대성사는 ‘그대가 원하는 모든 것이 부처님의 진리 속에 있으니 뜻을 이루고자 하면 험난하지만 이 길을 가야한다’고 총지의 사명을 일깨웠다. ‘도랑을 건너려면 바지를 훌훌 걷어 부치고 풀쩍 뛰어들어야 건널 수 있다’며 용기를 북돋아주었다. 대성사의 확신에 찬 가르침에 의지해 스승들은 죽비를 들었다.
곧바로 육자대명 본존을 모셨다. 11월 24일부터 채한 달도 안 되는 사이 서울에 충정로선교부(관성사), 동대문선교부(밀인사), 경주에 불국선교부(승천사), 경주선교부(국광사), 밀양에 유천선교부(일상사), 안강에 안강선교부(건화사)를 개설했다. 그리고 12월 24일 정식으로 종단을 창종한 직후 사흘 동안 부산선교부(정각사), 포항선교부(수인사), 청주선교부(혜정사)가 연이어 교화를 시작했다. 안방 혹은 자녀의 공부방이 서원당이었다. 마당 한 구석, 텃밭과 돼지우리가 있던 자리를 헐고 시멘트 블럭으로 서원당을 짓기도 했다. 대부분 가정집을 개조했기 때문에 비가 오면 빗물이 스며들고 벽 사이로 찬바람이 불었다. 턱없이 비좁고 허름하지만 청정한 마음하나로 꾸린 더없이 소중한 도량에서 비밀불교 의궤의 불사법요를 시행하고 사종수법을 닦았다. 우주 법계에 닿을 듯 진실한 교도들의 정성은 민들레 홀씨처럼 퍼져갔다.
막상 시작하고 보니 이것이 바로 당체법문이라는 듯 일은 순조롭게 풀렸다. 창종 원년에 10개 사원으로 시작한 총지 도량은 이듬해 서울, 대전, 대구, 부산, 전주, 인천, 경북으로 확대되었다. 의창선교부(선립사), 대전선교부(만보사), 대구선교부(개천사), 성북선교부(실지사), 밀양선교부(밀행사), 현곡선교부(수계사), 전주선교부(흥국사), 부평선교부(지인사), 부광선교부(성화사)
가 진리의 문을 열었다. 작게는 2~3명, 많아야 7~8명의 교도가 시작한 불공이었다. 이른 새벽부터 교도들이 들고났다. 살림을 시작하기 전, 농사일에 나서기 전, 교도들은 아침 일찍 불공을 드렸다. 미처 들르지 못한 교도들은 일을 마치고라도 반드시 서원당에서 불공을 올렸다. 승속을 막론하고 계율을 지키는 데 엄격했고 진언염송에 정성을 다했다. 어느새 월초불공과 자성일이면 선 채로 참여해야 했다. 마당에 들마루를 놓아야 할 정도로 수십 명을 훌쩍 넘겼다. 이때는 종암동에 자리한 성북선교부(실지사)가 종단살림을 총괄했다. 이 곳에서 원정 대성사는 경전의 번역과 편찬, 수행의궤와 행정체계 정립에 몰두했다. 1974년 재단법인 등록을 마친 후 불교총지종 현판을 세우고 강공회 등 각종 회의를 개최해 초창기 종단의 사상과 수행법, 행정의 기틀을 완벽하게 다졌다. <불교총지종 50년사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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