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고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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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1호 발행인 안종호 발간일 1998-09-2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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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1 08:50 조회 5,495회본문
신라의 원효대사
<편집자주>
원효는 우리나라 역사상 최대의 불교사상가이자 학자이며 사회운동가였다. 그의 경론에 관한 연구는 불교학의 모든 분야에 걸친 것으로 총 1백여부 2백4십여권에 달하는 방대한 것이었다. 그는 어느 종파에 구애됨이 없이 ‘만법이 일불승에 총섭되어야 하는 것은 마치 대해 중에 일체 중류가 들어가지 않 이 없는 것과 같다.”하여 대(大),소승(少承),성(性), 상(相), 돈 (頓), 점(渐)의 상호 대립적인 교의를 다 융회하여 일불승으로 귀결시키려 하였다. 이러한 그 사상은 “모든 사상가들의 서로 다른 쟁론들을 화합시킨다.”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는 바, 이것이 바로 화쟁이다. 원효의 화쟁사상은 실생활면에서 진속일여(眞俗一如)를 주장하면서 불교를 생활하는 불교대중문화운동으로 전개시켰다.
1.出生
원효는 신라 26대 진평왕 39년 (서기617년)에 현재의 경북 경산시 자인면에서 태어났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원효의 어머니가 하늘의 별이 품안으로 들어오는 꿈을 꾸 고 수태를 하게 되었는데. 그를 낳을 때에는 오색의 구름이 하늘을 가리웠다고 한다. 또 그의 어머니가 만삭이 되어 집 근처의 밤나무 아래를 지나다가 해산하게 되었다 하여 그 이름을 원효라 하였다. 원은 속어로 ‘털’이라는 뜻을 지니고 있다. 이러한 그의 출생은 마야 부인이 룸비니동산에서 싣타르타 태자를 출산하였던 장면과 너무나 흡사하다. 그의 출생이 예사롭지 않았음을 묘사한 것으로 원효를 석가모니 부처님과 동일시하였음을 강조한 것이라 말할 수 있겠다.
2, 佛敎修學
「송고승전」에 보면, 그의 나이 10 세에 벌써 줄가하여 여러 스승아래에서 수학하였다고 한다. 남달리 박식다문하여 불법의 깊은 진리를 깨달았으며, 종파와 대· 소승을 불문하고 여러 불교교리와 사상을 섭렵하였다고 한다. 또한 대중속 으로 깊이 파고들어 대중들에게까지 불교를 일상화시키므로써 불교를 의지처로 삼게하였다. 그 대표 되는 수행방편과 포교정신은 바로 화엄경의 "모든 것에 걸림없는 사람이 한 길로 생사를 벗어났도다” 라는 구절을 노래로 지어 부르면서 널리 서민들에까지 불법을 홍포하였다는 점에서 그대로 나타나고 있다. 이것은 바로 진속불, 진속일여의 실천이 었다고 말할 수 있다. 이는 眞과 俗이 별개의 것이 아니요. 眞 가운 데 俗이 있으며, 俗 가운데 眞이 구현되는 불교의 진수를 몸소 실천 한 위대한 실천운동가의 모습이라 아니할 수 없다
교학에 있어서는 망라되지 않은 분야가 없었다. 화엄, 유식, 율장, 정토 뿐만아니라 밀교에 이르기 까지 초인간적인 수학과 저술활동을 보여 주었다. 특히 정토의 미타사 상에서는 그의 불교대중화를 그대로 엿볼 수 있다. 특히 그의「십념론」을 보면. 일상생활의 모든 선행이 바로 극락왕생을 위한 수행이라고 한점에서 미타정토신앙을 서민들에게 가장 쉬운 포교방편으로 제시하였음을 보여주며, 그의 불교생활화, 대중화를 엿볼 수 있게 한다. 원효의 가르침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학과 실천의 쌍수를 보여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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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jpg 원효대사 (33.1K) 0회 다운로드 DATE : 2018-04-11 08:5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