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산 총지사와 전국 36개 교화의 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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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4-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혜 서브카테고리 불교총지종 사원史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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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4-07 14:02 조회 1,999회본문
본산 총지사와 전국 36개 교화의 장을 열다
힘들고 고단한 이들을 밀법의 지혜와 자비로 보듬어
창종 20여 년 만에 전국 주요 지역의 교화도량 확보
종단 사원을 신축하는 건 더 큰 수고를 요했다. 스승들은 배를 타고 오고가다 태풍을 만나 위태로운 일을 겪기도 하고 20리, 30리의 길을 하염없이 걸어 다녔다.
서원당 자리를 백방으로 물색하고 주변 입지와 발전 가능성을 살폈다. 그리고 건물을 세웠다. 건축에 있어서는 문외한인 스승들이 관리자로 나섰다. 시주금이 허투루 쓰이는 것을 용납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세세생생 교도들을 품어야 할 법계도량이기에 바르고 튼튼하게 지어야 했다. 현장에 파견된 스승들은 숙박비도 아까워 현장 한 구석에 나무판자로 간이 막사를 지어 공사를 마칠 때까지 머물렀다. 얼마나 철저히 했는지 지금도 사원을 보수 점검하는 이들이 정말 튼튼하게 지었다고 혀를 내두를 정도이다.
스승들은 전천후였다. 상담과 불공은 물론 사원을 세우고 살림을 살았다. 부엌 아궁이에서 밥을 짓고, 사원을 쓸고 닦고, 곳곳을 고치고 다듬는 모든 허드렛일을 도맡았다. 보시 받은 절량미는 일요일마다 다음 일주일 동안 먹을 분량을 식구수대로 덜어놓고 모두 헌상했다. 채 금요일이 되기도 전 어김없이 모자랐다. 아침밥도 먹지 못하고 새벽불공에 온 교도와 밥을 나눠먹곤 했기에 스승은 수시로 죽을 끓여야 했다. 바깥의 도량 청소는 비 오는 날을 기다려 빗물을 받아서 했다.
철두철미하게 아끼며 도량살림을 이어간 덕분에 사원은 안정적인 운영이 가능했다. 크고 작은 행사가 있는 날이면 공양간 문고리에는 참기름, 고춧가루, 쌀 등이 살포시 걸려 있었다. 지붕공사라도 할 때면 스승과 교도가 모두 나와 나란히 줄을 지어 시멘트를 날랐다. 어렵고 힘든 시절부터 함께 했기에 믿음과 정이 남달랐다. 넉넉하지 못한 가운데에도 더 많은 전당 건설과
교화 발전을 위해 희사를 빼놓지 않았다. 모두가 총지종의 교도이고 사원이고 스승이라는 한마음으로 도량을 일궜다.
1978년 1월 19일 수많은 난관을 무릅쓰고 종단 총본산 총지사의 건설을 완성했다. 재정적으로나 건축과정에서 부딪친 온갖 어려움들을 물러섬 없이 헤쳐 나갈 수 있게 도운 교도들의 원력은 총지사 성불탑에 아로새겨 있다. 한국불교계에 생활불교라고 하는 새로운 가치와 활력을 불어넣은 총지의 요람 총지사는 이후 서울의 강남 개발에 따라 변화하는 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여 종교와 문화를 아우르는 종합도량이자 한국불교종단을 대표하는 총지종 본산으로 자리매김했다.
사원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자 교화경험이 많지 않은 신규 스승까지 주교로 파견됐다. 큰 사원에서 스승으로부터 배운 철저한 수행과 교화 원력을 새로운 교화 현장에서 몸으로 부딪치며 실천했다. 최소 7년 이상 교도로서 염송정진하고 실천해온 내공을 유감없이 발휘했다. 때로 1년, 2년, 스승 없이 교도 스스로 사원을 운영하는 곳도 있었다. 계율을 지키고 불공을 올리는 데 승속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았다.
사원은 애초부터 서원당, 자성학교, 사택, 공양간 외 손님과 대화를 나눌 공간을 따로 짓지 않았다. 사무실에 앉아 있을 시간도, 법의를 갖춰 입고 있을 여유도 없었다. 매일 공식불공 후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교도들의 집으로 달려갔다. 재난 소멸과 소원 성취를 위해 가가호호 방문하고 농번기에는 논두렁 밭두렁에 앉아 불공을 올렸다. 스승들은 스스로를 119구조대 대기조라고 여겼다. 교도의 일이라면 밤낮을 가리지 않고 어디든 쫓아다녔다. 교도들은, 이런 일도 물어봐도 되나, 이런 일에 불공을 부탁해도 될까 하는 일까지 상의했고 스승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동사섭의 마음으로 함께 했다. 한여름이면 하루에 정복 모시저고리를 서너 번 갈아입어야 할 만큼 불공이 많았다.
힘들고 상처 입은 이들을 밀법의 지혜와 자비로 보듬었다. 외부의 여건도 호락호락하지는 않았다. 총지종에 대해 낯설어할 뿐 아니라 의심하고 경계하는 눈초리가 없지 않은 현실에서 오직 곧고 진실한 밀교수행법을 실천으로 보였다. 옹기종기 모여 있는 주택 한 귀퉁이, 혹은 시장통 한 가운데에서 움을 텄지만 법력 있는 스승들은 물론이고 초짜배기 스승조차 교도들을 신심으로 이끌어 곧 번듯하게 일으켜 세웠다.
신규 사원을 개설하는 틈틈이 이전과 확대를 거듭하여 36개 사원은 모두 몇 년 지나지 않아 여법한 자체 도량으로 우뚝 섰다. 창종 후 20여 년 만에 전국의 주요 지역에 교화도량을 확보할 수 있었던 데에는 오직 부처님께서 해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지극정성으로 불공한 공덕과 가피 덕분이었다. 세속적인 눈으로 보면 도저히 불가능해보였지만 우여곡절 끝에 서원당
을 세우고 헌공불사에 모여드는 교도들을 보면 불가사의한 법신 대일여래 부처님의 가지력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교화할 곳이 정해지지 않아 몇 달씩 창고 등에서 임시로 법회를 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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