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민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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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4호 발행인 인선(강재훈) 발간일 2021-11-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칼럼 지혜의 눈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태원 칼럼리스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1-11-05 14:54 조회 2,469회본문
유럽의 인도항로 개척은 향신료를 얻기 위한 욕망... 서양에 의한 근대화, 또 다른 형태의 십자군 전쟁
세계사에서 근대로의 이행에 결정적인 사건으로 1492년의 콜럼버스에 의한 아메리카 대륙의 도착을 듭니다. 예전에는 신대륙의 ‘발견’이라는 용어를 사용하였는데, 이는 서구중심의 역사인식이 반영된 용어로 비판받으면서 신항로의 개척, 대항해 시대 등의 용어가 대신 사용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전히 콜럼버스를 미화하면서 서구중심의 역사인식이 통용되고 있지요.
지리적으로 유럽과 아시아, 아프리카로 구분하는데 유럽은 어느 정도 동질적인 문화권이라고 하지만 아프리카는 사하라 사막 이북과 이남의 문화가 매우 이질적입니다. 인종적으로도 사하라 사막 이북은 백인종이고 이남은 흑인종으로 뚜렷이 구분됩니다. 아시아도 우리가 중동이라고 부르는 서아시아 지역은 사실 유럽과 한 문화권으로 묶여있다가 이슬람교가 성립하면서 문화권이 나뉜 경우이지요. 지중해를 중심으로 하나의 문화권으로 묶여있던 것이 지중해를 경계로 이슬람교 문화권과 기독교 문화권으로 분리된 것입니다. 이슬람 문화권은 동쪽에서 이주해온 투르크족이 주도권을 잡고 오스만 투르크국을 세워 아프리카, 아시아, 유럽에 걸친 대제국을 형성합니다. 이 과정에서 당시 유럽은 오스만 투르크의 간섭으로 인도와 동남아시아로부터 수입해오던 향신료를 원활히 공급받지 못하게 됩니다.
당시 유럽은 겨울동안의 식량으로 돼지고기를 훈제하거나 소시지 형태로 저장하였는데 장기간의 저장은 식량의 부패를 가져와 인도의 향신료는 식탁에서는 없어서는 안 될 물품이었죠. 참고로 유럽에 알려진 인도라는 지명은 현재의 인도와 동남아시아를 포함한 포괄적 용어였습니다. 따라서 1492년 콜럼버스의 아메리카 대륙의 도착이나 1497년 바스쿠 다 가마의 인도항로 개척은 이러한 향신료를 얻기 위한 욕망이 크게 작용하였습니다. 인도양은 서아시아의 이슬람권의 물산과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생산물, 그리고 중국의 물산이 활발하게 교류되던 바다였습니다. 그런데 인도에 도착한 다가마의 일행이 가져간 유럽의 물품은 그 품질이 조악하여 당시 인도양을 통해 교역되는 물품에 비교가 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가까스로 처분한 물품의 돈으로 산 향신료는 무려 60배의 이익을 남겼다고 합니다.
이러한 이익에 눈먼 유럽인들은 미친 듯이 동방무역에 달려들었는데, 상품의 질을 따라잡을 수 없었던 그들은 대신 무력을 앞세워 인도양 교역망을 장악하기 시작하였습니다. 유럽이 이슬람교에 대한 십자군 전쟁은 예루살렘을 정복하려는 흐름과 별개로 이베리아 반도를 장악하고 있던 이슬람권을 몰아내는 또 다른 십자군 전쟁이 있었습니다. 이를 레콩키스타, 재정복 운동이라고 하는데 1492년은 이슬람 세력을 이베리아 반도에서 마지막으로 몰아낸 해이기도 합니다. 수백 년에 걸친 전쟁으로 배출된 군인과 전쟁무기들을 앞세워 아메리카 대륙을 식민화하고 동남아시아 지역을 식민화하기 시작한 것이죠. 당시 유럽은 흑사병으로 침체된 경제가 아메리카 대륙과 인도로부터 들어오는 엄청난 금은재화로 경제적으로 급성장하기 시작합니다. 동시에 유럽의 각국은 주도권을 잡기위한 치열한 전쟁상태로 돌입하지요. 그 과정에서 주도권이 스페인에서 프랑스로 다시 산업혁명을 일으킨 영국으로 이동하였다가 19세기에는 독일로 이동합니다. 이들 국가가 이후 제국주의로 성장하여 전 세계를 식민지로 분할하는 경쟁을 전개한 것입니다. 아마도 유럽이 15세기 후반 이후 전 세계로 팽창하는 과정은 십자군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던 것이 아니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측면에서 서양에 의한 근대화는 또 다른 형태의 십자군 전쟁이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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