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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중한 믿음을 갖게 해주 은인 성명자 보살님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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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7호 발행인 김점순 발간일 1999-12-22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신행수기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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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광행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총지종 종지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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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5 10:40 조회 2,95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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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 소중한 믿음을 갖게 해주 은인 성명자 보살님을 찾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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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광행 보살이 부산으로 이사간 후 1956년 어느 가을날, 부민심인당 정원에게 찍은 사진

성명자 보살님, 안녕하세요. 지금 어디에서 살고 계시는지. 꼭 한번 만나 보고 싶습니다. 보살님과의 인연은 아마 지금으로부터 40여년전, 전쟁이라는 엄청난 소용돌이 속에서 아직 피난 갔다 돌아온 사람들이 자리를 제대로 못잡던 시절이였던 것같습니다. 제가 살던 집은 철길 근처라 폭격에 무너졌 고, 마침 그때 서울 와서 공부하던 저 의 동생네 집에서 저희 식구들이 살게 되었죠. 동생들은 난리통에 고향으로 내려가고 우리 가족들이 임시로 짐을 풀고 살았었죠. 그당시 나는 삼남매를 데리고 그런대로 재미나게 살았었죠. 보살님에게는 그때 3살 정도 되는 딸 이 있었지요? 같이 놀아줄 친구가 없 어 가끔 엄마를 따라 다녔던 기억이 납니다. 동네에는 여러 집이 살아 있 었어도 항상 조용한 편이었죠. 우리 집 골목 옆에는 수돗물이 있어서 아침 저녁 때가 되면 여섯 일곱 가구가 모두 수돗가로 나와 물도 길어가고, 쌀 도 씻고, 나물도 씻으며 분주했던 기억이 납니다.

나는 동네분들과 마주쳐도 인사 정도만 하는 편이었는데, 보살님은 유독 나를 반갑고 정답게 대해 주시곤 했죠. 우리 아이들이 너무 착하고 귀엽 다하시며 남매끼리 서로 싸우거나 우는 모습을 본 적이 없으시다 하셨죠. 그당시 제 바깥양반은 사업을 해보겠 다며 부산으로 떠나간지가 벌써 수개 월, 어린 아이들만 지켜보면서 마음이 울적해 있던 터라. 보살님의 말씀은 그저 고맙기만 했습니다.

그날도 우연히 보살님이 우리 집 마루에 앉아 이런 저런 얘기를 하던 끝 에 보살님께서 “아주 좋은 종교를 믿 는데도 마음 하나 고친다는게 참 힘들 다”고 말씀하시는 순간. 저는 정신이 번쩍 들었어요. 그때 제게는 의지할 뭔가가 필요했던가 봐요. 보살님이 다니시던 곳이 왕십리에 있는 절이었고. 이름은 심인당이라고 하셨죠. . 진언으로 염송하여 자기 허물을 고치는 곳이 라 하셨어요. “나도 한번 따라가 보고 싶다”고 하니 “그럼 내일 아침부터 1 주간 함께 다녀보자”고 하셨지요. 설 이는 마음으로 새벽부터 준비하고 일찍 대문 밖을 나섰습니다. 그때가  아마 1955년 11월 3일 이었을 겁니다. 아침 일찍, 두 사람은 용산 성남극장 앞에서 만나 을지로 6가까지 1시간 동 안 전차를 타고, 다시 내려서 왕십리 까지 20분 가량 걸어서 갔었죠. 당도 한 곳이 산에 있는 절이 아니고 마을 에 있는 큰 건물이었죠. 교단 안에 들어서니 부처님도 안계시고 글씨만 벽에 쓰여져 있고, 교단에는 노보살님 몇분이 불공하고 계셨습니다. 처음에는 조금 이상한 생각도 들었지만 성명자 보살님을 믿었으니까 열심히 배워 가며 1주간 불공을 했습니다. 자성일 에는 설법도 듣고. 49일불공도 하곤 했죠. 불공시간에 지각하면 공덕없다 하여 이른 아침부터 나서곤 했죠. 출 근시간이라 짐짝을 실은 듯이 비좁은 전차를 타고 다니면서 불공했던 그때 그 시절이 너무나 그립습니다. 절에 오고가는 길이 너무 멀고 시간도 많이 걸려서 아이들한떼 미안해 했던 기억 도 납니다. 절에 까지 가는 시간이 1 시간반, 불공시간이 2시간, 집에 오는 시간이 1시간반, 꼬박 5시간 동안을 정신없이 재촉하여 집으로 돌아와 보 면, 집 골목에서 아이들이 나를 기다 리고 있는 거예요. 아이들에게 ‘미안해, 미안해’하며 업고 안으며 달래주던 생각이 납니다.

겨울이 지나고 초봄이 되었을 때, 저는 임신으로 만삭이 되었을 때였죠. 예정일보다 일찍 애기를 낳게 되었는데, 순산을 하게 되었죠. 그러나 기쁨도 잠시 저는 심한 기침을 하기 시작 했죠. 저는 출산과 산후조리가 남들 보다 10배는 더 힘들었던 것 같았습니다. 병원에 가서 약을 지어 먹어도 보 , 주사도 맞아 보았지만 별 차도가 없었습니다. 계속 기침이 낫습니다. 낮 에는 조금 나아지는 것 같다가도 밤이 되면 제대로 누워 있지도 못하고 이불을 턱 밑까지 뒤짚어 써고 앉아서 밤 을 꼬박 새기도 했습니다. 그때 보살 님이 걱정하며 힘들어 하는 나를 안스럽게 여기셨죠. 하루는 조용히 내 옆에 오시더니 “애기 엄마, 내가 시키는 대로 하겠느냐?”고 하셨죠. 그러겠노 라고 하니 보살님은 “저기 있는 약봉 지들을 다 내다 버려라”하셨죠. 그 당시 보살님은 시어머니를 모시고, 시누이, 어린 애기, 또 애기아빠, 5식구였죠. 밤에 식구들이 모두 잠든 사이 우 리 집에 오셔서 밤새도록 저를 위해 제 옆에서 7시간 정진불공을 해주셨죠. 부처님께서도 보살님의 정진에 정  감동하셨을 겁니다. 보살님! 그때 제 기침이 멈추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 태산 같은 은혜는 잊을 수가 없습 니다. 보살님의 불공공덕으로 얼마 있지 않아 씻은 듯이 기침은 멎었고, 지금도 감기라곤 없습니다. 그 정진력을 배웠던 저도 부처 님께 불공정진을한 덕택으로 애기들도 큰 병 없이 잘 자라왔습니다. 그럴 때마다 보살님이 더욱 보고 싶고 그리워집니다. 그때 보살님이 철야정진을 마치고 새벽녘이 되어 가시는데도 제가 물 한 모금이라도 대접을 하지 못 한 것이 지금도 가슴이 저려 옵니다.

보살님이 아니었으면 제가 지금 이렇게 살아 있었을까 하는 생각 을 하게 됩니다. 내 몸이 아플 때, 누가 나를 위해 그토록 지극정성 불공해 주었겠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더욱 만나보고 싶어 지는군요. 만나면 할 옛이야기가 너무나 많을 거예요. 보살님, 그때 너무나 갑작스럽게 헤어지게 된 것이 지금 생 해보면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헤 어지게 된 것이 남편의 사업 성공으로 우리 가족들이 부산으로 이사를 했기 때문으로 기억합니다.

서울에 있을 때는 애기가 둘이었고, 부산으로 이사간 후에는 애기가 넷이 되었습니다. 부산으로 이사가서는 한 동안 부민심인당에 다녔던 것으로 기 억납니다. 그런데 보수동에 살때에 보 살님이 그곳으로 한번 찾아 오셨죠. 그때는 제가 산후 얼마되지 않아 정신이 없었던 터라 보살님의 근황을 여쭈 어보지 못했습니다. 지금은 어디에 사 시는지, 그리고 그때 부산으로 오신 것이 이사를 온 것인지, 아니면 저를 만나려고 일부러 서울에서 내려온 것 인지…. 여러 가지가 궁금합니다. 꼭 한번 만나 뵙기를 부처님께 서원합니다.

그리고 지면을 통해 종령님과 전국 스승님들께도 이른 새해인사이지만, 새해인사를 올립니다. 저희 교도들을 위해 항상 애쓰시고 좋은 가르침을 주시는 종령님과 스승님들께 감사를 드립니다.


총지종 총지사 정광행 합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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