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을 굳이 물고 늘어지는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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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7호 발행인 김점순 발간일 1999-12-22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현묵의 세상읽기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종단협 소비자보호위원회 실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5 09:54 조회 3,009회본문
지난 초여름 복지관직원 연수를 강원도 원주 근방에서 일박이일동안 가졌다. 우리 종단의 의식과 그 의미에 대한 이해를 돕는 시간을 가졌고 복지관 사업계획에 대한 평가와 앞으로의 방향을 함께 얘기하였다. 이튿날 점심을 끝으로 잡혀있던 연수일정을 마치고 가벼운 마음으로 산행과 사찰 참배를 하였다. 사찰에서 내려오는 중에 산중턱 나무숲 속에 박혀있는 푯말을 보았 다. 한 30미터에서도 글씨가 훤히 보였다. 그푯말에는우리글로 ‘항공엽시비지’라는 아리송한 문구가 새겨 있었다.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보아도 도무지 알 수 없었다. 혹 앞뒤에 빠진 글이 있는가 찾아보아도 없었다. 분명히 잘못 쓴 글은 아니었다. 도대체 저 말이 무슨 뜻인가. 그 글을 한자 로 꿰맞춰 보았으나 영 종잡을 수 없었다. 함께 간 이들에게 물어보았으나 답은 없었다. 관리소에 물어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어쩌겠나.
얼마 전 교계 한 종단이 위탁한 제천 청 소년수련원을 개관한다고 하여 축하도 할 겸 시설도 볼 겸하여 시간을 내서 가 본적 이 있다. 그런데 수련원 뒷산에서 또 그 아리송한 문구를 보았다. 이번에는 ‘공엽 시비지역’이라고 했다. 아마 ‘항’자는 지워진 것 같았다. 그렇다면 미루어 짐작하 건대 이 말의 뜻은 삼림보존을 위해 비행 기로 나무에 영양분을 뿌려주는 지역이라는 뜻일 터이다. 굳이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있도록 풀어 쓰지 않은 까닭은. 모르긴 ,몰라도 그렇게 하려면 글자수가 늘어나기 때문일 것이다. 설령 그렇다고 하여도 차라리 우리말로 풀어쓸 일이지 이거 무슨 자기들만 아는 암호 같아서야 공연히 사람 궁금증만 더하고 한발 더 나가면 그 ‘시 비’가 ‘시비’를 일으키기 마련이다.
그러고 보면 우리는 주변의 곳곳에서 아리송한 말들을 많이 보게 된다. 요즘에는 공사장에 ‘우리 현장은 비산먼지를 발생하 지 않습니다’ 라고 쓰여있는데 이 또한 한 참 무슨 뜻인가 궁리하게 만드는 말이다. 그냥 '먼지가 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 습니다’ 라고 하면 오죽 좋은가. 허구헌날 공사가 그칠 날이 없는 서울 사당동 근처 에서는 멀쩡한 땅을 뒤집는 공사가 한창인 데 그 공사 명칭이 ‘지하암거설치공사’ 라 고 써붙혀 놓았다. 차를 타고 지나다 얼핏 무슨 지하 운운하길래 지하에 있는 큰 바 위덩어리를 제거하는 공사인가 했는데 거꾸로 암거를 설치한다니 의아해질 수밖에 없었다. 또 도시 근처의 개천 씀씀이를 구 분하여 ‘준용하천’ 이라고 하는데 나는 아 직 이 말뜻을 모른다.
현정부가 들어선 이후 재벌의 부정한 축재를 폭로하고 소액주주의 권리를 드높히 는 운동을 벌이는 한편 사법부와 국회에 대한 활발한 감시와 비판으로 국민들한테 많이 알려진 시민운동단체가 있다. 나는 이 단체의 초창기에 운영위원으로 회의 때 마다 나름대로 열심히 참석했었다. 그런데 매번 회의 때마다 일종의 이질감을 느껴 점점 발길이 뜸해졌고 요즘에는 그 단체에 서 부쳐오는 회보. 언론의 보도 등으로만 단체의 사정을 전해듣고 있다. 회의에 사용하는 말들이 대략 무슨 패러다임이 어쨌 다느니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느니 휘슬러에 대한 법적 보호장치가 반드시 실현되 어야 한다느니 실로 어려운 용어들을 쉽게 사용하는 그 모습에 질려버렸다.
요즘에는 아이들 쓰는 말도 알아듣지 못 할 때가 많다. 엄청 좋다라는 말 대신 ‘울 트라캡숑베리베리나이스굳’ 이라고 하질 않나 여보세요를 ‘엽세요’ 로 바짝 줄여 말하 는 바람에 못알아들어 당황스러울 때가 한 두번이 아니다. 이런 유행에 적응하지 못 하는 내가 잘못인지는 모르겠으나 좌우지 간 말을 제대로 쓰지 않는 사회적 분위기 는 바람직하지 않다는 것이 나의 소신이다. 한쪽에서는 공연히 권위를 내세우느라 말을 어렵게 쓰고 한쪽에서는 저희들만 알 아듣도록 은어화된 말을 쓰는 풍토는 곧 사회가 그만큼 혼란하다는 반증이다.
확실히 우리사회는 말로써 망가지고 있다. 저희들끼리 음모를 꾸미다가 들통나니까 서로 모함이니 조작이니 하는 말투나 그런 이들을 감싸느라 대통령까지 나서서 ‘마녀사냥’ 이라는 거친 표현을 쓰니 세상 이 예사롭지 않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말은 이미 질릴대로 질렸기에 거론하는 것 자체가 말을 욕되게 하는 일이겠다.
제말을 제대로 쓸 줄도 모르는 사회가 바르게 설 수 없음은 당연한 이치다. 어찌 된 일인지 가장 정확한 말을 써야할 방송 인과 출연자들조차 엉망이다. 우스개짓과 소리로 먹고사는 희극배우들은 더 말할 나 위가 없다. 세계화가 곧 외국어 습득과 일치하는 것쯤으로 아는지 아직 우리말도 서툰 아이들에게 영어를 익히게 만들고 느닷 없이 정부가 앞장서서 정부문서에 쓴다고 야단을 피니 여기서 어찌 제겨레의 주체성을 찾겠나. 그런 슬리퍼를 ‘끌신’이라는, 우리말을 참신하게 고르고 다듬어 쓰는 북한사회의 줏대만큼은 배울만 하다 하겠다. 바라건대 우리말만이라도 아름답고 바르게 써서 최소한의 민족적 자긍심을 굳게 지켜갔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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