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에도 천사들이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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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1호 발행인 총지화 발간일 2001-0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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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7 08:17 조회 2,517회본문
희망에 찬 2000년을 맞이한다고 떠들썩 했던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다사다난했던 한해가 다시한번 저물어 가나 봅니다. 요즈음 더욱 살기 어려워졌다는 말들이 많이 나 옵니다만, 서로 어려운 가운데에서도 ’헌신의 정’과 ’나눔의 정’이 조금이라도 느껴지는 한, 그래도 이 세상은 살아갈 만한 가치가 있는 곳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 봅니다.
저는 요사이 제 아버님을 바라 보면서 두 가지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하나는, 여러가지 어려움 중에서도 현대 노인들에게는 가장 큰 고통이 ‘외로움’이 아닌가 하는 것이 고, 또 하나는 이 세상에는 실제로 적지 않은 천사들이 현실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체 험하게 된 것입니다.
주변의 친구들이 하나 둘 사라져가는 노 기, 부모한테는 효도를 강요받고도 자식 한테선 기대하기 힘든 세대, 상업주의의 만 연에 따라 노인들이 딱히 즐길만한 오락이 나 소일거리가 없어 겪는 외로움, 설상가상으로 서서히 진행되는 노인성 치매로 인해 매일 믿고 의지하던 신앙심마저도 빼앗기고 외롭게 살아가는 모습, 이것을 현재 저는 제 아버님으로부터 보고 있습니다.
50대 초로의 나이에 은퇴하신 후 수십년간 단 하루도 빠짐없이 성당 새벽미사에도 다니셨던 분이, 3년전부터는 하루 일 술로 외로움 달래시는가 하면, 기물을 파괴하며 가족 들을 들볶으시고, 친지들에게는 외로운데도 찾아오지 않는다고 시도때도 없이 화풀이 전화를 하여 그들과의 정을 몽땅 끊어 놓 도 하셨던 분. 그러다 2년전부터는 치매로 병원에 다니시게 되었는데, 금년 들어서는 새벽미사는 커녕 아예 과거에 성당에 다니셨다는 사실조차 기억 못하시게까지 되셨지요. 그런데 더 큰 변화는 갑자기 최근 2개월 전부터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환청과 환시현상으로 돌아가신 분들과 이야기를 하시는가 하면, 가족들 조차 분간 못하시더니, TV와 신문과는 아예 담을 쌓으시고, 밤잠도 거의 안 주무시며 수십년간 끊었던 담배를 시작하셨는데, 더욱 큰 일은 수십년 전에 살았던 전라도 전주에 어린 손녀 딸들한테 가시겠다면서 온갖 쓸데없는 물건을 가방에 챙겨 밖으로 나가시는 지경까지 되었습니다.
열쇠를 숨겨 놓으면 한밤중에 망치로 현관문을 두드려 부수시다 넘어져 다치시기도 하면서, 매일 아침이면 일찍 양복을 단정히 입으시곤 가방을 든 채, 제가 자고 있는 방문을 두드려 서울역 가자고 조르시는 일이 시작 되었습니다. 그러면 저는 아침부터 차에 모시고 거짓으로 시골 간다면서 시내를 빙글빙글 돌기도 하며 기억을 되살려 드리려 온갖 방법을 다 써보지만, 저도 모르게 아버님께 큰 소리를 지르는 불효자식으로 변해 버리기 일쑤였습니다. 행여나 고혈압이신 어머님 마저 쓰러지신다면 나의 가정은 어떻게 되나 하는 생각이 들 때에는 정말 하늘이 무너지는 듯 하였으며, 차라리 몸이 아프셔서 병원에 입원이라도 하고 계시는 것이 더 낫지 하는 생각까지 들게 되고 하루 이틀도 아니고 이것이 과연 사람이 할 짓인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세상이 야속하기도 하고 솔직히 아버님이 원망스럽기까지 하였습니다.
그러다 저는 바로 한달 전, 하늘이 도우시어 이곳 노인복지센터에서 지상에 살아있는 천사들을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천사들이 무슨 마술이라도 부리셨는지 하루가 다르게 아버님의 태도가 급격히 달라지기 시작하셨습니다. 처음 며칠 간은 시골에 모셔다 드린다고 속여 시내를 빙글빙글 돌다가 복지센터에 모셔 면, 되돌아 가는 이 아들에게 “동생, 이따가 꼭 데 리러 와야 해” 하며 불안해 하시던 모습이 마냥 마음에 걸려, 저도 몇번이나 뒤돌아보며 속으로 울었헜지요. 그러던 분이 이제는 정상적으로 식사도 하시고, 술도 알맞게 드시고, 매일 아침 시골 가자고 제 방문을 드리시는 대신 이곳 복지센터에 등교하시겠 다’고 거울까지'보시며 저를 차분히 기다려 주시고, 주일이면 순순히 어머님따라 성당 에도 가시게 되고, TV와 신문도 이따금씩 보시면서, 의심하지 않고 약도 잘자시고 잠도 잘 주무시게 되니, 그동안 온 식구들이절망감으로 안절부절 못했던게 언제였던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복지센터에 공휴일이 없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허황된 욕심까지 가져' 본다면, 아무리 마음씨 착한 천사 분들이라도 저를 벌하시겠지요. 저는 한달 전 이곳 노인복지센터에서 저의 아버님을 받아 주셨을 때 느꼈던 그 기분을 평생 잊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하루종일 계실 수 있는 보호소는 소개해 줄 수 있지만, 가족 들의 정만 하겠느냐” 는 의사선생님의 말씀 을 듣고 아무 보호소나 병원에 모시고 갈 수도 없어 절망하고 있던 차에, 우연히 평소 사회활동을 많이 하시는 제 안식구의 친구한테서 마음놓고 아버님을 믿고 맡길 수 있는 곳이라며 이곳 복지센터를 소개받았는데, 인원이 꽉 차서 대기자가 많아 언제 자리가 생길지 모르겠다는 말씀을 들었을 때의 절망감. 집을 나가셨을 경우에 대비하여 치매가족회를 찾아 팔찌를 만들어 채워드리고. 다시 한번 청강생으로라도 받아 주실 수 없냐고 떼를 쓰자, “우선 본인이 적응할 수 있는지 한번 모셔와 보라”는 말씀을 주시던 이곳 담당 선생님의 얼굴이 그 순간 저에겐 천사로만 보였습니다. 게다가 며칠 후에 정식 회원으로 받아 주시겠다는 말씀 들었을 때에는 그야말로 제 딸이 대학교 시험에 합격하였을 때의 기분보다도 더 형언할 수 없는 기쁨이었습니다. 제 입에서 나온 말은 그저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 뿐이었습니다.
“할아버지, 할아버지”하며 친 손녀딸이나 자식 며느리들도 그렇게는 할 수 없을 정도로 정겹게 환대하며 맞아주시는 담당 선생님들과 여러 봉사자 분들의 모습, 그리고 이분들에게 둘러싸인 채 황홀하 여 어리둥절하시던 모습, 아마 본인도 생전 처음 받아 보시는 대영접이었을 것입니다. 인간이면 누구나 느끼며 사는 외로움이건 만, 노인들이 삭여야 하는 외로움이란 현대 의학의 힘만으로도, 신잉심만으로도, 그리고 가족들의 도움만으로도 벗어나게 할 수 없 는 것이며, 특히나 치매성 노인들에게는 오 로지 ‘헌신의 정’과 ‘나눔의 정’을 베푸시는 천사들의 도움이 없다면 불가능하다는 것을 저는 깨달았습니다. 불교총지종사회복지 재단 역삼재가노인복지센터에 근무하시는 지상의 천사 분들-매일 웃는 낯으로 외로운 분들을 친딸 이상으로 반기시고 보살피시는 주간보호센터 선생님들, 아침 저녁으로 소를 지으며 이 분들을 일일이 모셔오고 모셔다 드리는 담당 선생님, 따뜻한 마음으로 정성껏 봉사해 주시는 봉사자 여러분들, 그리고 이 천사들을 격려해 주시고 이끌어 주시는 관장님. 여러분들이 바로 천사들이십 니다. 정말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
2000, 12, 27
이용회원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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