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짓 희망과 실패한 개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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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0호 발행인 총지화 발간일 2001-01-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박준석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역사학연구소 연구원, 한국노동이론 정책 연구소 연구교육위원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7 05:58 조회 2,719회본문
2000년 한 해가 저물어 간다. 그토록 요란스럽던 새천년 장미빛희망도 계절만큼이나 싸늘해졌다. 희망의 선전을 실현할 수 있는 고리는 개혁이었다. 개혁의 본 뜻은 낡고 썩은 제도와 사람을 바꾸어 시대의 문제를 해결하는 일이다. 그러나 거리로 쫓겨나고 하루하루 삶이 불안한 수많은 노동자에게 ‘개혁’은 ‘일자리 쫓겨나기와 멀쩡 한 공기업 팔아먹기’로 비춰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말의 본뜻이 아무리 그럴듯하고 선전이 현란해도 이해관계에 따라 의도와 결과는 다르다.
일제 식민지 시대 이광수가 작사하고 홍난파가 작곡한〈희망의 아침〉2.3절을 보자.
2,이러 나거라 우리 임금의 분부를 받자와 일억일심히 넓은 천지에 팔굉일우의 새론 세계를 일욱하라고
3,대륙 이만리 대양 십만리 대아세아의 대공영권의 우리 일장기 날리는 곧이 자자손손 만대의 복누릴 국토
일본 천황에게 한마음 한뜻으로 충성을 다하여 일본이 우주와 지구의 중심이 되는 세상을 만들고, 대동아 공영권을 확대하여 일장기 가 영원 무궁토록 펄럭이는 세상이 ‘희망’이라는 것이다. 식민지 지 배를 찬양하고 정당화하면서 순종과 체념의 노예의식을 불어 넣으려 는 일제의 국민가요이다.
일제 식민지 시대 제국주의 침략 세력과 그 앞잡이 노릇을 하면서 자신들의 부와 기득권을 유지확대하던 친일 자본가, 지주, 어용 지식인, 친일 민족반역자 들에게는 식민지 지배체제가 계속되는 것이 희 망의 세상일지 모른다. 하지만 빼앗긴 나라의 노동자, 농민, 가난한 백성들에게는 그것이 결코 희망일 수 없다.
식민지 지배체제는 마냥 계속되지 않았다. 1945년 해방이되었다. 통일된 민족국가 수립이라는 시대의 과제는 해결되지 못한 채 분단 현대사가 전개되었다. 허리띠 졸라매고 열심히 일하면 10년 뒤에는 잘 살 수 있다는 장미빛 희망의 선전이 10년 단위로 계속되었다. 일하는 사람들의 생존권을 중심으로 보면 지금 여기서도 행복할 수 있는 권리가 끊임없이 유보당해온 과정이기도 했다. 2000년도 마찬 가지였다.
요즘의 ‘개혁’을 ‘삼남민란’ ‘임술민란’이라고 부르는 1862년 농민항쟁과 빗대어 생각해 보자. 140여 년 전의 일이다. 사회 발전 단계나 조건에 커다란 차이가 있지만 보편의 원리와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시사받을 점은 있다.
1862년 2월 경상도 단성과 진주에서 시작한 농민 봉기는 5월까지 경상도 전라도 충청도 곳곳에서 들불 번지듯 터져나왔다. 봉건 정부와 국왕은 중앙관리를 파견하여 회유와 탄압 양면 정책으로 이를 무마하는 한편 동향과 원인을 조사하였다. 중앙 정부에서 파악한 항쟁 의 직접 원인은 삼정문란이었다. 정부에서는 특별기구로 ‘삼정이정 청’을 설치하고 수습방안을 마련하여 시행하기로 하였다. 6월 들어 철종은 전국의 정치인 지식인들에게 수습책을 물었다. 수백명이 견 해를 제출하였다. 그들의 처지나 지위, 관심과 관점에 따라 다양한 의견이 나왔다.
1862년 농민항쟁의 직접 원인인 삼정문란에 대한 인식과 대응은 크게 개선안, 개혁안, 혁신안으로 나뉘어 진다. 개선안은 삼정문란의 원인을 수취질서의 해이나 운영상의 폐단으로 보았다. 제도자체에는 결함이 없기 때문에 제도는 그대로 유지하되 운영을 개선하자는 지배층 중심의 보수적 방안 이었다.
개혁안은 온건 개혁안과 강경 개혁안으로 나뉘어 진다. 온건 개혁안은 운영을 개선할 수 있는 것은 그대로 유지 하고 법과 제도를 고쳐야 할 것은 고치자는 부분 개선, 개 혁안이었다. 강경 개혁안은 삼정의 수취제도가 문제이므 로 제도 자체를 전면 바꾸자는 안이었다.
혁신안은 농민항쟁을 삼정문란이나 농민침탈에 대한 저 항만이 아니라 지배층이나 지주층에 대한 농민들의 계급 대립으로 파악하고, 삼정 제도는 물론이고 당시 경제제도 의 중심축이었던 지주제까지 개혁해야 한다는 혁신적인 방안이었다. 사회 구조의 모순이 문제라는 인식이 깔려 있으며 농민층의 이해를 적극 반영하는 안이었다. 왕에게 올리는 상소문 형식을 띤 것이기 때문에 사회구조를 전면 변혁해야 한다고 드러내기는 힘들었다.
봉건정부와 철종이 택한 방안은 무엇이었을까? 대지주들과 보수적 중앙관료들은 내심으로는 개선안으로 수습하길 바랬다. 그것으로 는 농민들의 항쟁을 잠재우기 힘들었다. 온건 부분 개혁안이 채택되 었다. 전정과 군정은 개선하고 환곡은 혁파하는 대신 토지에 세금을 더 매기려는 삼정이 정책이었다. 이것을 삼정이 정청이라는 특별기구 에서 관할하도록 하였다.
삼정이정책과 삼정이정청은 농민들이 투쟁으로 얻어낸 일정한 성과물이었다. 지배층으로서는 체제를 유지하려는 양보와 개량의 무마책이었다. 가장 문제가 컸던 것이 환곡이었기 때문에 농민들은 확곡을 혁파한다는 발표를 믿고 항쟁을 멈추었다.
농민들이 잠잠해지자 보수 기득권 세력이 개혁의 덜미를 잡기 시작하였다. 중앙 관료와 철종도 삼정이정책을 적극 실현하려는 의지 가 부족했다. 보수 세력을 휘어잡으며 개혁을 밀고 나갈 힘도 약했다. 삼정이정책의 실시가 유보되었다. 7월에 들어서는 ‘이하전 역모 사건’ 을 터뜨려 관심을 다른 곳으로 돌리려 하였다.
10월 말 개혁안이 폐기되었다. “너무 서둘러서 완벽하지 못할 염 려가 있어 옛 제도로 돌아가는 것이 편리하다”는 것이 이유였다. 개선안으로 후퇴한 것이다. 기대했던 개혁이 실패로 돌아가자 곳곳에서 농민들이 다시 봉기하였다. 그러나 한풀 꺾였다 타오르는 불길은 봄과같이 거세지 못했다.
거짓 희망의 노래는 사회 모순을 은폐 유지하려는 환상 조작일 뿐 이다. 사회 구성원 대다수의 이해와 요구를 대변하지 않는 ‘개혁’은 허구이며, 그들을 동반자와 주체로 삼지 않고서는 개혁을 시행하기도 유지하기도 어렵다.
1862년 농민항쟁의 역사는 온건 부분 개혁조차도 투쟁없이는 얻어 내지도 지켜내지도 못한다는 것을 가르쳐 준다. 그 뿐인가. 1894년 농민전쟁과 갑오개혁도 마찬가지다. 그 뒤의 우리 근현대사는 노동자 민중이 개량이라는 당근에 현혹되지 말고 개혁을 디딤돌 삼아 변혁의 길로 갔어야 했다는 교훈을 알려준다. 지금의 현실은 역사가 되어 후대에 무엇을 남길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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