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행법 논쟁에 부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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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1-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총지기획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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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19 06:59 조회 2,561회본문
(명상아케데미 원장 혜봉)
제3의 수행법이란 과연 무엇인가
요즈음 화두선이 아닌 여타 수련들을 두고, ‘제3의 수행법이다’ ‘불교적인 수행이 아니다’ ‘옳다, 그르다’ ‘큰스님들이 결론을 내려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항간에 오가는 모양이다.
그렇다면 논의에 앞서 제3의 수행법을 말한 분은 제3의 수행법이라고 하는 것이 어떤 수행법을 두고하는 말인지, 제3의 수행법이 있디면 제2의 수행법과 제1의 수행법이 무엇인지 먼저 밝혀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히면 제3의 수행법이라는 이름을 붙여서 언어의 혼란을 가져오는 것은 이닌지 살펴봐야 할 것이다.
국내에서 만들어진 동사섭, 마음나누기, 해피타오, 가래산의 마음수련, 정신 세계사에서 주관하는 각종 수련 등의 여러 가지 수련이나 라즈니쉬의 관법명상, 각종 힌두의 요가명상, 동남아의 위빠사나 명상, 티베트의 각종 대승 명상 등을 말하는지, 아니면 미국에서 들어온 아봐 타나 코비의 7가지 성공하는 비법 등을 말하는지, 아니면 단학이나 국선도와 같은 각종 단학 수련이나 중국에서 들어온 법륜공이나 향공 같은 기공을 두고 하는지 좀더 구체적으로 밝힐 일이다.
그리고, 이런 것들을 지칭한디면 그 이 름을 그대로 쓰면 되지 굳이 제3의 수행 이라 이름하여, 그 내용을 모르는 사람 들에게 이름 때문에 혼란을 야기시킬 필 는 없다고 보며, 그냥 고유의 그 이름 쓰면 되리라 본다.
수행정진의 의미는 어디에 있는가
개인적인 견해를 밝히라고 한다면 이런 논쟁을 하기보다는 먼저 나 자신의 생사 문제와 고통받는 이 시대의 중생들을 위 해 열심히 수행 정진하여, 참다운 나 자신을 깨치고 진리를 깨쳐 세상에 나아가 보살행 하는 것이 정말로 해야 할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다.
그리고, 각종 수행법이 바람직한지 그렇지 않은지 그 시시비비를 가리고 싶다면, 부처님께서 생사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여러 스승을 찾아가서 그 스승들이 제시하는 수행법의 ‘최고경지’에 다다른 후에도 ‘생사문제’카 해결되지 않자 그 수련법들을 버리고 스스로 보리수나무 아래서 호흡관찰과 몸과 마음에서 일어나는 현상관찰을 통해 정각을 이루셨듯이, 스스로 그 수련을 받아보고 자신이 원하는 바의 수련이 아니면 버리면 될 것이다.
수행방법이 문제인가, 아집과 법집이 문제인가
또한, 오늘날 화두선은 많은 사람들이 왜 어렵다고 하는지, 일부에서 화두 수행 하는 분들이 법거량 하는 것을 보고 ‘현실 과 상관없는 관념의 유희다’ 하는 소리를 하는지, 선이 정말로 현대인들에게 맞는 수행법인지, 오랫동안 수행히던 스님들 중 에서도 화두로 깨치지 못하고 중도에 포기하게 되는 이유가 뭔지 돌아보되 혹은 수행법 자체에는 문제가 없는지, 오늘날 현대인들에게 문제가 있는 것은 이닌지 짚어 봐야 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점을 치지도 보지도 못하게 하셨지만, 오늘날 한국 의 많은 불자들은 끊임없이 점을 보고 명리학을 공부히며 길흉화복을 점치는데, 이 를 강요하고 비판한디고 될 일인가.
타인에 대하여 길흉을 점치고 무당을 찾아가기보다는 자기 스스로 행복해 지고자 여러 가지 수련을 하는 사람들과 그 수련에 대하여, ‘그르다’ ‘문제 있다’ ‘한계가 있다’ 고 하여 ‘하라, 하지 마 라’ 하는 식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인가?
화두 참선하는 분들은 대중들을 생사 해탈할 수 있느 길로 다 인도하지 못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 특히 일반인을 그렇다 치고, 스님들이 역대 조사님들과 같이 다 깨치지는 못할지라도 그처럼 공부의 길로 일념매진 못하는 현실에 대해서는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 불교의 입장에서 최상의 수행법이라고 주장하는 화두를 들어도 자신의 고민을 해결 못하고 번뇌만 쌓이는 것보다 긍정적인 면이 있지 않은가. 고통이 크든 작든 그것이 바르게 해결된다면, 화두 수행법이 아닌 여타의 수련을 하는 사람들을 설득할 수가 없는 것이다.
오히려 이와 같은 주장들이 화두 수행법의 고귀한 가치를 떨어뜨리고, 대중들로 하여금 화두 수행하는 분들은 자기만 최고라 하는 오만한 사람들이라는 인상을 주지는 않을까, 하고 생각해 보지 않을 수 없다. 이것은 개인적으로 화두 수행을 해보고 화두 수행의 그 묘하고도 즉각적 이며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그 맛을 알기 때문에 그러하며, 특히 개인적으로 처음에 화두를 들었다가 의단 참구가 되질 않아서, 다양한 수련을 통해 나중에 화두로 돌아온 본인으로서는 더욱 그러하다.
이 화두 공부법을 이 시대 대중들이 받아들여 깨칠 수 있도록 사무치도록 정진함과 아울러 누구든지 관심을 가지고 공부할 수 있도록 그 방법을 제시해야 할 것이다.
반면, 화두 수행이 어렵다하고 외면하는 사람들이 있디면 자신의 공부하는 자세와 노력한 바를 자세히 살펴보고 깊이 반성해야할 일이다. 왜냐하면 역대 조사들이 수없이 깨쳤던 바가 사실일진대, 누구든지깨칠 수 있는 법이 아디라 규정하는 것 또한 그의 단견이며 자신의 허물이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방법이 문제가 아니라 탐진치 삼독과 아상으로 형성된 망령된 자기를 버리고 참된 자기를 깨치고 진리를 깨달아 생사문제를 해결하여 고해의 바다를 건너면 되는 것이다.
화두 수행법이 부처님 당시부터 있었던 것이 아니라 불교의 관법 수행이 중국에 들어와서 노자와 장자를 만나 중국 토양에 맞는 수행법으로 완성되었듯이, 화두가 최상이라 해서 화두만 주장하는 것 또한 법에 묶이는 또 하나의 법상이 아닐 수 없다. '위빠싸나가 최상이며 근본이며 화두는 불교가 아니라고 하거나 문제가 있다’고 하는 일부의 주장 또한 이와 다를 것이 없다.
화두선을 하든 위빠사나선을 하든 염불 을 하든 주력을 하든 그 어떤 공부를 하 든 자신의 공부법에 묶여 내가 공부하는 방법만히 최상이라 주장하면서 타인의 공부법은 폄하하는 일 자체가 이미 법에 묶인 법집은 아닐까.
수행자로서 할 일은 무엇인가
그렇다면 오늘날 우리가 참으로 해야 할 일이 있디면 무엇일까?
부처님이 깨달음을 펴신 이후 인도에서는 불교와 힌두교가 서로 융합히면서 새로운 문화와 종교와 사상의 꽃을 피웠고, 중국에서는 불교가 들어가서 유교, 도교와 함께 서로 어우러져서 인도에는 없는 중국적이며 동아시아적인 선불교의 꽃을 피웠으며, 불교에 영향받은 유교와 도교 역시 보다 풍성한 사상과 문화의 꽃을 피웠듯이, 오늘날 서구에는 서구의 종교와 철학이 동양의 다양한 사상과 종교를 만나서 과거 세기와 다른 서양의 한계를 극복할 수 있는 새로운 문명의 꽃을 피워 가는 시점에 와 있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을 보면 한편 서로 이해하고 협력하며 화해하는 긍정적인면 도 있지만 아직도 부정적이며 편견에 가득찬, 찌든 사고에 묶여 사는 우리들의 현실적 문제에 직면하게 된다.
그래서 마음공부하고 명상하며 참선하는 사람들만이라도 자기를 버리고 이 모든 장벽들을 서로 회통시켜 하나로 나아 갈 수 있게 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으며 최소한 서로간에 존중하고 협력하는 사회로 나아가는 역할을 할 수 있기를 제안하는 바이다.
따라서 어떤 종교를 막론하고 명상을 하건 참선을 하건 마음공부를 하는 사람 들은 먼저 자신이 공부하는 공부법에도 자기뿐만 아니라 그 공부에 분명한 선지식들이 확연하다 할 때까지 공부하되, 다른 공부법도 외면하지 말고 받아들여 그 공부를 확연히 알 때까지 공부하여, 오늘 날 인류와 우리 사회가 참된 자신을 상실하고 탐욕과 감각적 쾌락과 서로 다른 모양과 견해와 무지 때문에 개인뿐만 아니라 집단과 집단 국가와 국가 간에 끊임없이 싸우고 사는 이 불타는 화택의 세계를 구제하는데 기여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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