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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인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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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1-1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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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유동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법사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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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0 18:30 조회 3,01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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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와 인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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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동호 법사>

불교는 어떤 종교입니까? 진리를 깨달아 행복한 삶을 누리게끔 하는 종교입니다. 깨달음은 읋고 그른 것에 대한 명료한 결택을 전제로 합니다. 하지만 불교는 또 성내지 않는 종교, 즉 평화의 종교입니다.

자신의 깨달음을 다른 사람이 공유하지 못했다고 그들을 질책하거나 무너뜨리지 않고 넉넉히 받아들여 기다려 줄줄 아는 인욕과 관용의 종교입니다. 상대의 잘못을 일깨워도 주지만, 때로는 그 잘못을 감싸 안아주기도 하는 것입니다.

서로 다를 수밖에 없는 부분을 인정하면서 같은 방향 , 즉 정법으로 나아가기를 도모하되, 그 일 또한 결코 짧은 시간에 이뤄질 수 없다는 점을 항상 염두에 두어야 할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만 하는 생각은 다른 사람에게 직접 전달 되지 않습니다. 그렇기에 그 과보도 겉으로 드러난 행 보다는 적다고 말할 수 있겠죠. 신체적으로 표출된 행위가 타인에게 보다 큰 영향을 끼침은 부정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자이나교의 경우에는 몸과 입과 마음의 행위 가운데서 몸으로 행하는 일을 가장 중요시 여깁니다. 자기도 모르는 새 밟혀죽을지도 모르는 작은 벌레들을 치우려 빗자루로 앞을 쓸며 다닌 그들의 행동이 한편으론 이해가 됩니다.

불교역시 ‘살생을 멀리한다’ 는 항목으로 시작되는 5계의 내용과 순서에서 살 펴볼 수 있듯이 신체 적인 행위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습니 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가 신체적인 행위를 가장 중요하게 여기거나 근본으로 생각하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불교는 마음 속 생각을 가장 근본적인 것으로 여기며, 따라서 중시 합니다. 결과보다는 ‘의도’ 를 중시한다는 말입니다.

「고의로 행한 일은 반드시 그 갚음을 받나니, 혹은 현세에 받고 혹은 후세에 받느니라. 만일 고의로 행한 일이 아니라면 그 과보는 없다」라는 중아함경 사경의 표현은 마음 속 ‘의도’ 의 중요성을 알려주는 단적인 구절입니다.

안색 하나 변하지 않고 욕을 하거나 주먹을 뻗어내지 않아도 일단 그 마음속에 화가 일어났다면, ‘화를 낸’ 것이 분명합니다. ‘간음하려는 생각만 해도 간음한 것’ 이라는 기독교 성경의 입장과 같다고나 할까요?

그렇게 화를 냈다면 그 화낸 행위에 대한 과보도  을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신통이 제일이라던 목련존자도 단지 마음속으로만 일으켰던 화의 과보를 어찌하지 못하였습니다.

‘말이 씨가 된다’는 속담은 불충분합니다. 생각이 씨가 되는 것입니다.

억울한 테러를 당한 사람의 마음속에 일어나는 분노의 심정을 이렇게 잘 묘사할 수가 있을까? 인생의 행로 를 바꾸어서라도, 설사 그 때문에 자신이 더 힘들어지는 결과를 초래한다 할지라도, 목석이 아닌 바에야 그와 같은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일을 당하여 복수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사라나의 결연한 태도에 고개를 끄덕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가전연 존자는 그런 인지상정의 마음에 제동 을 걸고 있습니다. ‘원한은 원한으로써 그치지 않는다’ 는 통찰을 갖추고 있는 까닭입니다.

하지만 가전연 존자는 이곳에서 보다 완벽한 복수의 방법을 알려주는 듯 합니다. 상대방에게 자신이 겪은 것보다 훨씬 큰 고통을 겪게 하면서도 자기에게는 전혀 피해가 없는, ‘완전복수’의 길을 말입니다.

그것은 그를 ‘그냥 놔두는 것’입니다. 그냥 놔둔다는 표현을 받아들일 수 없다면, ‘세월’이란 이름의, ‘무상’이란 이름의 하수인으로 하여금 그를 죽이게 한 다고해도 좋습니다. 어떤 사람이 정말 미워서 죽이고 싶은 생각까지 든다면, 제 손으로 그런 험한 일을 하여 창살에 갇히기보다는, ‘세월’에게 시키자. ‘세월’은 충 실한 나의 종복이라. 자신이 맡은 임무를 어김없이 실 행합니다. 내가 이 세상에서 사라진다고 해도 나를 위 해 자신의 임무를 완수하는 하수인인 것입니다.

아무리 미워도, 그 역시 끝내는 아무 것도 남기지 못 한 채 사라져버릴 가여운 존재, 구태여 내가 나설 필요가 있겠습니까. ‘지독히 화가 날 때는 인생이 얼마나 허무한 것인지를 생각하라.’ 아리스토텔레스가 남긴 금언 입니다.

외도들이 사는 곳에 대해서도 부처님은 이렇게 말씀한 적이 없습니 다. 어리석은 제자나 심지어 게으른 제자에 대해서도 이렇게 말씀하신 적은 없습니다.

,모든 존재에 대 하여 한없는 사랑 으로 대하는 분, 사 람들이 당신의 뜻에 어긋난 모습을 보이더라도 오히려 그들을 연민하는 분으로 믿어지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그런 부처님도, 화합하지 못하고 서로 화내어 싸우는 제자들에 대해서는 깊은 회의에 잠기셨던 것 같습니다.

부처님은 항상 이 세상에 머물고 계시지만, 서로 싸 우는 제자들은 부처님을 떠나게 합니다. 부처님을 쫓아 내고 불법을 소멸케 하는 것은 외토가 아니라, 인욕하 여 화합하지 못하고 싸움을 멈추지 않는 이름뿐인 불자 들임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코삼비 비구들을 떠나 파치나방사숲에 이른 부처님은 그 곳에서 ‘자기의 마음을 버리고’ 사이 좋게 정진하는 아니룻다 등 세 명의 제자들을 보시고서야 비로소 흡족  하며 법을 설하십니다. 비록 세 명이라는 적은 숫자 이고, 또 법에도 모자란 부분이 있는 미완성의 제자들이 었지만, 그들이야말로 부처님의 뜻에 맞는, 부처님을 머물게 하고 말씀하시게 하는 진정한 불자였던 것입니다.

‘흔들리지 않는 마음’에 항상 머무른다는 것이 결코 목석 같은 마음의 소유자라는 뜻은 아닐 것입니다. 오히려 기뻐할 때 기뻐하고, 화낼 때 화내어 후회하지 않는 마음을 지닌 분이 부처님이라면, 크게 잘못된 이해일까요?

부처님에 대한 환상이나 고정관념에서 벗어나 볼 필요가 있지는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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