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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2세에 간도 땅에서 생존 위한 고난을 겪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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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69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4-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연재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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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4-07 14:10 조회 2,0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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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종조 원정대성사 일대기 (6회)

나이 12세에 간도 땅에서 생존 위한 고난을 겪다

독립군들과 함께 과묵하면서도 진중한 성품으로 자라
구속자 90여 명 중 부친 손기현은 세 번째 주요 인물


이때 대성사의 나이는 12세로, 망명길의 고초와 간도 땅에서 생존을 위해 겪어야 했던 숱한 고난을 경험한 덕에 과묵하면서도 진중한 성품을 키우고 있었다. 남관의 초가삼간 집은 밤이면 독립군들의 집회장소가 되었다.
어린 대성사의 눈에는 그들이 모두 장군이며 도인으로 보였다. 대성사는 당시의 경험을 종종 주변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곤 했는데, 화령 정사가 들었던 어느 겨울밤의 이야기는 인상 깊다.
부친의 동지인 독립군들이 모이면 넉넉지 않은 살림에도 대성사의 모친은 아끼지 않고 끼니를 내놓았다. 옥수수에 감자, 때로는 조와 수수로 지은 더운밥은 메마른 시절 동지들의 주린 배와 가슴을 데웠다.
하루는 저녁을 먹고 늦은 밤까지 일제를 물리칠 계책과 작전을 짜던 독립군들이 초롱초롱한 눈망울로 지켜보던 대성사에게 심부름을 시켰다.
“얘야, 탁주가 떨어졌으니 주막에 가서 이 주전자에 받아오려무나.”
대성사는 의심 없이 일어나 주전자를 들고 문을 나서려 했다. 수염을 기른 독립군 중 한 사람이 대성사를 불러 세웠다.
“지금 밖이 춥고 밤이 깊었으니 멀리 갈 것 없다.”
그리고 대성사에게 빈 주전자를 들고 있으라 하고는 엽전꾸러미를 그릇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빈 주전자가 묵직해지면서 이내 막걸리가 가득 찼다. 어리둥절한 대성사를 보면서 어른들은 웃음을 터뜨리고, 이내 하던 이야기들을 다시 나누기 시작했다.
대성사의 눈에 독립군들은 모두 도인으로 보였다고 한다. 어른들의 장난이 마치 대성사에게는 요술처럼 보였고, 어린마음에 깊은 인상을 남겼던 것 같다. 이와 같은 환술幻術을 치물置物이라 부른다 하였는데, 대성사는 후일 이런 환술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라고 경계하였다. 마음에 삿된 바람을 세우지 않고 정의롭게 산다는 것이 얼마나 무거운지를 마음속에 새긴 것이다.
독립군들은 총에 대해서도 알려주곤 했다. 대성사 형제는 독립군이 휴대하던 체코제 총과 러시아제 모신나강 소총에 대한 해박한 지식과 실제 작동법을 꿰뚫고 있었다. 독립군이 어린 대성사 형제에게 이들 총의 특징과 다루는 법을 가르쳤다는데, 대성사는 측근들에게 이때의 경험을 상세히 들려주곤 했다.
일제의 극악한 탄압과 살육 속에서도 3.1 운동이 한반도 전역과 만주 일대, 중국과 미주까지 교민이 살고 있던 전 지역에서 독립운동의 불꽃을 태우게 된다. 1919년 겨울 김원봉과 동지들에 의해 의열단이 조직되고 만주 전역에서 무장투쟁에 나서자는 의지가 퍼져갔다. 홍범도 장군이 이끄는 포수단과 독립군은 간도 땅 전역을 종횡무진 할 뿐 아니라 압록강을 넘어 일본군을 습격하는 전과를 올린다. 일제는 눈엣가시인 무장 독립군 세력을 척결하기 위해 밀정들을 풀어 간도 일대 독립운동가들의 행적을 낱낱이 감시했다.
1920년 5월 1일자 독립신문 3면 서간도 소식란에는 이런 기사가 실려 있다.
“환인현 한교공회에 지난 7일 적 경찰 몇 놈과 중국 기마병 몇 놈이 별안간에 달려와서 공회임원과 기타 모두 8명을 체포하여 통화현 왜영사관으로 압송하였다.”
그리고 통화현을 비롯해 서간도 곳곳에서 일본 군경의 체포와 수색, 압수작전이 벌어진 정황이 실려 있다.
1920년 5월 1일 일제의 간도파견원이 내각총리대신과 경시총감, 검사총장, 조선군사령관 등에게 전보로 보고한 만주지방 독립운동가 동향 보고에 따르면, 대성사의 부친 손기현은 유하현 삼원보의 서로군정서 산하 독립단의 지단인 환인현 한교공회의 외교원으로서 주요한 감시대상 인물로 기록돼 있다.
서로군정서는 이상룡을 사령관으로 하는 임시정부의 군사조직이다. 이시영의 신흥무관학교 출신들이 서로군정서의 독립군으로 참여하고 있었는데, 서간도를 비롯한 남만주 일대의 독립운동 세력들이 모두 모여 만든 단체이다. 수천 명이 속한 군사조직으로 평안북도 한만 접경지대에서 일본군과 자주 교전을 벌였다. 압록강 넘어 삼수군의 일본군 주재소, 강계의 삼강주재소와 문옥면사무소 등을 습격해 파괴하였을 뿐 아니라 친일파를 처단하는 전과를 올렸다.
일제의 입장에서는 눈엣가시 같은 존재여서 늘 감시와 토벌의 대상이 됐다. 1920년 6월 독립군 홍범도 장군과 최진동 부대의 1개 소대가 두만강을 건너 함경북도 종성군의 일본군 헌병 국경초소를 습격 격파하고 이어 출동한 일본군 남양 수비대를 만주로 유인하여 봉오동에서 전투를 벌였다. 전투의 결과는 일본군의 참패였다.
대한 독립군이 작전을 벌여 정규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압승을 한 역사적인 성과이다. 이는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의자신감을 높이고 독립전쟁의 불길을 더욱 타오르게 했다. 일제는 그 보복으로 간도의 독립단체를 색출하는 데 혈안이 된다.
1919년 조선총독부는 정치에 관한 범죄 처벌의 건, 일명 제령 제7호를 선포하는데, 오로지 독립운동을 처벌할 목적으로 제정한, 토벌과 처단 목적의 법률이다. 그 조목은 ‘정치의 변혁을 목적으로 하여 다수공동으로 안녕 질서를 방해하거나 방해하고자 하는 자는 10년 이하의 징역 또는 금고에 처한다. 이 영은 제국신민(조선인)에게도 적용한다’는 내용으로 국내외 독립운동 세력을 대상으로 삼고 있다. 일제는 봉오동 전투의 참패 후 이 제령 제7호를 근거로 1920년 10월 철령 주재 보병 제19연대와 공주령 주재 기병 12연대를 출동시켜 서간도 일대의 독립운동가 체포에 나섰다. 당시 만주 일대에서 벌어진 조선인 사냥을 경신참변이라 부른다.
1920년 10월 6일 재 안동 일본 영사관 퉁화 분관 주임 혼다(本田)는 일본 외무대신에게 독립군 체포 보고서를 보냈다. 1919년 3월부터 유하현 삼원보와 환인현 등 각지에 설립된 무장 독립군 세력이 상해 임시정부와 러시아 지역의 세력과 결탁하여 조선에 침투하여 전투를 벌이니 일당을 토벌하고 체포한다는 내용이다. 당시 총 97명의 독립군이 체포되었다. 보고서에는 독립군들이 사들인 총기가 러시아 보병총 90자루, 자동소총 60정, 미제 보병총 16정, 윈체스터 군용총 21자루, 중국제 엽총 160자루, 중국제 단발식 권총 111정, 영국제 보병총 14자루, 자동권총 40정, 러시아제 소총 170정, 러시아제 자동 권총 230정, 영국제 소총 16정, 기관단총 12정, 윈체스터 군용총 32정, 미제 권총 20정, 중국제 권총 49정, 로시아 권총 등으로 나타나 있으며, 이 중 권총과 보병총 수 정과 함께 군복 80벌이 압수됐다. 이로써 당시 서간도독립군의 무장상태가 상당했음을 알 수 있다. 구속자 90여 명 중 손기현은 세 번째 주요 인물로 독립단 외교원으로 식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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