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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가 알아야 할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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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1-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현묵의 세상읽기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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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4 17:13 조회 2,4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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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지도가 알아야 할 교훈

우리 민족사에 있어 조선시대는 대단히 흥미 있고 박진감 넘치는, 좀 심하게 표현해서 한편의 재미있는 대하연속극에 비에 비유할 수 있다. 

물론 겨레의 근원인 단군신화에서부터 시작하여 민족사의 구비구비마다 갖가지 영웅담과 아기자기한 민중의 삶이 거대한 역사를 이루고 있지만 그래도 우리 역사를 읽는 재미는 조선시대에 압축되어 있는 것 같다. 조선왕조실록이라는 대단히 훌륭한 기록이 남아 있어 그 역사적 사실과 사실의 이면에 얽힌 야화 등을 생생하게 읽을 수 있기 때문에 재미는 더하게 된다. 그 재미는 무엇보다 우리의 과거에서 오늘의 교훈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고려왕조를 거꾸러트리고 왕권을 장악한 이성계에 의해 세워진 조선왕조는 초창기부터 피로 얼룩진 역사를 기록하고 있다. 새로운 왕조에 걸맞게 진보적인 정치를 펼치고자 한 인물들은 그 뜻을 제대로 펴지 못하고 이성계의 아들에게 죽임을 당했고 그 아들들 역시 서로 피비린내를 풍겼다. 왕조의 첫 단추가 이렇게 끼어진 탓인지 왕조 500년은 권력을 찬탈하기 위한 권모술수와 당쟁이 한시도 그치지 않았다. 상대방을 기가 막힌 계략으로 무고하여 형장의 이슬로 사라 지게 하였는가 하면 '무고한 자들 역시 나중에는 그 응보를 단단히 받았다. 권력의 야욕에 눈이 어두워 조카를 살해하면서 왕권을 찬탈한 자도 있고 자신의 왕권을 지키기 위해 자식을 뒤주에 가둬 죽인 경우도 있다. 그런 중에도 사육신처럼 지조와 절개로 불의에 맞서 의연히 목숨을 버리는 사이 있는가하면 반대로 교언영색과 절묘한 처세술로 몇 대의 임금을 모신 자들도 수두룩하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왕조사는 재미가 있다. 그런데 조선 13대 왕인 명종조에 이르면 그 재미는 처절하기 그지없는 지경에 이른다. 선왕인 인종은 명종의 어머니이자 자신의 계모인 문정왕후의 등살에 못이겨 훌륭한 성품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왕정을 펴보지도 못한 채 즉위한지 불과 8개월만에 세상을 뜨고 말았다. 명종은 나이 12살에 왕에 오르니 세상은 온통 속성이 윤씨인 문정왕후와 그 친정동기, 윤원형과 그 일파들에 의해 좌지우지된다. 나이 어린 아들의 뒤에서 나라의 정치를 도맡아 처리하는, 이른바 수렴청정을 하는 문정왕후와 윤씨 집안은 또 같은 윤씨끼리도 파를 나누어 서로 음해하고 제거 하여 우리 역사에 있어 찾아보기 힘들 정도의 일대 살육극을 벌였다. 나라꼴이 이쯤 되고 보면 민중의 생활이 어떠리라는 것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요즘 한창 인기를 끌고 있는 아무개 방송사의 연속사극 ‘여인천하’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적당히 각색한 것이다.

좌우지간 위에서는 권력욕에 가득 찬 권세가들이 피비린내 나는 당쟁을 벌이고 이런 와중에 권력을 잡은자의 비위를 맞추기 급급한 귀족들은 상부에 바치기 위한 뇌물을 마련하느라 백성의 고혈을 더욱 잔인하게 수탈하였다. 지방의 말단 관직까지 뇌물에 의해 거래되었고 그런 식으로 부임한 자들은 갖가지 명목으로 가렴주구를 가혹하게 하였다. 양반의 착취와 수탈에 못 이겨 정든 고향을 뒤로 한 채 유랑하는 백성은 날로 늘었으며 혹자는 아예 양반에게 자신의 농토를 바치고 노비가 되기를 자처하 였다. 그런 상황에서 도적이 늘지 않는 것은 정상이 아닐 것이다. 유랑민 가운데 많은 수는 산 속에 숨어살며 도적질로 연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 유명한 임꺽정 역시 이 시대 사람으로서 추악한 정치에 의 해 희생되는 민중의 분노가 어떻게 드러나는가를 여실히 보여준다.

민중의 절대적인 지지와 협조로 왕조의 근간을 위협하던 임꺽정은 변절하기를 밥먹듯 하는 양반출 신 부하의 모사와 관군의 대대적인 토포에 의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명종 17년, 서기 1562년의 일이다. 도적의 무리가 왕조의 존립을 위협하는 근본 원인에 대해 궁리하고 개선하기는커녕 왕조는 더욱 부정과 부패가 격심하였으니 나라와 민족의 운명은 안전할 수 없다. 그렇지 않아도 호시탐탐 조선의 침 을 꿈꾸며 간간이 남도지방을 노략질하던 왜적은 1592년 전면적 인 침략을 감 행한다. 임진 왜란이다. 4월 에 부산을 침공한 왜구는 불과 이십여 일만에 서울을 함락하고 평양과 함경 도까지 이르렀다. 강토가 왜구에 이처럼 쉽게 유린되고 백성과 부녀자가 왜 에게 도륙되든가 능욕을 당하게 된 이유는 명료 하다. 권세가와 양반의 가혹한 수탈과 착취를 견디 지 못한 백성들이 모두 유랑민으로 되었기 때문이다. 즉 군대를 조직할 인원이 없다는 것이다. 지배 계급은 자신의 부귀를 위해 민중의 생산물과 노 을 착취할 줄만 알지 그들의 힘이' 곧 국가의 안전 이라는 점은 간과하기 마련이다. 자신들로 인해 백 성이 먹고산다고 착각하고 있다. 예나 지금이나 지배계급은 세상을 저희들 멋대로 아는 체 할 뿐이다. 국가권력을 장악한 힘으로 민중의 고혈을 짜내기에 급급한 자들이 민족의 절대절명 위기를 맞아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왜적이 쳐들어오자 왕조와 양반들 은 도망가기 바빴다. 제나라 민중에게 몹쓸 짓을 하였으니 믿을 것은 남의 나라 군대였을 것이다. 중국의 힘을 빌어 왜적을 물리치고자 했으나 정작 조선 땅에서 왜적을 막고 싸워 마침내 조국강토를 다시 찾은 군대는 민중이 스스로 조직한 의병이었다. 

못난 권력자들이 만든 비극을 이겨낸 장하디 장한 조선의 민중이다. 그러나 그후에도 당쟁은 그치지 않았고 또한 백성에 대한 수탈의 강도도 줄지 않았다. 역사는 어제와 오늘의 대화라고 했다. 조선왕조의 참담한 역사는 단순히 지난 사실이 아니다.

그 속에서 오늘에 주는 교훈을 찾아야 한다. 이른바 국민의 정부라 자칭하는 현 정부가 앞서 문민정부나 그 이전의 정권, 또한 우리의 어제가 주는 교훈을 제대로 인식하고 참으로 역사를 바로 세우려 고했다면 그의 임기가 끝나고 있는 시점에서 이토록 나라꼴이 엉망으로 전락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한 사람의 정치지도자가 올바른 역사인식 없이 권 력을 잡은 결과 민족의 운명 전체가 격랑에 시달려 야 한다는 것은 굳이 조선왕조로 거슬러 올라갈 필 요조차 없다. 해방 이후의 한국 정치사가 그러했으니까.

공교롭게 김영삼, 김대중씨의 실정이 주는 폐해는 그저 정치 경제의 정도가 아니다. 그들의 실정은 새삼 거론하지 않아도 국민 모두가 이미 피부로 느끼고 있다. 문제는 양김씨가 국민에게 ‘민주화’에 대 한 실망을 안겼다는 점이다. 이들 이전 정권시절에 는 ‘민주화’ 에 대한 열망과 또한 ‘민주화운동’ 을 한 사람들에 대한 호의가 국민들 사이에 지배적이었다. 그런데 정작 민주적인 절차에 따라 들어선 정부, 그 것도 민주화운동 경력이 충분한 사람이 집권한 '민주적 정부’ 가 과거의 ‘비민주적 정부’ 보다 더 부패 하고 부정하며 무능력한 꼴을 보인 결과 국민의 정서가 ‘민주화’보다 ‘독재’에 대한 선호감을 갖게 하였다. 박정희’에 대한 향수나 혹은 박정희를 닮은 정치 지도자를 그리워하는 것이 그런 정서에서 나온 반발일 것이다. 이보다 더한 폐해가 있을 수 있나. 

문정왕후의 권세를 업고 부패한 정치를 했던 명종 때의 일이 과거 역사에 그치지 않고 있는 것이 .

올 연말에는 또다시 새로운 정치지도자를 국민의 손으로 선택해야 한다. 정치한다는 사람들이 갖춰야 할 기본 소양은 아무래도 역사인식인 것 같다. 대통령을 잘못 뽑은 사람들을 탓할 것이 아니라 누구보다 그 자리에 오르고자 하는 사람 스스로 자신들을 곱씹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런 바탕 위에서 나라 살림을 책임지려고 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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