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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불교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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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0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1-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그림속의 불교 이야기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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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4 09:40 조회 2,4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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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속의 불교 이야기
화로를 머리에 이고(해인사 벽화에 비천 혜통선사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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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낙엽이 하나 둘 떨어지기 시작할 무렵 가야산 해인사 올라가는 길은 정말 환상이였다.

도시의 탁한 공기가 아니 쉬원하고 맑은 산소를 느끼며 일주문 으로향하니 ‘가야산제일문’이라...

해인사 하면 법보 종찰로서 세계문화유산이 기도한 팔만대장경이 보관되어있는 곳이며 불보사찰 통도사. 승보사찰 송광사와 ‘더불어 한국의 삼대 사찰로 꼽힌다. 또한 화엄십찰의 하나로 세워진 가람이다. 대적광전에 법신 비로자나 부처님을 모셔놓았고 자세히 본 불자들은 알겠지만 결인이 대일여래 지권인이 아니라 준제결인을 하고 있어 흔하게 친견하는 것은 아니리라. 일반적으로 사찰 본당 건물 외벽에 불화그림들을 팔상도를 제일 많이들 그리고 있다. 해인사 팔상도는 화폭에 담아 대적광전내에 보관하고 있고 벽화는 선사들의 이야기로 장엄을 해놓고 있다. 그중 이글이글 타오르는 불화로를 머리에 이고 있는 벽화가 눈길을 끈다. 혜통 선사의 이야기라 한다. 승려 혜통은 신라사람으로 그 조상을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스님이 되기 전에 그는 남산 서쪽 기슭 은천동 어귀에 살고 있었다. 하루는 집 동쪽 시내에서 놀다가 수달 한 마리를 잡아 죽이고 그 뼈를 동산에 버렸다.

그런데 이튼날 새벽에 그 뼈가 없어졌으므로 핏자국을 따라 찾아가 보니 뼈가 예전에 살던 구멍으로 되돌아가 새끼 다섯 마리를 끌어안고 있었다. 혜통은 그것을 보고 한 참 동안 놀라워하고 넋을 잃고 바라보던 그는 미물이라 여겼던 짐승도 죽어서까지 자기 자식을 잊지 못하는 고귀한 생명을 깨닫고 살생이 얼마나 큰 죄인지를 깊이 생각하게 되었다. 그때 부터 그는 모든 살아 있는 생명들의 존엄성을 깨달아서 이제까지 알게 모르게 살생한 뭇 생명들의 명복을 빌었다. 그리고는 참된 진리의 길을 찾아 출가하여 이름을 혜통이라 했다.

혜통이 당나라로 가서 진언종의 무외삼장을 찾아가 뵙고 가르침을 청했더니 삼장이 말했다.

“어디에서 이렇게 나를찾아왔느니?”

“오직 불법의 진리를 구하기 위하여 멀리 신라 땅에서 왔습니다.”

“그렇다면 바다 동쪽 변방 오랑캐가 아니냐? 어찌 불법을 담을 그릇이 될 수 있겠는가?”

“사람이 사는 지방이야 동서남북이 있다 하겠지만, 법을 구하는 마음에는 어찌 차별이 있을 수 있겠읍니까?”

“말이 많구나, 돌아가거라”

이렇게 말하고 나서 무외삼장은 더 이상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혜통은 이것을 자신의 근기와 신심을 시험하는 것이라고 생각하여 무외삼장의 문하에서 구박을 받으면서도 꾸준하게 수행을 계속 하였다.

삼년이 지난 어느날 혜통이 다시 가르침을 청하였으나 삼장스님의 태도는 여전히 냉담할 뿐이었다. 혜통은 심법을 이어받지 못할바에야 차라리 죽기로 작정을 하였다.

그는 불이 이글거리며 타오르는 화로를 머리에이고 ‘법을 구하는 자는 신명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는 옛사람의 가르침을 생각하면서 무외삼장의 앞으로 나아갔으나 곧 화로불의 뜨거움으로 말미 암아 머리가 터지면서 쓰러지고 말았다. 이 모습을 지켜보던 무외 삼장이 쓰러진 혜통에게 다가와 불이 담긴 화로를 치우고 손으로 터진 곳을 매만지며 주문을 외자 터진 자리가 아물면서 소생하였다. 그 뒤로부터 화롯불로 생긴 혜통의 머리 흉터 모양이 왕자 와 비슷하다고 하여 사람들은 혜통을 ‘왕스님’ 이라 불렀다.

혜통은 이렇게 하여 무외삼장의 심법을 전해받게 되었다.

당나라 황실에서 공주가 병이 났다. 그래서 고종이 삼장에게 치료해 주기를 청했더니 삼장은 자기 대신 혜통을 천거했다. 혜통이 명령을 받고 따로 거처하며 흰콩 한말을 은 그릇 속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그것이 변해서 흰 갑옷을 입은 신병이 되어 병마를 쫓았으나 이기지 못했다. 다시 검은콩 한 말을 금 그릇에 넣고 주문을 외우니 그것이 변하여 검은 갑옷을 입은 신병이 되었다. 두 색의 신병을 합하여 병마를 쫓으니 갑자기 교룡이 달아나고 병이 나았다. 교룡은 혜통이 자기를 쫓아낸 것을 원망하여 신라의 문잉림으로 가서 인명을 너무 심하게 해쳤다. 그때 정공이 사신으로 당나라에가 혜통을 보고 말했다

“스님이 내쫓은 독룡이 본국에 와서 심한 해를 끼치니 속히 가서 그것을 없애주십시오”

혜통은 인덕 2년 을축년(665년)에 고국인 신라로 돌아와 용을 쫓아버렸다.

그는 신라 진언종의 초대 조사가 되었고 불법을 널리 폈으며 신통력 또한 뛰어나 가뭄에 비를 내리게 하는 기적을 보이기도 했다.

신문왕이 등창으로 몹시 괴로움을 겪던 끝에 혜통 스님에게 와서 치료하여 줄 것을 청하였다. 스님은 주문을 읊어 단번에 씻은듯이 낳게 하였다.

“폐하께서는 전생에 재상으로 있을 때 억울하게 양민 신충을 잘못 판결하여 종으로 삼은 일이 있읍니다. 신충의 원한으로 윤회환 생할 때마다 보복을 받는 것입니다. 철을 세워서 그의 명복을 빌고 원한을 풀어야 할 것입니다.”

혜통이 이렇게 말하자 왕은 곧 절을 세우라고 명하였다. 절이 낙성되자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왕께서 '절을'세워''주셨으며 괴로움으로부터 ’벗어나‘’하늘에 태어날 수 있게 되었으니 원망은 이미 풀렸습니다”

또한, 신문왕이 세상을 떠나고 효소왕이 왕위에 오르자 간신들의 중상묘략에 의해 갑옷 입은 병사를 시켜 혜통을 잡아들이도록 하였다

혜통이 왕망사에 있다가 갑옷 입은 병사가 오는 것을 보고 지붕에 올라가 사기병과 붉은 먹을 묻힌 붓을 가지고 그들에게 외쳤다.

“내가 하는 것을 보아라” 곧 사기병 목에 줄 하나를 그으면서 말 했다. “너희들 각자의 목을 보아라” 그들이 목을 보니 모두 붉은 줄이 그어져 있었으므로 혼비백산하여 달아났다.

이같은 선사의 이야기는 삼국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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