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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불화와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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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1-12-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종교포럼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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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0 20:24 조회 2,83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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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간의 불화와 조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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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찬수 (종교학, 강남대 교양학부)

이 자료는 지난 11월 28일 동산반야회 대법당에서 열린 불교포럼 자료집중 이찬수 교스님의 발제문을 요약한 것입니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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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어떤 대상을 인식할 때 그 인식의 대상이 먼저 거기에 자명하게 있기에 그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인식 주체에 의해 그렇게 인식되기에 그 대상이 존재하게 되는 것이라는 식으로, 주체의 관점에서 세계를 보게된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낀 만큼만 실재라는 뜻이 된다. 그리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끼는 행위는 저마다의 환경에 따라 다르므로 실재도 다양하다는 뜻이 된다. 같은 말을 듣고도 그에 대한 반응은 다양하다. 반응이 다양하다면, 사실상 그렇게 경험하는 이들 입장에서는 그것은 같은 말이 아니라, 서로 다른 말이 된다. 다양한 경험만이 있을 뿐인 것이다.

이 다양한 실재들이 조화를 이루고 있는 것이 자연의 세계이다. 그러나 그것이 전형적으로, 그것도 아주 부정적 내지는 파괴적인 차원에서 적용되는 곳이 있는데 바로 일반적인 의미의 종교 세계이다.

종교들의 불화는 왜 생기는가? 기본적 으로는 인간의 경험이 다양한데에 그 근본 원인이 있다. 그러나 좀 더 직접적이고 구체적인 원인은 이러한 다양성을 용납하지 못한 채 자신의 경험을 잣대로 남을 함부로 판단하는 데에 있다.

그러나 정말로 경험이 다양하고, 그렇 게 경험한 만큼 그 경험적 실재가 내 앞에 그 실재로 현전하는 것이라면, 그 경험을 넘어서는 궁극적 실재에 대해 말하 는 것이 과연 얼마나 큰 의미를 지닐 수 있겠나 하는 의문도 생긴다. 불자가 생각 하는 궁극적 실재와 그리스도인이 생각 하는 궁극적 실재가 다르다. ‘궁극적 실재’이라고 생각되고 말해지는 그 순간 그것은 이미 ‘다양한 응답’의 범주 안에 있는 것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종교에서는 보편성을 주장한다. 불교든 그리스도 교든, 어떤 종교든 자기에게만 해당하는 좁은 진리를 말하는 곳은 없다. ,

그런데 너무나도 분명한 것은 바로 모든 종교들에서 그렇게 주장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모두가 자기중심적으로만 보편 성을 주장하는 까닭에, 보편성이라는 이름 하에 특수성간의 대립만 낳는 꼴이다. 너도나도 거창한 말들을 하는 바람에, 실제로 그 거창함이 실현된 적은 없으며, 도리어 그 거창한 진리와는 어울리지 않게 “끼리끼리 놀기만 하는” 가장 속좁은 곳이 되어버리고 만 것이다.

현실적 종교들의 세계에서는 보편성은 커녕 자기 중심적 특수성만 판을 친다. 종교라는 이름으로 불교적 우주관을 떠올리고, 종교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교적 종말론을 떠올리는 등 대부분 자기식의 종교관을 연상할 뿐이다.

이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저마다 자신의 종교 안에서 최상의 모습을 보고, 자기의 세계관을 기초로 듣고 이해할 수밖에 없도록 틀지어져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이 정당하다는 뜻은 아니다. 종교들의 세계는 깊고 넓지만, 유한한 인간적 실천으로 나타나는 것인 한, 언제나 더 나은 가능성에 개방되어 있어  한다. 내가 참 종교적이라고 판단한 것이 저쪽에도 다른 모습으로 있다는 적극적이고 폭넓은 자세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지상에 불교, 그리스도교, 이 슬람교 등으로 불리는 다양한 “종교들” 이 있다며 자연스럽게 말한다. 기본적으로 종교라는 것을 하나, 둘, 셋셀 수 있는 상호 독립적인 집단들로 간주한다.

이렇게 보면 그리스도인이면서 동시에 불교적 요소를 갖거나 불자이면서 동시  그리스도교적 요소를 갖는다는 것은 애당초 불가능해진다. 이렇게 종교라는 것을 그 외적 차별성에 따라 상호 대립적으로 생각하다 보니 필연적으로 이런 물음들이 생겨난다: “과연 어느 종교가 참된/최상의 가르침일까? 과연 종교적 진리는 하나인가 여럿인가?” 이러한 물음들 앞에 사람들은 흔히 내 종교와 네 종교를 분리- 비교하고서, “다른 종교들은 오류!”라는 식의 배타적 태도를 보이 거나 그보다 이해심이 조금 많은 사람들은 “타종교들도 어느 정도는 옳지만 역시 내가 최고!” 하는 식의 자기우월적 포용성을 보이기도 한다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이러한 현상은 서로 다른 종교들 사이에서만 벌어지는 일이 아니다.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종  벌어진다. 가령 가톨릭과 개신교는 같은 그리스도교 전통이라면서도, 한편에서는 서로 자기 종파 중심적으로 행동하고 마는 것도 같은 이유이다.

개신교의 종파 안으로 가도 또 마찬가 지이다. 이런 입장은 작게는 의견대립 정도로 나타나지만, 크게는 나와 너, 흑 과 백, 선과 악 등을 지나치게 대립적으로 분리시키면서 거창한 문명간의 충돌 까지 이어지게 만든다.

이러한 태도들은 서로가 서로에게 들어갈 수 없는, 상호 대립적인 전제 위에 서있기 때문이다. 이것은 물의 세계를 알지 못하는 파리가 어항 유리에 붙어 유영하는 금붕어를 구경하듯이, 그저 비참여적인 관찰자의 시각에서 상대 종교를 “물상화”하고 차별적인 모습만 보아온 탓이다.

그러나 그 차별적인 외견만으로 이른바 종교라는 것을 다 설명할 수 있을까? 자세히 살펴보면, 종교적 현상들은 불교, 그리스도교 등의 이름으로 별도 분리되기에는 너무나 다양하고 끝없이 변화하며 쉬지 않고 생성된다. 종교를 어떤 구체적인 본질로 규정하기에는 내적으로나 외적으로 무한하리만치 다양하고 풍부하다.

그렇다면 종교라는 것을 과연 어떻게 보아야 할까? 이런 물음 앞에서 종교사 학자 스미스의 입장은 암시하는 바가 크다. 그는 이러한 상황을 진지하게 성찰하고서, 종교들을 ‘명사’로서가 아닌, 형용사적’으로 보자는 신선한 제안을 한다. ‘불교’ , ‘그리스도교’ , ‘이슬람교’와 같은 명사적 표현보다는 ‘불교적’, ‘그리스도적’, ‘이슬람적’ 등의 형용사적 표현을 중시하자는 것이다. 비참여적 관찰자에게만 보일 법한 외적 차별성보다는 그 종교 안에 참여하고 있는 종교인의 내적 마음, 생동하는 삶을 더 중시하자는 것이다.

종교를 사물화시켜 놓고 보면 그저 ‘사물’로서만 보일 뿐, 종교의 역동성, 그 종교적 삶을 살아가는 사람의 내적 바탕은 눈에 들어오지 않게 된다. 이것을 보지 못하는 한, 종교의 핵심을 놓치는 것이며, 그러한 사람의 판단 역시 핵심에서 빗겨간 것이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생성되는 종교의 내적 측면, 즉 ‘종교적’ 가치에 중점을 둘 때, 자기우월적이고 배타적인 태도에서 벗어나 타자에게서도 이상적인 가치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리 게 된다. 그만큼 대립을 넘어 타자를 존 중할 수 있게 된다.

구체적 문자에, 제한적 경험에 사로잡힌 근본주의를 꿰뚫고 정말 그 근본으로 도달할 때, 종교간의 갈등과 불화는 평화와 조화로 전환한다. 서로가 서로에게서 배울 때, 아니 내가 너에 대해 배우는 것을 넘어, 내가 너에 대해 배우는 열린 자세로 너로 하여금 나를 배우도록 참으로 도와줄 때가 종교가 가장 생생하게 살아 날 때인 것이다. 그것이 불교를 불교되게, 그리스도교, 이슬람을 그리스도교, 이슬람되게 해주는 자리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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