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컨대, 여래의 진실한 뜻 알고자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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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2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3-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지상설법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대현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불교총지종 법장원 수석연구원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5 07:28 조회 2,667회본문
오래된 고찰이나 새로 잘 지은 절을 보면 아주 기분이 좋다. 불자 로서 흐뭇하고, 또한 이렇게 좋은 곳에 절이 서있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가 않다. 점잖은 종교인 불교의 전당이 여기에 이렇게 자리하고 있기에 망정이지 극성스런 다른 종교의 예배처가 여기에, 그것도 서구의 건물 양식으로 이 강산의 명당에 꽉 들어차 있다면 어찌 되었을까 하고 생각하면 아찔해지기까지 한다. 이 점에 대해서는 조상님들께 아무리 감사해도 지나치지 않을 것이다.
한편, 절의 건물들을 보며 부처님을 생각해본다. 우리 중생들은 과연 부처님의 진실한 뜻을 알고자 하여 저러한 신심을 내었던 것인가? 아니면 세속의 부귀나 극락의 과보를 바라고서 거래의 심정으로 돈을 내어놓았 던 것인가? 아무래도 후자 쪽이 훨씬 강할 것만 같다.
중생들은 돈을 목숨처럼 귀하게 생각하 만 자기 생각에 돈보다 낫다고 생각되는 것에는 흔쾌히 돈을 쓴다. 극락이나 천당에 간다거나 부귀나 건강 등 내어놓는 돈의 양보다 큰 것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되면 거래를 하는 것이다.
물론, 중생들의 가슴 가슴마다에는 나름대로의 아픔이 있다. 그것은 괴로운 것 이며 그래서 세속적인 괴로움들을 어느 정도나마 잊게 해주는 부귀와 건강은 참으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정작 부처님께서는 왕를 포기하고 왕궁을 떠나 세속적인 부귀를 버렸으며, 성불 후에도 다시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신 적이 없었다.
인간이 재산이나 벼슬이나 명예가 없이도 행복할 수 있다는 것을 몸소 보여주셨으며, 오히려 거기에 진정한 행복이 있다고 말씀하셨던 것이다. 바로 이 점이 그 분의 진면목이며 불교의 위대성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부귀를 버린 분에게 부귀를 달라고 매어 달린다. 중생들이 추구하는 행복은 부귀이며, 그 것은 오욕락을 크게 만족시키기 위한 것이다.
오욕락을 버린 분에게 오욕락을 충족시켜 달라고 목을 매어 달고 있으니, 거꾸로 가도 한참을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이다. 대부분의 종교인들 마저 그것을 추구하고, 기도다 무어다 해서 신도나 신자들의 오욕락에 불붙이기 대회를 하고 있으니, 도대체 우리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 인가?
중국 양나라의 무제가 달마대사를 만나자 먼저 “짐은 많은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했으며, 경전을 간행하고 승려들을 권장했으니, 그 공덕이 얼마나 되겠오?”하고 물었다. 그러자 달마대사는 뜻밖에도 “공덕이 없습니다.”라고 대답했다. 양무제는 현세적인 이익에 크게 관심이 있었으므로 달마대사의 이 대답의 의미를 이해하지 못했다.
사실, 사찰을 건립하고 불상을 조성하는 그 자체가 바로 공덕이므로, 그 외의 다른 댓가를 바라는 것은 잘못이며 나마의 공덕마져 없애버리는 안타까운 거래의 심보이다. 공덕을 쌓는 행위 자체가 이미 그 자신으로 하여금 청정한 마음을 가지게 한 것이므로 더 이상의 과보를 기대해서는 안 된다. 불교는 수행을 통해 청정심을 일으켜 오락욕을 끊어 가는 길이다.
그러므로 베푸는 것도 무주상의 보시여야지 그렇지 않으면 보시를 하고도 고통의 길로 역행하게 되는 것이다. 순수하고도 깨끗한 마음으로 어떠한 댓가도 바라지 않고서 하는 보시나 기도는 그대로 불교의 수행이며, 불·보살로 가는 길이 되는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사주나 관상같은 것을 보는 것을 매우 경계하셨는데, 그 이유는 그것들이 재물이나 사회적 지위 곧 재관을 위주로 하여 인간의 행· 불행을 판단하기 때문이다. 부처님께서는 그러한 것들을 버리고서 참다운 행복의 길을 찾으셨기 때문에, 또한 그것들은 지독한 집착을 불러일으키기 때문에 그러한 삶의 자세를 바람직한 것으로 보지 않았다.
오히려 수행의 길에 있어서는 그것들이 장애가 될 뿐이며, 우리는 재관 위주의 삶이 인간을 얼마나 추하게 하는가를 텔레비전이나 신문이나 방송을 통해 하루도 접하지 않는 날이 없다. 특히 출가수행자 가 그러한 것들을 추구하다가 부모형제를 떠난 출가의 의미를 수포로 돌려버리는 경우까지도 더러 보게되는 것이다.
그러면, 부처님의 진실한 뜻은 무엇인가? 또한 달마가 동쪽으로 간 까닭은 무엇인가? 제행은 무상하고 제법은 무아이기 때문에 무상하고 무아인 것에 집착하게되면, 우리에게 일체는 모두 고뇌의 것으로 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러한 고뇌는 업과 번뇌에 인연하기 때문에 고뇌로부터 벗어나기 위해서는 업과 번뇌를 지워나가는 길 곧 수행하는 수 밖에 달리 도리가 없다.
번뇌와 업을 지워가는 힘이 반야이며, 반야를 증장시키기 위해서는 현상의 실상을 놓치지 않고 바로 보는 작업이 반드시 필요하다. 반야는 혜 인데, 혜에는 문혜,사혜,수혜의 삼혜가 있으며, 수혜는 문혜와 사혜가 전제되지 않고서는 불가능 하다.
교학은 수혜의 길을 표시하는 지도이며, 문혜, 사혜와 밀접불가분의 관계에 있다. 물론 이 경우의 교학은 불교용어의 나열이 아닌 제대로 된 교학을 말하는 것이며, 현재 우리나라 불교계에서 가장 필요하며 가장 취약한 부분이다. 그러므로 문혜와 사혜도 수행임을 알아야 한다.
곧 문· 사 ·수의 삼혜가 수행인데, 이와 같은 수행은 철두철미하게 자신의 문제이며 실천의 문제이다. 여기에서, 바로 이러한 의미에서 언어와 문자가 부정되는 것이며, 불립문자가 교 의 무식을 말하는 것은 아닌 이다.
올바로 알고 있어야 제대로 실천할 수 가 있다. 결국 불교는 문이든 사이든 수이든 자기 자신의 실천의 문제로 귀결되는데, 이 국면을 옛 선사들은 그들의 제자가 ‘부처님이 이 세상에 몸을 나툰 의미’나 ‘달마대사가 서쪽에서 온 까닭’ 을 물었을 때, 서강의 물을 다 마시고 오면 답을 일러 주겠다거나, 혹은 방이나 할을 하거나 기상천외한 대답으로 표현했던 것이다.
이제 우리들은 세속적인 부귀만을 부처님께 빌 것이 아니라, 질을 조금 높여 참된 불교의 교학을 통해 부처님 의 진실한 뜻을 바르게 이해하고 바로 그 것을 실천하는 쪽으로 불교를 신행해가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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