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50만 명의 신용불량자와 250만 마리의 애완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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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4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5-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현묵의 세상읽기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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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6 06:46 조회 2,467회본문
돌이켜보면 내가 그 근중 많은량의 책을, 또 참으로 진지한 고민을 하면서 독서를 한 시절은 긴 수형생활 동안 이었다. 1평반 남짓되는 방에 사육되는 가축처럼 갇혀 있으면서 할 수 있는 일이란 극히 제한되 어 있었다 그것도 홀로있어야 했기에 독서는 나와 세상을 잇는 다리이자 나를 담금질하는 양식이었다. 창살에 손이 쩍 달라 붙을 정도로 혹독한 추위에서 나를 지탱하려면 제 자리뛰기로 몸을 달궈야 했고 독서로 의식을 바로 세워야 했다. 그런 겨울을 다섯 번이나 넘겼다. 한계에 이른 조건에 있다보니 보다 진지한 고민으로 책을 접하였을 것이다. 어줍잖게 건방을 떤다면 감옥이 나를 찾아준 셈이다.
우리 동양의 고전을 마음껏 읽은 때도 그 때였다. 남이 번역한 고전이지만 내 나름으로는 원문을 함께 대비하고 옥편까지 뒤적이며 정독하였다. 마침 집사람이 중문학을 전공한 것도 큰 도움이 되었다. 내가 불제자라는 점도 가중치로 작용하였을게다. 그런데 서양의 사회과학 서적에서보다 동양의 고전, 정확히 말해 중국의 해묵은 고전을 읽으면서 오히려 사람과 사회의 관계에 있어 무엇이 의로움인가를 두고두고 새길 수 있었다.
감옥에서 나온 후 어느 잡지에 발표한 바 있는 [식인사회의 처절함]이란 제목으로 쓴 글에서 인용 하였던 맹자의 말씀도 그 때 깊은 감명 을 받아 기억 하고 있던 한 구절이었다.
다시 그 대목을 인용하면 이러하다.
맹자가 송나라에 머물고 있으면서 송나라 사람 공도자가 “외부 사람들이 모두 선생더러 말씀을 좋아하신다고 일컬으니, 감히 묻자몹건대 무슨 까닭입 니까?”하였다. 이런 물음에 맹자가 말하기를 “내가 어찌 말을 좋아하리요? 내 마지못해서이다”하시며 천하가 제대로 다스려지지 못하기 때문에 인의를 옳게 세우기 위해 그 가르침을 전하는 말을 할 수 밖에 없다고 얘기한다.
이어 맹자는 공도자에게 “푸줏간에 살진 고기가 있으며, 마굿간에 살진 말이 있거늘, 백성이 주린 빚이 있으며 들에 굶어 죽는 시체가 있으면 이는 짐승을 거느리고 사람을 먹는 것이니라.”라고 단언 하였다. 맹자가 오직 걱정한 바는 간사한 말이 백성을 속이고 인과 의가 막혀 세상이 쇠해지고, 포악한 행실과 살생이 빈번해 질 수밖에 없는 그릇된 정치 풍토였다. 그런 비인간적인 사회는 곧 짐승을 풀어 사람을 잡아먹는 사회와 다름없다고 경고한것이다. 이런 말을 한 때는 맹자의 사십대 후반에 잠깐 송나라에 머물렀다가 그 후 다시 오십대 말과 육십대 초에 송나라에 있었다 하니 지금으로부터 대략 이 천삼백여 년 전의 일이다.
그런데 보고 듣자하니 지금, 2002년 ‘월드컵’을 눈앞에 둔 이 4월 현재, 남한에 신용불량자가 무려 250만명이라 한다. 이네들의 대다수는 은행신용패 (카드)를 쓰면서 물품대금이나 현금차용을 제때에 갚지 못한 사람이란다. 하여 이네들은 자신들의 이름으로 사업, 취업, 은행거래를 하지 못하는 처지에 있다.
이른바 신용시대라고 하는 요즘의 사회에서 이들 은 일탈자로 취급되기 일쑤다. 이들은 자신들에게 들씌워진 ‘불량자’의 허울을 벗기 위해 반사회적 행위도 서슴치 않는다.
‘유흥비를 마련하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라는 변명보다 ‘신용패 사용으로 진빚을 갚기 위해’ 범죄를 저질렀다는 변명이 흔하게 된 마당이다.
말이 250만명이지 이 숫자는 남한의 중소도시 십여개를 합친 시민 전체의 수에 달하는 실로 엄청난 수를 나타낸다. 게다가 이들 가운데에는 이삽십대의 청년들이 반 이상을 차지하고 있다는 점은 심각하다. 그것은 곧 지금 이 땅의 청년들이 건강한 사고와 의식을 갖기보다는 그저 저 혼자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으로 점점 퇴폐적인 수렁에 허덕이게 할 것 이기 때문이다. 물론 ‘불량자’가 된 이들의 잘못이 일차적이지만 그렇다고 허황한 소비를 부채질한 우리 사회의 잘못 또한 간과하여서는 안된다. 어쩌면 맹자가 지적하였듯이 우리 사회는 화려한 소비를 부추기면서 한쪽으로는 사람을 통째로 굶주리게 하고 있으며 마침내 짐승을 풀어 사람을 잡아먹는, 말하자면 우리 사회가 곧 ‘식인사회’가 아닌지 심각 하게 파헤쳐 볼 일이다. 공교롭게도 ‘불량자’의 수와 같은 수이긴 하지만 그 내용은 전혀 다른 최근의 통계가 또 하나 있다.
지금 이 나라의 애완견 수가 최소 250만마리에서 많게는 300만마리라고 한다. 하여 서울의 강남에는 개를 위한 고급여관에서부터 개의 치장을 해주는 갖가지 업소가 성황을 이루고 있단다. 믿기지 않지만 개가 하루 묵는데 숙박비등의 비용이 가난한 사람 에게 정부가 지급하고 있는 한달 생계보조비에 달한다. 뭐라든가? 잘살아서 그런지 혹은 불란서의 어느 늙은 여배우를 사모해서 그런지는 몰라도 기르던 애완견의 장례도 고관 대작 부럽지 않게 치루어 준다고 한다. 이런 되먹지 못한 문화가 어느새 부자들의 호사에서 점차 일반 인에게까지 퍼지고 있다. 자식들이 돌보지 않아 홀로 사는 노인분이 늘고 있는 이 사회에서 잃어버린 개를 찾아주면 보상금을 준다는 벽보가 흔하다.
이 웃에 대해서는 엄동설한의 매서운 추위처럼 대하면서 자신의 개에게는 온갖 정성을 다하는 이들에게 맹자의 일침은 오히려 부족하다 여겨진다. 이기적이 라는 말조차 호사스러울 정도로 사람들의 정신상태가 온전치 못하다. 참으로 우연히 일치하고 있는 신용불량자의 수와 애완견의 수는 이 사회의 퇴폐성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이웃의 괴로움을 외면하고 자신의 애완견에 베푸는 애정을 ‘사적인 귄리’이며 자유고 또 그것을 다양화한 삶의 한 방식이라고 받아들일 수는 없다.
어쨌든 지금 우리는 간교한 현상 앞에 제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뭐 정치한다는 사람들의 간교함이야 말하는 내 입이 더러워져 거론치 않겠지만, 세상이 온통 퇴폐의 도가니에서 허우적거리는데 그런 사회 현상을 부채질하는 정치를 바로 잡아야 할 일이다. 인간의 정신을 좀먹고 육체를 갉아내는 먹는 사회를 외면하는 사람은 그 또한 제대로 된 사람이 아닐게다. 점잖게 종교인입네하는 사람들이 식인사회를 재생산하고 있지나 않은지 또한 살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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