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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 종교적 비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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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6호 발행인 혜암 발간일 2002-07-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총지논단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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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블라디미르 티코노프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경희대학교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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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6 19:16 조회 2,24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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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명대사 의거의 의의와 인간적 종교적 비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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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라디미르 티코노프
(박노자, 경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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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자료는 박노자교수가 경희대 교직시에 작성했던 학술논문으로 불교, 문화연구 17집에 실린 내용입니다.

2002년 6월17일 동국대학교 학술문화관 덕암세미나실에서 있었던 초청 강연회 '호국불교와 폭력의 문화를 넘어 양심적 병역거부의 의미를 묻는 다’에서 강연보조자료로 쓰였습니다.

불교계에서 논쟁이 되고 있는 불살 생계율에 대한 박노자 교수님의 입장을 읽을 수 있는 자료입니다.

박노자 교수님의 학술논문을 요약 발췌하였습니다.


1. 머리말 : 중국에서의 승려와 전쟁

원시 불교의 정치 사회 사상은 철저한 이분법론으로 짐작된다. 즉, 출세간인 수행자 단체는 오로지 해탈과 일체 중생 제도를 이상으로 삼아 현실적 정치 사회 생활에 원칙적으로 참여하지 못하게 되어 있고, 세간의 물질적 보시에 대한 보답으로 법 보시를 행하여 사회의 순화와 정신적,발전에 기여하였다.

수행자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모든 전쟁들은 종식될 수 없었지만, 일단 승가는 전쟁에서 직접 참여한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2. 삼국 통일 신라 고려 시대의 승려와 전쟁

중국의 한역 불교를 받아들인 고대 한국은 “승가에 의한 호국과 국왕에 의한 불교 외호”라는 중국적인 정교 관계의 패러다임을 수용 토착화 계승 발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나 귀족에 의한 “공적인” 살생 (전쟁, 형벌, 사냥 등)에 대해서는, 고대 한국 승려들도 설법 등의 많은 방편을 동원하여 전란 시대의 잔혹한 풍토를 순화 정화하면서도 왕권국가 와의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까닭에 일단 불가피할 때의 최소한의 국가적 폭력의 정당성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를 비롯한 삼국의 왕권은 승려들 의 불살생계를 보통 존중했었지만, 통일 신라 하대에 승려들이 스스로 무기를 들지 않을 수 없는 상황이 왔다. 진성여왕대에 중앙의 무능과 부패, 그리고 지방 호족과 초적  (농민 반란군)의 발호로 국가 질서가 유명무실해지자 토지 노비 소유자인들은 커다란 위협을 받게 되었다.

국가의 보호를 더 이상 의존할 수 없  된 큰 사찰들은 삼존를 지키기 위해서 이제 일종의 방위대들을 편성해야만 하였는데, 이러한 사찰 방위대에 관한 자료로서 유일하게 현존하는 것은 895년의 해인사 묘길상탑지다.

이 자료에서 사상적으로 가장 주목을 끄는 것은, "법륜의 형해 크게 봐서 으뜸으로 삼는 것이 호국이라고 표현되는 “호국 호법 일치론”이다.

신라의 호국 귀족 불교의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은 고려 시대에는, 불교 교단에 대한 국가 통제는 개인 승려의 차원을 완전히 벗어나 태조 광종 시기에 완비된 승록사 등의 국가 제도를 중심으로 크게 체계화 가중되었다.

승려들은 형법상으로도 , 실제적으로도 엄격하게 국법국가 관료 체제 아래 있었다. 그리고 승려들이 무조건 담당해야 소위 “호국적 의례“의 부담은 커져 신라 불교도 지녔던,국가적 미신적 면들이 더욱더 심화되었다.

그리고 고려 국가의 체질상으로 중앙 관료적 면들과 귀족적 면들이 혼합된 관계로, 각종의 귀족 세력의 후원을 받는 여러 종단들은 귀족 파벌간의 투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없었다.

국가의 철저한 통제를 받고, 문벌 귀족과 밀착하게 결부된 승가가 국가의 “정당”한 폭력 (전쟁, 형벌)을 전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에서, 국가적 초비상의 경 에는 국가에 의한 의병의 모집 참전은 가능하게 되었다.

13~4세기의 고려 승려들은 전쟁 형벌에 대한 불교적인 입장을 어떻게 정리 했는가? 삼국 통일신라 고려승가는 불교의 불살생 정신 생명 존중 이념을 중시하여 이를 대사회적으로 널리 유포시키는 한편, 현실적으로 국가의 공인 외호를 받아야만 하는 상황에서 국가의 제도적 합법적 폭력에 대하여 타협적인 입장을 취하여 “호법 호국 일치론”을 들어 이를 합리화하였다.

나말의 혼란 속에서 거찰들이 소유하고 있었던 토지와 노비 등의 경제적인 부를 보호할 필요성이 있어서, 중앙 정부와 무관하게 사찰들이 자체적으로 예속 농민과 승려와 구성된 방위대들을 편성하였다. 그 방위대들의 활동의 이론적인 뒷받침은 “정법 수호”, “진호국가론” 등이 었지만, 실제적으로 해당 지역의 반란도의 진압은 주요 목적이었을 것이다.

나말 혼란기에 처음으로 사찰 단위로 편성된 승병(사찰 방위대)을 신라 불교교단의 대사회적인 활동의 주요 부분으로 보기는 어렵다. 물론, 이는 신라 불교의 호국적인 면모를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그런데 신라 불교의 호국성은 주로 문두루 법회, 백고좌회 등과 같은 의례적 활동을 통해서 나타났고, 그 당시 교단의 호국 이념은 승려의 직접적인 참전까지를 요구하지 않은 것 같다. 신라 교단사상의 의례적인 호국과, 혼란기 속의 사찰 수위 방편으로서의 승병 편성은 확실히 구분되어야 한다.

고려 시대에 교단에 대한 국가의 통제 능력과 개별적 사찰 종단과 문벌 귀족의 밀착의 정도는 그 전 시대에 비해서 훨씬 향상되었다.

이와 함께 사찰 소유 토지의 면적과 예속 농민(수원승도)의 수로 대표되는 종단들의 경제적 부 도 크게 증강되고, 예속 농민에 대한 사찰의 수취 체제  국가로부터 확고한 보장을 받기도 한다. 국가 경제 사회의 주요 요소가 된 사찰들이 국가의 주요 부담인 국방의 의무도 같이 짊어져야 한다는 것은 그 당시 국가 지도층의 당연한 발상이었다.

결국, 나말 시대부터 있어 왔던 사찰 방위대들은 처음으로 국가에 의해서 “항 마군”으로 집결 제도화된다. 그리고 무신란으로 기존의 교단과 밀착했던 문벌 귀족들이 무너지고 지방민에 대한 사찰의 수취가 위협을 받게 되자, 사찰들은 그 시대의 상무적분위기에 편승히여 신속히 무장하기 시작하였다.

사찰 단위로 편성된 승병들은 무신 지 자에 대한 적극적인 제거의 시도를 펼치기도 하고, 사찰 중심의 수취 체제를 위협했던 지방 민란의 진압에 나서기도 하고, 몽고군과의 투쟁에서 많은 전공을 세우기도 하였다.

위에서 제시한 천책의 예에서 보이듯이, 이 과정에서 승가는 무사적인 정신을 상당히 많이 익혀 적군에 대한 살상 행위를 “보살행”으로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고려말에 접어들어 승병의 참전은' 당연지사로 받아들여졌고, 승병 징발휴은 승가에 대한 국가의 고유 권리로 인식되기 시작했다.

물론, 천책의 사례에서도 보이듯이, 이 상의 차원에서는 승려들은 불살생을 중시했지만, 현실적 차원에서는 국가에 의한 폭력을 종교인으로서 공공연 하게 인정해야만 하였다.

이상과 현실 사이의 이러한 괴리는 결국 교단의 도덕적 권위를 떨어 뜨려 종교 단체로서의 승가의 정체성을 상당히 약화시키지 않을 수 없었다. 거시 적으로 보면, 원시 불교의 무소유 정신을 짓밟는 교단의 치부 행각, 석가모 니의 청정 승가의 이상에 전적으로 위반 되는 정교 결탁, 그리고 근본 오계 중에서도 으뜸되는 불살생계를 저버리는 국가 폭력에 대한 적극적인 인정, 이 세 가지 요소는 고등 도덕적 종교 로서의 한국 불교의 궁극적인 퇴락에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나 싶다.


3. 사명 대사 의거의 비극성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이미 통일 신라 고려 시대에 교단의 경제적 부의 수호의 필요성. 국가와의 예속적인 관계 등으로 인해서 승가의 불살생의 이상과 살생을 허용할 수밖에 없는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겼다.

조선조에 접어들어 승가의 사회적 위치가 획일적으로 격하되어, 역대 왕들의 대불교 태도에 상당한 차이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승려들은 실제로 일반민과 같이 병역을 위시한 일체의 부역의 대상자가 된다.

국가로서는 일반민의 부담을 덜어 줄 수 있는 승병의 제공은 승가의 하나의 존재 이유이었다. 승병은 이제 사찰의 예속민이 아닌 순수 승려로만 충당된다. 불살생의 이상은 이론적으로 남았지만, 승병의 제공만 승단의 생존의 길이었을 그 당시에는 이는 실천에 옮겨질리는 만무 하였다. 이상과 현실 간의 격차는 종교인으로서의 많은 고승들에게 적지 않은 고통을 안겨 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사명당 유정 (1544-1610)의 경우에도, 종교적인 불살생 정신과 현실적인 살생의 필요성은 적지 않은 내면적 갈등을 빚게 하였다.

원칙적으로, 유정 철학의 기본 이념은 생명 존중, 중생 제도에 있었고, 폭력에 대한 그의 태도는 다음과 같은 시에서 집약적으로 나타난다.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으니 남도 또한 내 형을 죽였으리라 어찌하여 네에게 돌아오는 것은 생각 치도 않고

남의 아비를 죽이고 남의 형을 죽였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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