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속의 불교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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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39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2-12-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그림속의 불교이야기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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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8 05:01 조회 2,270회본문
시주받는 양지스님의 석장
동국대학교 경주캠퍼스의 정문에서 왼쪽으로 돌아 석장동 입구에 이르면 ‘석장사길’이라는 팻말이 보인다. 팻말을 따라 시멘트 포장길을 따라 500이쯤에 일반 주택처럼 보이는 재실이 있고, 바로 위쪽의 저수지를 지나 10여분을 올라가다보면 신우대가 무성한 곳에 석장사지 팻말이 있다. 그러나 절터의 흔적이라고 느낄 수 있는 유물은 여기 저기 흩어진 기와조각과 축대처럼 보이는 석단의 흔적뿐이다. 이 곳 에서 출토된 유물은 동국대박물관에서 볼 수 있다. 신라 27대 선덕여왕(632-646)때에 양치스님은 절에 제가 있을 때면 지팡이 끝에 시주할 포대를 걸어 두기만하면 그 지팡이가 저절로 날아 시주할 집에 가서 석장을 흔들면서 소리를 내었다. 그 집에서 알고 절에 쓸 곡식을 넣게 되는데, 포대가 차면 날아 돌아왔다고 하며, 그런 연유에서 '그가 머무는 절 이름도 ‘석장사’라고 하였다고 한다. 또한, 양지스님은 신기하고 괴이하여 남이 헤아릴 수 없는 능력이 많았 다. 한편으론 여러 가지 기예를 통달하고 있어 신묘함이 비길데가 없었다 한다. 붓으로 그림을 잘 그려 영묘사의 장육삼존상과 천왕상, 전탑의 기와와 천왕사탑 밑의 팔부신장과 법림사의 주불삼존, 좌우금강신 등이 모두 그가 만들고 그린 것이다. 영묘사와 법림사의 현판도 썼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보아 조각은 물론 그림, 글씨에도 능통하였던 것 같다.
또 일찍이 벽돌을 조각하여 작은 탑 하나를 만들고, 아울러 부처 3천을 만들어 그 탑을 절 안에 모셔두고 지극정성으로 공경했다한다. 그러나 현재 유물로 전하는 것은 조각품 몇 점이 전부다. 사천왕사에서 출토된 사천왕전은 스님께서 남기신 최고의 걸작품이라 할만하다. 현대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이 전은 부처님 나라를 지 키는 사천왕이 갑옷을 입고 악귀를 누르고 있는 형상이다. 발밑에 짓 눌린 아귀의 모습은 고통을 호소하기보다 익살스러운 느낌마져 든다. 이 작품은 아무리 사악한 악귀라도 부처님의 교화를 통해서 부처님의 수행자가 되는 악귀를 영원한 악의 상징으로 보기보다 악귀도 인격을 가진 개체로 해석한 스님의 예술세계를 잘 표현하고 있는 유물이 아닌가 생각된다.
또, 영묘사의 장육존상을 만들 때 온 나라 사람들이 앞 다투어 진흙을 나르며 불렀다고하는 가사는 일연스님이 삼국유사를 편찬할 당시(1285년경)만 하더라도 시골 사람들이 방아를 찧거나 일을 할 때에 즐겨 이 노래를 불렀다고 한다.
「오다 오다 오다, 오다 인생은 서러워라, 서러워라 우리들은, 공덕 닦으러 오네.」
지금도 시골사람들이 방아를 찧을 때나 일할 때에 모두 이 노래를 부르니 대개 이때 시작된 것이다. 영묘사 장육존상을 처음 만들 때의 비용으로 곡식 2만 3천 7백 석이 들었다. 양지 스님을 다음과 같이 기리고 있다.
「재 마치니 법당 앞의 석장은 한가운데, 향로를 손질하여 단향을 피우네. 남은 경 다 읽으니 더 할 일 없어, 둥근 얼굴의 소상을 만들어 합장 하고 보리라.」
이와 같이 삼국유사 제4권 의해 제5에는 양지스님과 석장사에 대한 기록이 전하고 있으나, 석장사지를 발굴하기 전까지는 스님의 예술 세계는 물론 절터에 대한 확실한 단서조차 잡지 못하다가 1986년과 1992년 동국 대학교 경주캠퍼스박물관의 2차례에 걸친 조사에 의해 그 실마리를 풀 수 있게 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석장사는 7〜8세기에 걸친 암자 규모의 산지가람이었으며, 고려, 조선시대까지 시대를 달리하면서 건물이 축조되었다.
그 과정에서 전대의 석재를 다시 사용함으로써 양지스님이 주석할 당시의 건물 유구에 대해서는 확실히 밝혀내지 못한 것이 아쉬움으로 남았다. 그러나 석장사지에서 출토된 수많은 탑상문전은 전탑이 존재했을 가능성을 알려 주었고,〈삼국유사〉에 3천불을 조성하였다는 내용을 뒷받침해 주는 유물이기도 하다.
특히 소조 보살상과 신장상 연기법송명탑상문전등은 양지스님의 작품으로 추정한고 있다. 아울러 이곳이 석장사였음을 확인시켜 준 유물인 ‘석장’이라고 쓴 묵서 자기가 출토된 것은 발굴의 최대 성과였다.
그 결과 이제까지 삼국유사와 민간에 구전되어 오던 석장사의 위치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고, 동시에 양지스님의 예술세계에 대한 수수께끼를 일부나마 풀 수 있게 되었다.
(신라문화진흥원 양지스님과 석장사 답사기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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