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시청 광장에 얽힌 기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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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1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2-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서울시청 광장에 얽힌 기억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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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4-29 17:45 조회 2,103회본문
지금부터 37년전, 그러니까 1966년도에 있었던 일입니다. 비록 오래 된 일이지만 내가 직접 겪은 일이라 아직도 기억이 생생합니다.
그때 나는 서울 을지로6가에 있는 동대문국민학교에 다니고 있었습니다. 지금은 그 학교 흔적도 없어지고 대신 그 자리에는 대형의류도매상가가 들어섰습니다. 혹 아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는데요, 동대문운동장 맞은 편에 덕수상고가 있었고 그 뒤 편, 예전 서울대학교 음악대학 쪽으로 있는 일본식 민지 시절에 지어진 학교가 있는데 바로 그 학교 입니다. 운동장 한켠에 노천수영장이 있었고 운동장 동쪽으로는 상당히 오래 묵은 고목 두그루가 버티고 있었지요. 하지만 70년대 들어 서울의 사대 문안에 있는 학교들이 그렇듯이 내 모교도 학생들이 없어 마침내 폐교가 되고 말았습니다.
내가 3학년때든가 4학년때든가, 어쨌든 그 무렵 부터 구로동에서 을지로까지 통학을 했지요. 그때 나 지금이나 상당히 먼 거 리인데요, 그때 그리 많은 편도 아니었던 시내버스 또는 전차를 두 번이나 갈아타고 다녔습니다. 그렇게 고 하며 통학을 한 사연이 있지요.
뭔고하니, 61년 5월 박정희를 비롯한 일단의 일본군 출신의 군인들이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한 뒤, 집 없는 서민들을 위해 서울의 변두리를 개발하기 시작했고 그런 일련의 정책적 배려로 을지로에서 살던 우리는 구로동으로 이사를 갔습니다. 그때가 아마 63년쯤 되는 것 같은데, 어쨌거나 이사를 가서도 그냥 동대문국민학교까지 다녔습니다. 왠지 낯선 동네의 낯선 학교 다니는 것보다는 고생이 되더라도 먼거리 통학을 하는게 낫겠다 싶어 내가 우긴 결과였습니다.
그렇게 다니던 중, 바로 66년 봄이던가 가을이 가 미국대통령 존슨이이 남한에 왔습니다. 64년, 미국은 베트남전쟁에 개입하였고 남한은 미국의 강력한 요구에 그 더러운 전쟁에 병력을 파견하고 있었던 때였습니다. 내 큰형님도 그 바람에 청룡부대 1진으로 65년 여름, 베트남으로 떠났습니다. 애매한 전쟁에 이 땅의 고귀한 젊은 청년들의 목숨을 바치는 상황에서 존슨이 서울에 왔고 그가 오던 날 서울에는 비상경계가 내려졌지요. 내 기억으로는 그 날 학교도 이르게 파했던 것 같습니다.
일찍 파한 영문도 모르고 집에 가느라고 버스를 기다렸는데 좀체 오질 않더군요. 아무리 기다려도 차가 오지 않아 길가던 어른한테 물어봤습니다. 했더니 그 날 시청 앞 광장에서 존슨 환영대회를 하느라고 차가 다니지 않는다는 겁니다. 을지로6가에서 구로동 집으로 가려면 필히 시청을 통과해야 하는데, 시청을 중심으로 사방이 막혔다니, 이제 어떻게 집에 가나? 하고 걱정이 태산이었습니다. 하지만 별 수 있나요. 그 쪼그만 놈의 머리에 떠오르는 방책이란 것이 그저 걷는 수밖에 없다라는 생각이었습니다. 하여 터벅터벅 무작정 걸었습니다. 을지로를 지나 시청에 이르자 그야말로 인산인 해였습니다. 그 많은 사람들이 손에 성조기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관제동원이었는지 아니면 자발적인 동참인지 광장은 사람들로 메어졌습니다. 그렇게 모인 숱한 인파를 간신히 뚫고 남대문쪽으로 걸었습니다.
그날, 벌써 37년이나 된 내 기억의 저 아득한 그 날, 나는 어찌어찌 용산인가 노량진에서 밤늦게 영등포역까지 가는 마지막 전차를 탈 수 있었고, 통행금지가 철저하던 그 시절 자정이 다 되어서야 집에 들어갔습니다. 내 작은 형님은 사정도 묻지 않고 그냥 밤톨만한게 오밤중에 들어왔다고 뒤지게 혼만 내더군요. 억울하긴 했지만 어찌 설명을 해야 할지, 영 떠오르지 않아 일단 욕만 바가지로 먹고, 쫄쫄 주린 배를 잡고 거의 죽다시피 잠에 떨어진 기억만 납니다. 존슨 덕분이었지요.
서울시청 광장에 얽힌 내 어린 시절의 기억이 새롭게 떠오른 까닭은 며칠 전 바로 그 시청 광장에서 수많은 사람들이 손에 성조기를 들고 모여 무슨 구국기도회라는 것을 벌인 모습을 텔레비전 보았기 때문입니다. 지난해 여름 경기도 의정부에서 미군의 장갑 차에 어린 두 소녀가 목숨을 잃은 사건을 계기로 미국을 규탄하는 사회적 분위기가 전에 없이 높아가자 개신교의 연합단체가 주관한 집회였습니다. 나라를 걱정한다는 기도회에 미국 국기가 나부끼고 있다는 사실을 나로서는 좀체 받아들이기가 쉽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서양의 종교를 믿는 사람들이라 할지라도 이건 좀 있을 수 없는 짓이 아닙니까? 그렇게. 미국에게 잘 보여야 할 사연이 대체 무엇인지 알 수가 없군요. 뭐라고요? 미군이 이 남한 땅에 주둔하고 있는 덕분에 한반도의 평화가 유지되고 있다고요? 새로 대통령 될 사람도 기어이 한마디 하더군요. “통일 이후에도 미군이 주둔하기를 바란다.” 무지의 소치 인지 아니면 너무 유식해서 그런지 통 이해가 안 됩니다.
지난해 초여름 내내 서울시청 광장에 ‘대한민국’이 울려 퍼졌지요. 나는 그 ‘대한민국’이라고 외쳐되는 젊은 청년들의 의식이 걱정스러웠습니다. 그들이 외쳐대는 조국의 이름이 과연 무엇을 의미 하고 있는지 알고 있을까하는 걱정입니다. 굳게 믿건대, 역사와 겨레의 앞날을 걱정하는 청년들이라 고작 반쪽짜리 조국에 대한 자긍심에 눈이 멀어 환호하고 격정의 눈물을 흘리지는 않을 것입니 다.
1987년 7월 10일. 신촌의 연세대를 출발한 대열 이 시청앞 광장을 가득 메우고 그 군중의 일부가 시청옥상에 이한열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조기를 걸었습니다. 대열의 곳곳에서 진정한 민중의 민주주의 사회를 이루어 열사의 뜻을 바로 세우자는 구호가 광장을 울렸지요.
간절히 바라건대 87년 여름, 그 광장에 울렸던 구호가 현실로 실현되어 내 어릴적의 쓰린 기억이 사라지고 우리의 역사가 바로 섰으면 좋겠습니 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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