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하심을 가져야 한다

페이지 정보

호수 43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4-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이달의 설법문안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3 08:31 조회 2,120회

본문

수행하는 사람은 하심을 가져야 한다

 『자경문』을 보면 “인을 닦고 인을 얻는데는 겸손과 사양이 근본이 되고 벗을 사귀는데는 공경과 믿음이 으뜸이 된다.

 아 · 인 · 중생 · 수자 · 사상의 산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삼악도의 바 다에 더욱 깊어지느니라. 밖으로 근사한 모양을 내어 존귀한 듯 꾸며도 안으로 얻은 바 없음은 썩은 배와 같나니, 벼슬이 높을수록 마음을 낮게 가지고 도가 높을수록 뜻을 더욱 겸손히 가져야 하느니라. ‘나’니 ‘너’니 하는 상이 무너지는 곳에 무위의 도가 저절로 이루어지나니, 무릇 하심하는 사람에게 온갖 복이 저절로 돌아오느니라. 노래하노라 교만한 티끌속에 지혜는 묻혀만 가고, 아상 · 인상 산위에서 무명은 자라만 가네, 제 잘난체 안 배우고 세월만 보낸다면 병들어 신음할 때 원탄만 가득하리.”

야운스님은 자경십문에서 “망령되이 ’스스로를 높이고 남을 업신여기는 일을 절대로 하지 말라”고 하셨다. 세상에는 ‘자기가 제일’이라 하면서 남을 무시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자기만 대단한 것처럼 생각하는 것입니다. 심지어는 한 나라 전체를 통치하는 대통령이 되고자 하는 사람들까지 이런 생각에 빠져 출마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미국의 대재벌인 카네기의 묘비에는 이렇게 쓰여져 있습니다. "자기보다 훌륭하고 자기보다 덕이 높고 자기보다 공부를 많이 하고 자기보다 잘난 사람. 그러한 사람들을 자기 곁에 모아둘 줄 아는 사람. 여기 잠들다.” 얼마나 멋있는 말입니까? 이러한 카네기 야말로 자기가 거느린 어떤 사람 보다도 똑똑하다고 해야 할 것입니다.

특히 카네기는 처세술로 높이 평가받고 있는 사람입니다. 그 처세술의 요점은 “친절해라, 겸손해라, 호감있게 보여라, 상대방의 이름을 잘 외워라”라는 것입니다. 이 처세의 비법은 십중대계 중 제7 “자기를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헐뜯지 말라”와 일맥상통한다고 할 것입니다. 흔히 사람들은 잘못을 남에게, 잘한 것은 자기의 공으로 돌리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더 큰 불협화음만 조장할 뿐입니다. 실로 마음 편히 살기 위해서는 남을 존중하고 화합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서로 화합하려면 힘과 평화가 생기고 서 로 잘 났다며 대립하면 불안과 파탄만 초래할 뿐입니다. 많은 람들이 모여 사는 이 사회 속에서 참으로 평화롭고 행복한 삶을 살아가고자 한다면 나를 높이지도 남을 업신여기지도 말아야 합니다.

야운스님은 “아 · 인 · 중생 · 수자 · 사상의 산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삼악도의 바다에 더욱 깊어지느니라.” 말씀하신 것처럼 사상의 산이 높아지면 높아질수록 고통의 수령에 깊이깊이 빠져들게 된 다는 말입니다. 아상은 ‘나다’ 하는 생각이 가득하여 제 잘난 맛으로 사는 것을 말합니다. 사람마다 ‘내가 제일이다. ’하는 생각, ‘내가제일 잘났다’고생각 하는 것이 아상입니다. 

그러나 ‘나’의 몸뚱이는 물질에 불과합니다. 물질이 차츰 낡아 부서지듯이, 몸뚱아리가 아무리 잘생기고 튼튼하더라도 별 수가 없습니다. 만리장성을 쌓은 진시왕도 한 줌의 흙으로 바뀌었고. 그 잘났던 독재자도 마침내는 죽어 염라대왕 앞으로 갔습니다. 물질은 오래되면 사라지기 마련입니다. ‘나’의 정신도 다를 바가 없습니다. 아무리 정신력이 뛰어 난 사람이라도 변천하는 것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한 생각이 일어나 잠시 머물다가 사라져 버리 는 생주이멸의 흐름이 계속되고 반복되는 것입니다.

육체와 정신으로 구성된 ‘나’ 는 끊임없이 변하다가 사라지는 무상하고 허망하기 짝이 없습니다. 그런데 이 무상한 ‘나’ 를 대단한 것 인양 내세우고 있으면 고통만 따를 뿐 수행에는 진척이 없습니다. 수행하는 사람은 아상 부터 없애야 합니다.

아상이 없어지면 결국 상대적 이고 대립적인 인상도 따로 내세울 것이 없이 사라지게 됩니다. ‘너는 너’라는 생각이 스스로 사라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나’와 ‘너’라는 분별이 사라지면 중생상도 수자상도 생겨 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아상이 강하면 강할수록 인상도 강해지고 중생상, 수자상도 강해집니다.

중생상은 여러 가지 모습으로 나타납니다. 약한 사람을 누르고 강한 사람에게 빌붙는 약육강식도 중생상이요, 자기가 하는 일에 지나친 애착을 갖고 남을 이기기 위해 투쟁하는 것도 중생상입니다. 곧 미혹한 중생들을 소견으로 짓게 되는 모든 업이 중생상입니다. 수자상은 생사에 대한 끈끈한 모습입니다. 몇 해만 지나면 죽을 사람인데도 천년 만년 살 것처럼 집착하는 것을 말합니다. ‘나는 오래살 수 있어.’ ‘나는 오래살아야만 해.’ 이렇게 생각하며 불로장생을 계획하는 것이 모두 수자상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이익을 찾아 투쟁하고 생사에 얽매여 사는 삶, 이것이 무엇에서 비롯된 것입니까? 모두가 ‘나’ 때문에 비롯된 것입니다. 바로 아상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나’를 고집하는 아상이 원인,인상이 연이 되어 생존 투쟁의 업을 짓게 되는 것입 니다. 이 업이 중생상입니다. 그 리고 그 업으로 말미암아 생사 속을 윤회하여 죽음의 공포와 목숨에 대한 애착 속에서 허덕이는 수자상이라는 과보를 받게 됩니다.

이처럼 아상 · 인상 · 중생상 · 수자상 · 은 인 · 우연 · 업 · 과의 연결고리를 형성 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아상을 없앨 때 인상 중생상 · 수자상은 저절로 사라지게 됩니다.

나를 높이는 아상을 버리고 하심을 할 수 있는 사람이면 진실로 남을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마음을 낼 수 있게 되며, 참된 봉사를 하면 내 마음은 저절로 편해 질 수가 있습니다. 이렇게 하여 일체 사람을 편안한 세계로 인도 하면 대복전, 곧 큰 복밭을 만들 수 있게 됩니다.

아상을 다스리면 사상산이 점점 낮아지고, 사상산이 낮아지면 지옥 · 아귀 · 축생의 바다가 바닥을 드러내어 마침내 해탈의 경지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아상을 내세워 밖으로 근사한 체하고 존귀한 척한들 실속은 전혀 없습 니다. 마치 썩은 배를 물에 띄우면 푹 잠겨버리는 것과 같이 삼악도의 바다 속으로 깊이 빠져들어 갈 뿐입니다. 물은 높은 데서 아래로 흘러갑니다. 곡식은 익을 수록 고개를숙입니다. ‘나’는 잘 났고 ‘너’는 별것 아니라는 상이 무너질 때 조작이 없는 진실한 도가 저절로 나타나게 되며, 아상을 다스리는 하심을 하면 만가지 복이 스스로 찾아들게 되는 것입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