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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계율과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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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5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6-02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총지논단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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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4 09:51 조회 2,17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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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율과 신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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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글은 종조 원정 성사께서 서적간행을 위해 친히 쓰셨던 원고의 일부입니다. 원정 성사께서 창종의 뜻을 구국도생에 두셨던 만큼 구구절절 일체중생제 도의 대비원을 느끼게 됩니다.

또한, 한국밀교의 중흥을 창종 정신으로 삼았던 종조 원정 대성사께서는 정통밀교종단의 교상과 사상의 체계와 정립에 전념하셨습니다.

특히, 한때 진각종단의 총인직을 맡으셨을 때는 모든 교리체계와 교전편찬을 손수 완성하기도 하셨습니다. 이러한 면면은 원정 대성사의 유고에서 엿보게 됩니다. ‘심인진리’ ‘진각’ 등의 언급은 이를 입증하고 였습니다.

총지종과 진각종의 교전을 아우르고 있는 종조 원정 대성사의 가르침에서 대성사의 숨결을 다시 한번 느껴 보시기 바랍니다.

〈편집자주〉




희사 ②

들어오는 재물이 적을 때에는 청백하게 받아서 조절하여 쓰고 재물이 많을 때에는 바른 곳에 잘 쓰면 복혜가 구족하고 행복이 오래 가게 되느니라. 희사에도 소극적 희사와 적극적 희사가 있으니 자기 소유재산의 일부를 떼어서 희사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줄여서 하게 되니 소극적 희사가 되고, 수입이 있을 때마다 열의 하나를 정공희사하는 것은 가지고 있는 재산을 조금도 줄이지 않고 하게 되니 적극적 희사가 되느니라.


계율과 신조 ①

재래불교에서 부부는 같아지지 않는 법을 주로 세워 왔고 심인불교에서는 한 남편과 한 아내로서 사는 법을 주로 세우게 된다. 부부간 불화한 사람이 있어 교에 들어와 심공하는 사람은 자  화합하고 결국 서로 뜻이 화목하여진다. 진각님을 믿고 육행생활하는 사람들의 정신은 절대 평온하리다. 가정이 화평하고 안하고는 남편과 아내 모두에게 공 히 책임이 있으나 그 근본은 아내에게 있는 까닭으로 아내로서 더욱 심공하여야 할 것이다. 아내가 바로서야 남편이 바로서고 남편이 바로 서야 가정이 바로 선다. 이는 고금을 통하여 전승되는 것이니 시대가 바뀌었다 하여도 그 믿음에는 틀림이 없어야 하느니라. 내 주장이 강하고서는 절대 화평과 화순을 가질 수 없다. 상대를 존중하며 서로 논의를 하는 데서 서로의 존엄이 서게 되는 것이니 남편은 아내를 존중하고 아내는 남편을 귀히 여겨야 할 것이니라.

종교 안에서도 마찬가지이다. 모든 것을 내 입장에서 생각하지 말고 남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며, 나 자신을 규율하고 점검하고 남을 귀히 여겨야 하느니라. 남의 허물 보지말고 나를 엄히 다스려 단속하여야 하리라. 계율은 남을 구속하 고자 있는 것이 아니요 내 자신을 담금질하고 나를 낮추고 남을 높이는 정신을 기리는 데 있느니라.

한 불교 안에서도 자기 종파를 믿고 있으면서 저 종파의 설법을 듣더라도 종지를 굳게 세워 신행해나가야 할 것이다. 만약 이 교에서 믿음이 타락 되었거나 나의 근기와 믿음이 맞지 않 나 현세 행복을 이루지 못하고 자연취미에 맞지 않을 때 이 교에다가 믿음을 완전하게 끊고서 저 교에 간다고 해서 크게 죄가 되는 것은 아니며, 또한 반대로 저 에서 믿음이 타락되었거나 나의 근기와 믿음이 맞지 않거나 현세에서 고통을 면하지 못하고 있거나 자연 취미에 맞지 않아 저 교에다가 믿음을 완전히 끊고서 이 교로 옮기는 것도 죄가 되지 않느니라.

다만 내 믿음이 얼마나 깊으며 내 신심이 얼마나 돈독한가 하는 것이 더 중 요하느니라. 내 믿음이 굳건하지 못하면 이 종교 저 종교에 옮겨 다녀 본들 아무런 길잡이가 되지 못하며 번뇌망상과 마장만을 가져 올 뿐이다.

우리 민족 가운데는 아직 종교가 완전 하게 세워지지 않아서 일년에 한 두 번씩 천지허공과 사천 일월성신에 미신적으로 기도 행사하는 것을 교를 믿는다고 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 같은믿음을 버리고 다 고쳐서 일주일마다 교에 나와 법계 진각님의 말씀을 믿고 스승의 가르침을 배워서 육행을 실천하고 자기의 심인을 깨달아서 교의 의범과 대중행사를 행하는 믿음이 되어야 비로소 교를 믿는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저 교에 다 믿음을 완전하게 끊고 이 교에 들어와서 잘 믿고 크게 깨친다면 그것이 죄가 되지 않으며 이 교에다가 믿음을 완전하게 끊고 저 교에 가서 잘 깨닫는다면 그것도 큰 죄가 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가고 오는 것이 분명하게 하여야 하루라도 극락으로 살고 한달 한 해를 살더라도 극락으로 살고 평생 또는 세세생생이라도 극락으로 사는 것을 세 우는 것이 되느니라.

옛날에는 부모가 싫다고 하면 인정 있는 아내일지라도 살지 못하였고, 부모가 좋다고 하면 인정 없는 아내일지라도 버리지 못하고 왔던 것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부부는 서로 의사가 맞지 않으면 합의한 결과로 이혼하게 되는 것은 자유세계에서 가히 막을 수 없는 법이다. 그러므로 이 법이 새로 서는 반면에는 부부가 되어서는 더욱 절대적 정조를 세우는 법이 서야 할 것이며 또 남녀간에 서로 평등한 지조를 가지는 법이 서야 하는 것도 법계의 진리로 알아야 한다.

현재와 같이 인륜도덕은 없어지고 평등을 부르짓는 이 때에 금수와 다른 인간적 윤리를 세우자면 여러 종교 종파가 각기 종지로서 굳은 절개와 확고한 사상을 세우는데,국가에서는 민족적 자결이 서게 되고 정당정치에는 노선과 정견이 서게 되고 국민에는 남녀간 정조  세게 되는 원동력이 되느니라.

원리원칙과 종지방편과 주관이 다른 교에서 한 집같이 서로 오고 가게 되면 종지는 피차 상대가 되어 있는 까닭으로 내가 세우고자 하는 종지도 확고한 힘이 없고 저이가 세우고자 하는 종지도 확고 한 힘이 없어져서 서로 상실되고 어떤 중간적인 종지 하나가 나오는 것은 재래 일원주의 시대에 중도법이 되는 것이므로, 사회적 세계적 대범위로 교화하는 이 원주의 시대에 전공적 공로 법을 세우는 데는 승도 아니요 속도 아니요 공도 아니요 색도 아니요 유상도 아니요 무상도 아니요 각 오도 아니요 계율도 아닌 것 이 된다.

계율을 지키는 데서 정조가 서게 되므로 교를 가지고 있는 자는 마땅히 계를 지켜 나가야 하는 것이니라. 종파가 나누어짐에  따라 자기 근기에 맞는 확고한 종지를 찾아 가는 것은 발달적이요 허물이 아닌 것이다. 그러나 이것이 좋을까 아니면 저것이 더 좋을까 하고 왔다 갔다 하다가는 굳은 심신을 가지지 못할 뿐 아니라 아무런 심지도 지니지 못하게 될뿐이다.

그런고로 자기 종교를 가지고 나면 확고한 종지로서 흔들림이 없어야 하는 것 이니, 나의 남편 아내가 아닌 남의 부부를 대하듯 해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이니라. 그러므로 종파는 종지와 방편을 세우는 원리나 원칙이나 방편 하나라도 같지 않으면 그 종파 안에서 종지가 통일 되지 않는다. 종파의 종지를 굳게 가지는 정신을 세우지 않고 정절없이 희미하게 왔다 갔다하는 사람은 자기의 성품도 깨닫지 못하고 지혜도 밝히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일체의 지조가 없고 이원 다원으로 자유와 평등을 세우는데 장애물이 되는 것이다.

한 불교라도 종파간에 종지를 다르게 세우는 것은 마치 유교가 다 같은 사람으로서 삼강오륜과 존비귀천을 다르게 세우는 것과 같다. 이제 인륜도덕은 무너지고 남녀 경계가 해방된 이 시대에 우리는 대승적 인도정신을 세우자면 천종 만파가 정조 흐린 사람과 같이 종지를 혼동하지 말고 돈독한 종지를 각 자가 확고하게 세우는 데 있다.

〈자료제공 종학연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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