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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밭을 개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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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8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9-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지상설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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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무공 필자소속 운천사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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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5 06:50 조회 2,3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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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혜의 밭을 개간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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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천사 무공 정사

“배우는 사람들아, 사람 몸 받기가 어렵고 불법 만나기 또한 어려운 일이다. 이 몸을 금생에 건지지 않으면 다시 어느생을 기다려 건질 것인가?

그대들, 참선을 하고 싶은가? 그렇다면 모든 것을 놓아 버려라. 무엇을 놓아 버릴 것인가 하면 이 몸과 마음을 놓아 버리고 무량겁으로 익혀온 온갖 업식을 놓아 버려라. 그리고 항시 자기 발부리를 살피면서 이것이 도대체 무슨 도리인고? 하고 곰곰이 추궁해 보아라 끊임없이 추궁해 나아가면 문득 마음 빛이 

환해져서 시방세계를 두루 비추게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마음에 얻음이고 손에 잡힘이라고 할 수 있다. 능히 대지를 변화시켜 황금을 만들고 강물을 휘저어 맛있는 음식 을 만드는 소식이니, 이 어찌 평생 유쾌한 일이 아니겠는가?

부디 책 속의 글귀를 가지고 선을 찾고 도를 구하려고 하지 말라. 선과 도는 결코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설사 팔만대장경과 제자백가를 죄다 왼다 할지라도 그것은 한가 로운 빈 말이니. 죽음에 당해서는 아무짝에도 쓸모없다. “

위의 인용문은 말이나 문자에만 집착한 나머지 실지 수행에 힘쓰지 않는 사람들을 빗대어 한 말입니다.

선종의 사서인 “오등회원”에는'사심선사의 행적이 실려 있습니다. 그는 여러 곳을 행각하다가 황룡산의 회당 조심선사를 찾아가 자기가 아는 지식을 장황하게 늘어놓습니다.

말이 많은 젊은이를 보고 조심선사는 다음과 같이 타이릅니다.

“아무리 음식에 대해서 이야기한들 어찌 배부를 수 있겠는가?” 사심 선사는 공부에 이렇다 할 진전이 없자 하루는 조심선사를 찾아가 가르침을 간절히 청합니다.

“저는 이제 활도 부러지고 화살도 다했습니다. 스님께서는 자비를 베푸시어 안락처를 가르쳐 주십시오.”

조심선사는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먼지 하나가 하늘을 가리고 티끌 하나가 땅을 덮는다. 안락처는 그대의 허다한 분별심을 가장 꺼리는 것 이니, 무랑겁을 두고 내려온 그 마음을 당장 죽여 없애라.”

이때부터 사심선사는 공부에 대한 열정이 더욱 간절해져 밤낮으로 열심히 정진하였습니다. 하루는 선실에서 좌선중이었는데 뜰을 지나 가는 사람의 지팡이 끄는 소리에 문 득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는 환희에 넘쳐 신을 벗고 있는 것도 잊어버리고 조심선사의 방에 뛰어 들어가 자랑하였습니다.

“천하 사람들은 모두 참구를 얻었지만 저는 깨침을 통해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조심선사는 웃으면서 말하였습니다.

“부처를 선발하는데 장원으로 뽑혔으니 무슨 말을 더 하겠느냐?” 그는 이때부터 스스로 이름 하기를 마음이 죽은 사람을 사심수라 하고, 거처하는 방을 사심실이라 하였습니다.

참선을 하고자 하는 사람에게 “이 몸과 마음을 잊어버리고, 오랜 세월을 두고 잘못 익혀온 그릇된 생활습관도 다 비워버리라”고 말 한 것은 자신의 모든 사고와 습관은 일찍이 자신만의 동굴 속에서 답습한 길이 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책 속의 메마른 지식을 가지고 선을 삼거나 진리를 삼지 말라고 당부한 것은 아무리 뛰어난 지식일지라도 절박한 생 차 핢에는 아무 도움이 될 수 없고 삶의 과정에서 깨달은 지혜를 통해 삶을 윤택하게 유지할 수 있기 때문 입니다.

오늘날 우리들은 예전 사람들에 비해 아는 것이 너무 많습니다. 그 분야의 전문가가 아닐 지라도 허다한 지식과 정보를 통해 소상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아는 것만큼 현실 속에서 활용하려 살고 있는가? 하고 자문해보면 대부분은 ‘그렇지 못합니다.’ 라고 대답할 것입니다. 바깥 세계에 대해서는 달 표면이 패이고 솟은 것까지 알고 있으면서 막상 가 장 가까운 자기 내면의 존재와 실체 에 대한 자기성찰이 부족하여 어려운 문제에 봉착하게 되면 어쩔 바를 모르고 허둥대는 것이 현대인입니다.

‘우리가 안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해와 인식을 통해서 삶을 개선하고 심화시키는데 의미가 있습니다. 아는 것과 삶이 이어지지 않는다면 한낱 공허하고 메마른 지식으로 처 지고 맙니다. 많이 알수록 그만큼 의식이 분산됩니다. 지나친 지식은 사람을 좀스럽게 만들기 쉽습니다. 앎의 무게에 짓눌러 자칫 사람이 왜 소해지기 쉽습니다. 자기 전공분야 밖에는 세상 물정도 모르는 콱막힌 학자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격을 이루고 있는 보편적인 지성으로까지 심화되지 못하고 지식에만 안주 할 때 그런 결과를 낳게 됩니다. 그런 지식은 생동하는 인간의 삶에 별 로 도움되지 않습니다.

특히 종교의 세계에서는 그와 같 은 지식은 삶을 어지럽게 한다고 해서 멀리합니다. 이론보다 행을 무겁  여기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책 속에 진리와 삶의 방법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거기에 너무 기대다 보면 자기 눈을 잃게 될 위험이' 따릅니다. 책은 마치 수렁과 같아서 거기에 잘못 빠져들면 헤어 나올 기약이 없습니다. 딛고 일어서려면 커 다란 용기와 결단이 필요합니다. 가. 존의 지식이란 남의 말이요, 남의 견해입니다. 자기 말과 자기 견해를 가지려면 반드시 자기 사유와 자기 체험이 전제되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아는 덕산선감 선사는 젊어서 금강경에 통달하여 그의 성인 주씨를 들어 주금강이라고 할 만큼 금강경에는 제일인자로 자처하 였습니다. 그러나 시골 떡장수 할머 니의 물음에 답을 못하고 쩔쩔맸네 일이 있었습니다. 그는 문자로 된 금강경에는 통달했을지 모르지만 문자 밖의 일과 소식에는 깜깜했던 것입니다. 지적인 이해에는 앞섰지 만 종교적인 체험에는 결여되었던 것입니다.

지적인 이해는 지식의 영역이고 머리로 하는 분별입니다. 그러나 종교적인 체험은 지혜의 영역이고 가슴에서 손발로 이어지는 삶의 세계 입니다. 지적인 이해에는 그 시선이 항시 외부로 향하지만 종교적인 체험에는 눈과 귀와 그 밖의 모든 감각이 내면으로 기울어져 있습니다. 마음 밖에서 찾지 않고 마음 안에 간직된 것을 캐내는 것입니다.

지식은 사람을 피곤하게 합니다. 그러나 지혜는 사람에게 생기를 불어 넣습니다. 지식이 한 때 머물다 지나가는 바람과 같은 것이라면 지혜는 온갖 씨앗을 움트게 하는 대지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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