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사원 우리 스승님 (전주 흥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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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7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8-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사원탐방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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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5 06:03 조회 2,518회본문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요, 실천적 수행의 가르침
해맑은 창공 사이로 햇쌀이 손짓하며 유혹하고, 고속도로 옆에서 밀려오는 시골의 풍경들이 한가롭게 보이며 푸르름이 깊어만 가는 나무들 사이로 다가선 실바람은 나그네외 가슴속을 설레게 한다.
전라북도의 도청 ,소재지이며 '백제의 예술인과 선비들의 전통이 깃 든 전주!
톨게이트로 들어서니 제일 먼저 다가선 것은 정갈진 전라도 사투리로 물어보는 안내원의 목소리에 다시한번 향토적인 냄새가 물씬 풍긴다.
이 고장에서 어렵게 자리 잡으며 밀법을 흥포하기 위해 일어선 흥국사!
소낙비와 몰아치는 세찬 바람에도 으젓한 모습으로 모든 인간고뇌를 해탈하고 이제는 마치 장마비가 그치고 고요한 항해를 준비하는 선장처럼 밀법으로 전주의 모든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새로운 건물로 웅장하게 자리잡은 흥국사가 높은 언덕 기슭 에서 밀법을 포교하고 있다.
흥국사의 유래
흥국사는 총기2년. 전주시내에 한복점을 임차하여 전주선교부로 개설하고 초대주교로 자선원 전수를 임명하였다. 이어 총기5년 전주시 다가동2가 104-1 번지를 임차하여 불단이설을 하고, 총기9년 고사동2 가 대지75평과 건물을 매입하여 흥국사로 개칭하였으며 대관전수님이 재직하였으며, 현재는 밀공정 전수님이 총기25년 부임하여 재임하시고 계신다.
또한 지난해 4월 26일 전주시 완산구 효자동에 대지 307평을 매입하고 연면적 149.86평에 올해 5월 완 공한 신축건물로 단장한 흥국사는 우아한 자태를 자랑하며 전주지역에 밀법 시대의 개막을 알리고 있다.
관세음보살의 요람
흥국사는 비가오면 빗방울을 맞아가며, 찬바람이 불면 벽사이로 들어오는 찬바람을 두꺼운 담요로 막아가며 불공한 허물어진 초가삼간에서 처음으로 시작하였다. 이러한 열악한 환경속에서도 오로지 부처님께서 해탈한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불공한 공덕으로 이곳에서 불공한 사람들의 자손들은 모두가경제적, 신앙적으로 훌륭한 삶을 살아가고있다. 특히 한 보살님은 자신의 신앙체험을 이야기히는 도중에 눈물을 흘리시며 부처님의..공덕이 이렇게 대단한 줄은 몰랐다고 하시면서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해 말씀하셨다.
“제가 이 불법에 인연을 맺게 된 겄은 오랜 시절 부터입니다. 불법에 인연을 맺고 서원당에서 불공을 할 때는 7남매의 자녀들을 키우면서 하루를 어떻게 먹고 살까?걱정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아주 어려운 상황이었습니다. 희사도 제대로 하지 못할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하루도 빠지지 않고 서원당에 나와 누구보다 열심히 불공하였습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하면 믿지 못할 사람들이 많을지 몰라도 지금 큰 아들은 금융업계에서 성공하고 작은 아들도 대기업에서 중역을 차지하며 일하고 있고, 딸들도 모두가 한결같이 경제적으로 어려움 없이 생활하고 있어 지금은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불공하는데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오로지 지극정성으로 서원하고, 자신의 욕심만 채우기 위해 불공하지 말고 남을 먼저 생각하고 모든 것은 자신의 마음속에서 만들어 지는 것이며, 항상 편안한 마음가짐을 가지도록 노력하는 것이 불공입니다.”라고 하셨다.
그 보살님의 얼굴에는 마치 부처님이 해탈한 모습처럼 환환 광명의 빛이 발하며 말소리에는 부처 님의 깨달음에서 우러나오는 목소리였다.
또한 백발이 허연 노보살님들의 얼굴에서도 불도를 이루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모습이 마치 이곳 이 관세음보살의 요람이 아닌가 싶었다.
부처님의 은혜에 대한 참회의 눈물
“서울에서 큰 법회가 있어 참석하는 길이었다. 차창사이로 밀려드는 파란 판을 바라보면서 원인 모를 눈물이 하염없이 쏟아져 흘러 내렸다. 누가 보면 저 노인이 혹시 자녀들에게 쫓겨 나는 기고한 사연이 있길래 저리도 눈물을 홀릴까? 하고 의심할 정도로 눈물을 가누지 못할 정도였다.
그 눈물은 다름아닌 부처님의 은혜에 대한 감사의 눈물이었다. 세찬 바람과 매서운 눈 속에서도 고이 피어나는 한 송이의 꽃처럼 부처님의 공덕으로 모든 자녀들이 한결같이 각자의 맡은 바 업무에 최선을 다하며 경제적, 문화적으로 안정 된 삶을 살아가고 있고, 남부럽지 않을 정도로 생활하고 있으며 모든 자녀들과 며느리와 사위, 조카들이 한결같이 수순한 마음과 건강한 모습으로 생활하고 있음과 자신 또한 많은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건강하게 남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과 편안한 생활속 에서 삶에 대해 지족할 수 있도록 만들어 준 부처님의 공덕에 의한 것이었음을…
만약 부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지금 자신의 모습은 어떻게 변했을까? 남을 중상모략하고 시기하고 질투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솟아나는 집착에 의해 아마 고통 속에 나날을 살아가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삶은 내일 죽더라고 반가이 죽음을 맞이할 수 있고 현재의 생활에 만족하며, 모든 사람들의 은혜에 감사하는 마음으로 생활할 수 있었던 것은 아마 부처님의 법안에서 생활하고 있었기 때문이리라. 이러한 공덕으로 모든 자녀들도 한결같이 총지종의 법안에서 매일 염송하며 생활하고 있기에 그들 또한 삶에 지족할 줄 아는 법을 배웠으리라.' 그러기에 생활에 만족하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부모에게 수순하히자녀들에게 올바른 가르침을 줄 수 있었을 것이리라 생각하니 감사의 마음은 끝이 없는것 같아 눈물이 앞을 가린다.“
보살님은 부처님의 공덕에 대한 감사의 눈물을 흘던 경험담을 아야기 하시며 지금도 오직 감사 하는 마음으로 생활하고 계신다고 하였다.
오늘을 살라
우리는 분명히 오늘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몸은 오늘을 살아가지만 마음은 과거나 미래 속에서 헤어 나오지 못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내가 왕 년에는…,” 하며 소위. 과거의 잘나가던 시절을 추억 하는 사람, “아! 그때 그렇게 했어야 했는데 말야.” 하며 과거에 대해 못내 아쉬워하는 사람, “앞으로앞 서는 사람, “어서 그 날이 빨리 왔으면..,. ”하며 부푼 기대를 안고 살아가는 사람.
누구나 그럴 수 있고 그것이 이상하지도 않습니다. 과거와 비교해서 형편 없는 오늘의 자신을 끝내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던가, 과거의 슬픔과 아픔을 현실의 일인 양 너무나 연연해 그 끈을 놓지 못한다던가, 미래에 대한 막연한 걱정과 기대만 할 뿐 현실을 직시하고 오늘을 충실히 살아가 지 못하는 것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부처님께서는 “지나간 일에 대해 근심하지 말고 미래에 대해 집착하지 말라. 현재에 얻어야 할 것만 을 따라 바른 지혜로 최선을 다할 뿐 딴 생각하지 말라. 미래를 향해 마음을 치달리게 하고 과거를 돌아보아 근심 걱정하는 것은 마치 우박이 초목을 때리는 듯 어리석음의 불로 스스로를 태우는 것과 같다.”고 말씀 하셨습니다.
우리는 너무나 많은 시간 동안 불필요한 고민과 기대 속에서 세월의 에너지를 허비해 왔습니다. 이제 부질없이 지나간 과거의 잘못 때문에 후회와 한탄만 하고 있지 않을 것입니다. 앞으로 뭔가 좋은 일이 있을 거라는 막연한 기대로 그날이 오기만을 무작정 기다리지도 않을 것입니다. 지난 과거를 냉정하게 점검하고 두 번 다시 후회하고 가슴아파할 일이 없도록 두 번째 화살을 맞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도록 주의를 기울여 오늘을 살아갈 것입니다. 또한 우리의 미래는 오늘의 내가 만드는 것임을 알아서 오늘을 헛되이 살지 않을 것입니다. 그것이 내 삶의 역사에 밑그림을 그리고 그 역사의 한 페이지 를 아름답게 채워가는 일인 줄 알기 때문입니다.
티벳트에는 “내일보다 내생이 먼저 올지도 모른다” 는 속담이 있다고 합니다. 내일이 오기 전에 죽음이 먼저 올 수도 있다는 말이지요. 우리는 지금까지 삶만을 생각했지 죽음을 생각한 적어 거의 없습 니다. 그리고 죽음은 남의 일인 것으로만, 먼 훗날 의 것으로만 생각해 왔습니다. 그러나 이미 죽어간 많은 사람들이 그와 같이 생각하며 꼭 해야만 하고 서둘러 해야 할 일들을 내일로 미루다가 내일을 보지도 못한 채 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므로 우리 내일을 너무 믿어서는 안 됩니다. 정말로 우리에 게는 내일이 다가오지 않을 수도 있으니까요.
우리에게 내일이 오지 않는다면 우리는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할까요? 어차피 죽을 거니까 될대로 되라지, 하며 막무가내로 시간을 보내고는 무기력하게 죽음을 맞이해야 할까요? 아니면 얼만 남지 않은 삶이니 하고 싶었던 거나실컷 하고 쾌락이나 맘껏 즐기다 가면 좋을까요?
그러나 자신을 진정으로 사랑하고 삶에 대해서 조금이나마 진지하게 생각해 봤던 사람이라면 결코 그 아까운 시간을 무가치하게 보내지 않을 것입니다. 가장 시급하고 꼭 해야 할 일부터 계획을 세워서 차례치례 이루어 나가려 할 것입니다. 그동안 등한시했던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해서 자신이 만났던 사람들에 대해서 차분히 돌아볼 것이고 어떻게 하면 오늘 하루를 한 치의 후회없이 여한 없이 살아갈 수 있을 지를 생각해 볼 것입니다.
우리의 삶을 성스럽게 하지 못하는 바르지 못한 생활을 잘못된 자기사랑에 부질없이 욕심부리고, 시기하고 질투하던 나쁜버릇을, 늘 감사함을 느끼면서도 왠지 부끄러워 말 한 마디 건네지 못한 어리 석음을 과감히 정리할것입니다.
그리고 늦기 전에 내일이 오기 전에 지금 해야 합니다. 감사해야 할 사람에게 감사의 말을, 용서를 빌어야 할 사람에게 용서를, 사랑의 말을 전해야 할 사람에게 사랑의 말을, 만나는 사람들마다 다시 보지 못할 사람처럼 간절한 마음으로 친절과 호의를 …, 그리고 오늘 힘써 이루어야 할 일에 온 마음을 다하여 매진해야 합니다. ’
수행의 실천
현상계의 모든 것은 끊임없이 생성소멸하지만 우리의 일체 의지와 행위는 그대로 남습니다. 이것을 불교에서는 업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업이 모여 거짓의 나를 만들 고, 육신을 만들고, 또 정신을 지배하게 됩니다.
따라서 새로운 생명을 받을 때는 주체적으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이 업의 힘에 따라 종속적으로 받게 됩니다. 즉 인간은 이 세상에 주체적으로 태어난 것이 아니라. 지은 업에 따라 온 것입 니다. 수행은 이러한 인간 의 ‘거짓의 주인’노릇을 하 고 있는 업의 역할을 점진 적으로 맑고 밝게하여 궁극 에는 업의 소멸을 이루게 하는 행위입니다.
올바르게 이해한 바를 실천하기 위해서는 이 ‘거짓 주인’노릇을 하고 있는 업, 즉 내적인 암흑을 밝혀 나가야 합니다. 이를 위해 무엇보다 자기|자신의 본성을 꿰뚫어 보아야 합니다.
약 2,500년전 붓다가 제시한 길은 바로 자기 본성을 꿰뚫어 보는 ‘자기 관찰’의 길이유니다. 부처님께서는 “나의 본성을 관찰함으로써 마음을 담고 있는 바로 이 몸뚱이 안에서 나는 우주와 그 기원, 생성과 소멸에 이르는 길을 알게 되었다.”
이와 같이 수행은 자신을 관찰함으로써 정신적 통찰을 방해하는 편견, 참다운 실재를 은폐하고 고통을 야기시키는 충동 등을 있는 그대로 알아차리게 하기 위한 마음 정화법
입니다. 그 수행방편이 바로 밀교의 삼밀관행법을 통하여 자기를 동요시키고 비참하게 만드는 내적 긴장을 받아들임과 동시에 점차 그것들을 해소시켜 마음을 순수하고 평화롭게 하는 지혜를 스스로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 마시는 습관을 바꾸게 하기 위해 엄청난 인내와 노력을 요구하듯이 수행자의 업과 습관을 맑고 밝게 하기 위해서도 끊임없이 이어온 축적된 노력의 결과이지 우연의 행운으로 인한 것은 아닙니다. 이것이 자연의 이치이자 인과의 법칙입니다.
불교의 수행은 실천적 가르침입니다. 단순하게 부처님에 대한 믿음이나. 가르침에 대한 믿음만으로는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습니다. 또한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지적 이해의 길이 아닙니다. 믿음이나 지적 이해는 실천으로 그 생명력을 부여받을 때만 유용한 가치를 가지게 됩니다. 붓다가 가르친 실제적인 수행의 실천은 구체적인 결과를 가져오고 우리의 삶을 새로운 차원으로 변화시킵니다.
부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많은 양의 경전을 암송만하고 실천하지 않는다면 남의집 소만 세는 목동과 같다. 그는 진리를 찾는 사람만이 맛볼 수 있는 내적 보상을 받을 수 없다. 만약 어떤 '사람이 경전의 몇 구절만을 암송할 수 있을 지라도 그가 처음부터 끝까지 수행의 길 위에서 법대로 살아간다면 그는 진리를 찾는 사 람만이 맛볼 수 있는 보상을 받는다.”고 하셨으며 수행의 실천은 정어, 정업, 정명 즉 계행의 실천으로부터 시작되어야 합니다. 계행의 실천은 심성을 훈화하는 과정이며 공덕의 쌓임으로 이어집니다. 마음의 수행은 각성의 훈련인 정정진, 정념, 정정 즉 좌선과 실상관법으로 실천을 해야 합니다.
관세음보살인 보살님들의 신행체험과 밀공정 전수님의 불교의 교리와 수행의 실천에 대한 법문을 듣고 있노라니 시간의 흐름이 정체되어 있는 것 같 았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라던가!, 흥국사에서 들었던 법문들이 한 구절, 한 '구절 귓가에 메아리치며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다.
화엄경에서 선재동자가 깨달음을 얻기 위해 선지식인들을 만나는 것과 같다. 오늘도 관세음보살들이 해탈의 경지에 도달하기 위해 용맹정진하는 밀법의 수행도량인 흥국사를 뒤로 하고 떨어지지 않는 발걸음을 돌려야 했다.
“계행과 수행의 실천은 그 자체로 매우 가치가 있습니다. 계행을 실천함으로써 정신적 초조함을 피하게 되고, 또 각성에 의해 자기 자신을 성찰할 수 있는 있으나 실재를 꿰뚫어 보고 무지와 집착으로 부터 자유로울 수 있는 것은 지혜의 발전에 의해서만 성취될 수 있습니다.
또 수행은 ‘진리에 대한 생각’만으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수행자는 직접 경험한 진리를 바탕으로 하여 ‘있는 그대로의 모습’ 을 보아야 합니다.
오직 살아있는 경험으로 자기의 아집이나 편견에 치우치지 않고 중도를 지향해 나가는 것. 그것이 바로 지혜로운 삶이고 행동하는 삼밀관행법입니다. 불교의 모든 수행 방법들은 걸림없는 삶, 즉 깨달음에 이르기 위한 수단이요, 방편일 뿐입니다. 그 자체가 목적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깨달음은 정적인 면에서 표현해 보면 ‘한없는기쁨 입니다. 물통에 가득 찬물 을 힘들게 들고 가다 물통의 밑이 빠지면 일시에 가벼워지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마음속에 ‘나’ 라는 놈이 꽉 들어 차 있어서 무거웠었는데 일시에 쑥 빠져나갔으니 얼마나 가볍고 즐겁겠습니까?
깨달음을 지적인 면에서 표현해 본다면 바로 ‘하 나’ 가 되는 것입니다. 누에가 고치집을. 짓듯 육신을 중심으로 울타리를 쳐놓고 살아오다가 일시에 ‘나’ 라는 울타리가 부서져 버리는 일입니다. 즉 나와 남, 나와 우주가 통해져서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로 보는 것이 지혜입니다.
‘하나로 보는 지혜’를 통해 ‘하나가 되어 살아가 는 삶’ 으로 나아가는 것, 즉 실천으로 드러나는 모습이 자비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지혜는 ‘나’ 라는 소아적인 것들이 부서지고 ‘우리’가 되고 ‘하나’가 되는 것입니다.“라고 하시면서 불교에서 깨달음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계행과 실천의 중요성을 역설하 시면서 지금까지 어려운 환경속에서도 남에 대한 불평과 불만을 한번도 토로하지 않으시면서 실천을 중요시하는 자비의 실천인 보살도를 행하는 살아있 는 부처님이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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