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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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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9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10-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이달의 설법문안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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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5 08:58 조회 2,18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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채우는 일과 비우는 일

우리가 죽음을 두려워하고 무서워하는 것은 생에 집착하고 삶을 소유물처럼 여기기 때문일 것입니다. 생에 대한 집착과 소유의 관념에서 벗어날 수 있다면 엄연한 우주질서 앞에 조금도 두려워 할 것 없을 것 입니다. 새롭게 시작하기 위해 묵은 허물을 벗어버리는 것이니까…

해가 넘어간 뒤 땅거미가 질 때까지 그 저녁놀의 잔영을 나는 지금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그 여리고 순하디 순한 빛깔을! 사람의 마음을 빛깔로 표현할 수 있다면 착하고 어 진 사람들의 마음이 그런 빛깔을 띠고 잊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그 어떤 세월 속에서도 자연의 아름다움은 한결같건만 우리는 이제 그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려고 하지 않습니다. 아름다움을 사랑하려면 고요한 침묵이 따라야 하는데 시끄 러움에 중독된 이 시대의 우리들은 그 침묵을 익히려면 홀로 있는 시간 이 필요합니다. 그러나 홀로 있을 만하면 초라한 자기 모습이 드러날 까 봐서인지 바깥 소리를 찾아 이내 뛰쳐나가버립니다. 침묵을 익히려면 밖으로 쳐다보는 일보다는 안으로 들여 다보는 일을 보다 소중하게 여겨야 합니다.

질보다는 양을 내세우는 오늘 이 땅의 우리들, 그러기 때문에 항상 무엇인가를 채 우려고만 하지 비우려고는 하지 않 습니다. 텅 빈 마음을 갖는 것은 아주 중요한 일입니다. 텅 비워야 메아리가 울리고 새것이 들어찰 수 있 습니다. 온갖 집착과 굳어진 관념에 서 벗어난 텅 빈 마음이 우리들을 가장 투명하고 단순하고 평온하게 만듭니다.

경전에 “ 진리를 배운다는 것은 곧 자기 자신을 배우는 일이다. 자기를 배운다는 것은 자기를 잊어버림이다. 자기를 잊어버림은 자기를 텅 비우는 일, 자기를 텅 비울 때 체험의 세계와 하나가 되어 모든 것 은 비로소 자기가 된다.”

즉 자기 마음을 텅 비울 때 본래 적인 자아, 전체적인 자기를 통째로 드러낼 수 있다는 것. 이것이 또한 자기 존재를 마음껏 전개하는 일입니다.

모든 것이 뒤죽박죽이 되어 사람 이 사람 구실을 하기 어려운 오늘같은 세상에서 우리들이 사람의 자리를 지켜나가려면 하루 한때라도 순 수한 자기 자신을 존재케 하는 새로 운 길들임이 있어야 합니다. 얽히고 설켜 복잡하고 지저분한 생각이 죄 다 사라져 버린 순수의식의 상태, 맑게 갠 날 해가 진 뒤의 그 순하디 순한 놀빛 같은 무심이 , 일 상에 찌든 우리들의 혼을 맑게 씻어 줄 것입니다.

가득가득 채우려고만 하던 생각을 일단 놓아버리고 텅 비울 때, 새로운 눈이 뜨이고 밝은 귀가 열릴 수 있습니다. 사실 우리들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으로 만질 수 있는 영역은 전체에서 볼 때 한 부분에 지나 지 않습니다. 존재의 실상을 인식하려면 눈 에 보이는 부분과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을 두루 살필 수 있어야 합니다. 육지를 바로 보려면 바다도 함 께 보아야 하고 밝은 것을 보려면 어두운 것도 동시에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친구를 바로 이해하려면 그 의 장점뿐 아니라 단점까지도 알고 있어야 합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불성을 지니고 있습니다. 그러니 자기에게 주어진 그 힘을 제대로 쓸 줄을 알 아야 합니다. 그 힘을 바람직한 쪽으로 잘 쓰면 얼마든지 창조하고 형 성하고 향상하면서 삶의 질을 거듭 거듭 높여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똑같은 생명력을 가지고도 한 생각 비뚤어져 잘못 써서 버릇이 되면 그 것이 업력이 되어 마침내는 자기 자 신으로도 어떻게 할 수 없이 끝없는 구렁으로 떨어져 버립니다. 똑같은 생명력이라도 서로 다른 지배를 받 아 한 장미나무에서 한 갈래는 향기 롭고 아름다운 꽃으로 피어나고 다 른 갈래는 독이 밴 가시로 돋아납니다. 도덕성이 결여되었거나 삶의 목 적에 합당치 못한 일은 아무리 그럴 듯한 말로 늘어놓는다 할지라도 올 바른 결과는 가져올 수 없습니다.

사람은 하나하나의 생각과 말과 행동으로 그가 의식을 하건 안 하건 둘레의 대기에 파장을 일으켜 영향을 끼칩니다. 착한 생각과 말과 행동은 착한 파장으로 밝은 영향을 끼 치고, 착하지 못한 생각과 말과 행 동은 또한 착하지 못한 파장으로 어두운 영향을 끼칩니다. 사람은 겉으로는 강한 체 하지만 속으로는 약하고 상처받기 쉬운 그런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이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또한 다른 사람의 상처를 건드려 고 통을 주는 일이 적지 않습니다.

우리는 순간순간 내게 주어진 그 생명력을 값있게 쓰고 있는지, 아니면 부질없이 탕진하고 있는지 되돌아 볼 줄 알아야 합니다. 삶의 양을 따지려면 밤낮없이 채우는 일에만 급급해야겠지만 삶의 질을 생각한 다면 비우는 일에 보다 마음을 써야 할 것입니다.

깊어가는 가을밤, 풀벌레 소리에 귀를 모으면서 오로지 인간이 되기 위해서 생각의 실마리를 풀어 봅시다.

〈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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