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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불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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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47호 발행인 법공 발간일 2003-08-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지상설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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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사홍화 필자소속 백월사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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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04 20:08 조회 1,72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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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주상보시를 실천하는 아름다운 불자가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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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월사 사홍화지수

숲속의 나무들이 초록으로 짙어가고 들판의 여러 가지 야생화들도 제각기의 모습으로 피어나고 있습니다. 자연은 이렇게 스스로 자리한 곳에서 나름대로의 모양을 갖추면 서 꽃도 피우고 향기를 내고 있습니다. 바람이 불면 부는 대로 흔들리고, 비가 오면 순수하게 흠뻑 맞아 주고, 그러다 겨울이 오면 조용히 눈 속에 묻히거나 빈 껍질로라도 훠이훠이 사라져 갑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생명순환의 진리인가?

그러나 우리들은 어떠한 모습으로 살아가고 있는가? 서로를 헐뜯고, 아웅다웅 싸우며, 남이 죽어야 내가 산다는 식입니다. 물론 사회적 동물로서 갈등이 존재할 수밖에 없고 자본주의 체제하에서 생존경쟁 이란 무서운 싸움판이나 마찬가지 이기에 이해가 되지만 여기서 살아 남는 사람은 자기 능력을 믿고 남을 쓰러뜨리고도 의기양양해 집니다. 이토록 우리들은 천박해 가고 있고, 뭇 사람냄새가 없어지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면 부처님께서 지금 시대에 계신다면 어떤 말씀을 하셨을까요? 아마 조직과 사회형편을 개탄하기 보다는 오늘 어려움에 대한 원인을 정확히 알고 새로운 발전을 위한 창 조적 계기로 삼아 이 땅에 불국의 씨앗을 심어가는 불사에 모두가 한 마음이 될 것을 간곡히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여기서 불사라는 것은 바로 가정을 잘 지키고 가족간에 화합하여 일을 처리하는 것을 말합니다. 절에 와서 불공하고 불사하는 것만큼 가정의 화목을 위해 서로가 이해하고 희생하는 마음을 다하는 것도 아주 중요한 불사입니다. 가정은 불국을 이루는 가장 기초적인 도량이므로 가정을 위해 마음을 다하는 것이 곧 불사입니다.

불교는 깨달음의 종교, 실천의 종교라 할 수 있습니다. 중생들이 고통받고 있는 것을 가장 먼저 알고 이들이 고통 속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실질적인 도움을 주는 것이 현 시대를 살아가는데 중요한 종교의 역할이라 할 것입니다.

삶에 밀접한 종교가 되기 위해서는 청정한 마음으로 끊임없이 정진 하는 수행의 길을 걸어야 합니다. 학교는 몇 년 다니면 졸업을 하지만 수행은 따로이 졸업이라는 것이 없 습니다. 매일매일 수행을 해야 하고 모든 일에 수행하는 마음으로 임해야 합니다. 

그것은 바로'육바라밀의 실천이라 할 수 있습니다.

다시말하면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베푼다는 마음이 없이 베푸는 보시, 계율을 잘 지키는 지계, 어려 움과 미혹을 참고 이겨내는 인욕, 부지런히 노력하여 게으름을 없애 며 진실의 도를 끊임없이 실천하는정진, 마음을 청정하게 하는 선정, 어리석음을 벗어날 수 있는 참다운 진리의 눈인 반야바라밀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 중에서 보시바라밀은 가장 쉬우면서 어려운 것이기에 수행의 첫 번째 덕목이 되는 부분입니다.

우리는 조그마한 물건이라도 ‘내 것’이라는 개념이 머릿속에 자리잡고 있습니다. 갓난아이에게 물건을 쥐어 주면 꼬옥 움켜잡는 것처럼 우리 손에 있는 것이라면‘놓아 버리기 힘들어 합니다.  그러나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나눠주는 것, 주었다는 자취도 없이 주는 것을 즐겨하는 사람, 그들이 바로 진정한 불자입니다. 부처님의 교리를 줄줄 외운다고 해서 불자가 아닙니다. 그것은 이름뿐입니다. 행이 따르지 않는 수행이란 있을 수 없습니다. 무주상보시를 몸소 실천하는 사람이 진정 아름다운 불자일 것입니다.

마하살타이신시호품에 나오는 설화가 있습니다.

‘부처님께서 사위국의 기원정사에 계실 때의 일입니다. 하루는 가사를 입고 발우를 지닌 채 아난과 함께 성에 들어가 걸식을 하고 있을 때 어디선가 부처님을 애석하게 부르는 목소리가 들렸습니다.

어떤 노모가 “원컨대 부처님이시여 제 아들의 목숨을 살려주소서!” 그 노모는 두 아들을 두었는데 그들이 남의 재물을 훔치다가 그만 주인에게 들켜 사형에 처하라는 왕의 판 결을 받고 사형장으로 끌려가는 도중에 부처님을 보고 부탁을 한 것입 니다.

부처님은 아난을 왕에게 보내 살려주기를 청하니 왕은 부처님의 청을 듣고 그들을 석방해 주었습니다. 그 형제들은 부처님의 법을 따르는 제자가 되어 아라한에 이르렀습니 다.

이 광경을 보고 아난은 그 형제들 이 중죄를 지었음에도 불구하고 부처님에 의해 석방되고 아라한이 된 것을 궁금하게 생각하고 부처님께 여쭈어 보았습니다.

부처님께서는 “저들은 오늘만 나의 은혜를 입은 것이 아니라 전생에 인연과 은혜를 입은 적이 있느니라. 하시면서 다음과 같이 설하셨다. ‘

“한달에 천 번씩 제사를 드려 죽을 때까지 그치지 않는다 해도 잠깐 동안이나마 한 마음으로 바른 법 생각하는 것만 못하느니 한 생각 사이 짓는 그 복은 죽을 때까지 제사 지 내는것보다.나으리”

비록 백 년 동안 신을 받들어 섬기더라도 잠깐 동안이나마 부처님과 법과 스승을 공양하는 것만 못하느니 한 번 공양으로 짓는 그 복은 백 년 동안 신을 받드는 것보다 나 으리.“

부처님께서는 중생들이 굶주리고 있으면 그들에게 음식을 공양하고 목숨을 잇게하고, 병들고 고통받고 있으면 그들을 보살피고 공양하며 편안하게 하고, 가난하고 고독한 자 가 있으면 그들과 함께 공양하고 보호하며, 청정하게 수행하는 이가 있으면 그를 위해 옷과 법을 공양하고 외호하라고 하셨습니다.

이렇게 부처님께서는 탄생에서 열반에 이르기까지 당신의 전생애 를 통해 삶에 허덕이는 중생들을 외면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불자들도 부처님께서 그러 하셨듯이 남에게 필요한 모습으로 새롭게 거듭나야 할 것입니다. 굶주린 사람에게는 양식이 되어주고 병든 사람에게는 간병인이 되어주고 나태한 사람에게는 경책을 하는 불교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아낌없이 주는 보시, 그것이 참다운 보시일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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