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력이라는 질병 그리고 국가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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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57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07-01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선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5 08:25 조회 2,205회본문
이라크 저항세력에 의해 납치 살해된고 김선일씨 문제로 지금 우리 사회는 홍역을 치르고 있다. 이제라도 추가파병 결정을 철회해야 한다는 의견과 고인에 대한 복수와 국가의 체면유지를 위해서라도 더욱 강력한 전투병을 보내 테러분자들을 응징해야 한다는 의견이 정면으로 충돌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의견대립의 이면에는 미국이 일으킨 이라크 전쟁에 대한 각기 다른 평가가 있다. 명분 없는 침략전쟁이라는 평가가 있는가 하면 반인륜적 범죄인 테러를 뿌리 뽑기 위한 불가피한 전쟁이라는 평가가 날카롭게 대립하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이번 테러사건은 우리국민이 국제테러단체에 의해서 최초로 희생된 사건이기도 하려니와 워낙 최악 의 상황에서 고인이 운명을 달리한 점, 그리고 국익이라는 명분 앞에 한 자연인의 생명권이 전혀 존중받지 못했다는 점에서 우리에게 많은 고민거리를 던져주고 있다. 그렇다면 인류역사상 가장 반 폭력적이고 평화적인 종교인 불교를 신행하고 있다고 자처하는 우리 불자들은 이 시점에서 폭력에 대해 무엇인가 나름대로 깊이 성찰해보아야 하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불교적인 관점에서 보면 우리자신들은 분명 불완전하고 미숙한 존재자들이다. 선험적으로 근본 무명에 휩싸여있기에 탐욕과 분노라는 선천적인 질환을 앓고 있으며 그 결과 폭력적인 생각과 말과 행동이라는 증상을 보이고 있다. 잠시만이라도 솔직한 마음으로 되돌아본다면 우리의 생활 속에 폭력이라는 만성적 난치병이 엄존하고 있다는 사실을 누구나 알 수 있게 된다.
개개인의 사소한 폭력에서부터 애국이라는 타이틀로 미화된 국가간 의 전쟁과 같은 대규모의 극단적인 폭력에 이르기 까지 너무도 많은 폭력적인 요소가 우리 가까이 상존하고 있고, 그래서 정말 충격적인 사건으로 상처받기 전에는 우리 대부분이 폭력 불감증에 걸려 대충 얼 버무리며 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성싶다. 즉 우리에게 폭력은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너무나도 익숙한 그 무엇인 셈이다. 그렇다고 절망스럽기만 한 것은 아니다. 우리는 선험적으로 그 질병을 이겨낼 수 있는 높은 수준의 지성도 함께 가지고 태어났다. 그리고 ‘누구라도 지혜의 힘을 길러 근본무명을 없애면 열반에 들어 전혀 다른 차원의 존재로 승화될 수 있다’는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근본적인 해결책이 제시되어있기 때문이다. 다만 우리의 실존적 한계 때문에 그 길을 충실히 따라가 뜻을 이루기가 쉽지 않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 김선일씨 사건을 계기로 그동안 우리의 건전한 지성을 너무나도 쉽게 마비시켜온 소위〈국가〉라는 것의 존재가치와 그 한계 에 대해서 이제 우리도 진지하게 고민해 보아야할 때가 되었다고 본다. 국가라는 이름으로 저질러진 인류의 수많은 역사적 과오를 굳이 거론할 필요도 없이 우리에게는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국가주의의 망령 앞에 개인의 자유와 인권이 유린당하던 뼈아픈 상처가 생생히 남아있으며, 이번에는 국가의 정책 때문에 그 정책결정과는 무관한 국민 이 살해당하는 비참한 사건이 발생하고 말았기 때문이다.
더욱이 그를 납치 살해한자들도 단순한 강도나 정신병자들이 아니라 자신들의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 걸고 싸우는 전사들이라고 자 처하는 집단이 아니던가? 그리고 우리에게도 일제식민통치시절 독립 을 위해 목숨을 바친 민족의 영웅들이 있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는 삶과 죽음의 문제만큼이나 풀기 어려운 국가주의라는 난제에 부딪치게 된다. 해결책이 아득해 보이지만 불교의 근본정신으로 돌아가 깊이 생각해보면 세상에 정당한 폭력은 없다는 그래서 모든 폭력을 거부하는 것이 불자의 올바른 마음가짐이라는 오히려 단순 명료한 결론 에 이른다.
그러나 상대적인 수많은 관계로 엮여있는 현실생활 속에서는 어떤 종류의 폭력들은 어쩔 수 없이 인정되어야하는 것들도 있다. 일명 정당한 폭력인 것이다. 그래야 사회의 기본적인 안녕과 질서를 유지할 수 있기에 사회의 구성원들은 일정정도의 자유를 유보해야만 하고 그 기본 틀을 존속 유지시키는 것이 바로 국가라는 추상물이 존재하는 기본적인 이유인 것이다.
즉 국가는 공동의 선을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며 오직 그 목적에 부합하는 일을 충실히 수행하는 때라야만 국가의 이름으로 강요되는 폭 력이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다. 그런데 불행히도 국가를 운영하는 주체는 합리적인 이성만으로 단련된 사람이 아니다. 그래서 역사가 증명하듯이 국가를 위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수많은 억압과 살생이 끊 이질 않았다. 그렇다면 우리가 그 모순과 불행의 고통으로부터 조금이라도 자유로워지는 방법은 국가라는 공룡이 공동의 선을 위해서만 존재해야한다는 본래의 목적으로 돌아가 그 의무를 충실히 이행하도록 통제하는 방법밖에는 없어 보인다.
그리고 그 통제력은 국가를 이루고 사는 구성원들의 지성적인 판단 능력에 비례할 수밖에 없다. 물론 필자는 국가와 폭력에 대한 긴 담론 을 풀어가려는 의도로 이런 말을 꺼내는 것이 아니다. 그럴만한 지면상의 여유도 없을 뿐 아니라 준비된 전문적인 식견도 없다. 다만 나 자신이 느끼고 있는 큰 혼돈과 안타까움을 공유하고 싶다는 소박한 바램이 있을 뿐이다. 살고 싶다는 한 젊은이의 절규와 군사적 경제적 이익을 위해 그 생명을 포기할 수밖에 없다고 판단한 권력담당자들의 결단 사이에서 이 땅에 살고 있는 건전한 양식을 가진 수많은 사람들의 고민이 깊을 수밖에 없다.
〈김선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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