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을 이해한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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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0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4-10-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선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6 04:46 조회 1,970회본문
끊임없이 이야기를 하는 그를 바라보았다. 언제 나 그는 그가 하고 싶은 말을 많이도 한다. 상대의 관심여부는 별반 신경 쓰이지 않는지 자신이 하고 싶은 말을 다해야 이야기는 끝이 나는 듯 했다.
처음에 나는 별 관심도 없는 이야기를 듣는 것이 괴로웠다. 그래서 이야기를 중단시키는 적절한 제스추어를 사용하거나 다른 이야기를 유도했다. 나중에는 그것도 귀찮아 최소한의 응대로 이야기의 시간을 단축시켰다. 그리고 속으로는 ‘쓸데없는 것에 저렇게 시간을 소비하다니... !’하며 한심 하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가 다른 사람에게 쉼 없이 이야기하는 모습을 보았다. 그 때 문득 ‘외롭구 나! 외로워서 저러는 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마음에서 측은지심이 생겨났다. ‘그래, 조금 더 잘 들어주자....’ ,
얼마 전 나는 미얀마의 우 조디카 스님의 책을 두어권 읽었다. 스님은 책에서 끊임없이 ‘자신을 있는 그대로 잘 바라보는 것, 즉 늘상 변화하는 마음을 잘 바라보고 그것이 본질이 아님을 이해 하는 것’에 대해 말씀하셨다.나는 그 때 내가 그저 마음을 바라보는 것, 잠 시 마음작용에 끌려 다니지 않으려고 하는 생각 만으로도 내 속에 평화가 일어나는 것을 새삼 느 꼈다.
사실, 나는 요즘 남편과 사이가 더욱 좋아진 것 이 이런 나의 ‘마음바라보기’에 대한 작은 생각 과 남편의 수행 덕분이라고 여긴다. 남편은 자신을 해봐부는 명상수행을 하는데 수행이 깊어질수록 더욱 맑아지고 부드러워졌다.
그리고 그런 모습은 그렇게 되고 싶다는 의지 작용이라기보다는 그렇게 우러나오는 것으로 보 여 진다. 자신을 잘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결국 상대를 잘 이해하는 것과도 연결되는 모양이다.
우리는 누구나 이해받고 싶어 하고 사랑받고 싶어 한다. 그래서 끊임없이 자신을 이야기하고 표현한다. 하지만 정작 자기 자신에 대한 깊은 이해 없이, 자신에 대한 진정한 열린 사랑 없이, 다 른 사람을 이해하고 사랑한다는 일이 가능한 일 일까? 어쩜 우리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 진실로 이해하지 못하여 답답하기에 외부에서 사랑과 이해를 갈구하는 것은 아닐까? 자기 자신을 잘 이 해하는 일이야 말로 다른 사람을 사랑할 수 있는 첫 시작이 아닐까?
물론 나 자신을 깊이 이해한다는 것은 말처럼 단순하지도 쉽지도 않다. 몇 겹인지 가늠조차 되 지 않는 가슴속의 마음을 기울여서 예리하게 관 찰하는 것은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조금 이라도 결실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것 밖 는 달리 방법이 없어 보인다. 마음 기울여서 대상을 지켜보는 싸띠 수행 법은 단지 일상의 흐트러진 마음을 가지런하게 정돈하는 차원에서부터 존재의 본질을 직관하는 차원까지 그 쓰임이 방대하다. 그리고 사실상 불 교수행의 핵심이기도 하다. 일단 싸띠가 잘 되어 야 깊은 집중에 들어갈 수 있고, 싸띠가 잘 되어야 높은 통찰지혜를 얻어 번뇌를 끊고 니르바나로 향할 수 있기 때문이다.
굳이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는 열반이 아니더라 도 고난의 질곡에 빠져있는 우리 실존의 현주소 를 살펴서 일상의 고통지수를 조금이라도 낮출 수만 있다면 싸띠수행은 충분한 가치가 있어 보인다.
혼돈과 권태를 피해 끊임없이 밖으로 내 달리 는 마음이라는 놈의 속성을 이해하지 않고는 타 인과의 진정한 교감이란 힘든 일로 보이기 때문 이다.
끊임없이 새로운 대상을 찾아 내달리는 마음을 잠시 가라앉히고 들여다보면 마음은 순간 방향을잃고 주춤거린다. 그리고는 수많은 마음작용들이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선천적으로 타고난 통찰력 이 자기 스스로를 지켜보는 것이다.
내 마음속에 저런 것들이 있었구나! 그제서야 마음속에서 미약하나마 지혜가 생긴다. 그리고 마 음은 스스로 겸손해진다. 나 자신을 비추어 타인을 바라볼 수 있는 눈이 열리는 것이다. 그러면 마음은 크 순간 무거운'번뇌의 질량을 조금 덜휴 1 내고 그 만큼 더 가벼워진다. 그것은 강요된 미덕 이 아니라 스스로의 마음작용으로 일으키는 선의 인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니르바나에 한발 다가서 는 것이다.
아무리 그럴싸한 말과 감정으로 얼버무린다 하 더라도 사람들 사이에는 각자를 분리시키는 에고 의 두터운 성벽이 엄존하고 그 성벽들 사이에는 깊이와 넓이를 가늠하기 힘든 강물이 흐르고 있는 것이 우리의 현실이다.
그 검푸른 강물을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두려움 과 절망이 앞선다. 눈을 감고 생각해보자. 우리가 인간의 몸으로 세상에 온 이후로 자아의식이라는 성밖으로 한 걸음 이라도 나가본 적이 있을까? 저 강물을 건너 다른 성문을 열고 들어가 진실로 관계를 맺은 적이 있을까? 만약 누군가 자신의 내적 체험 속에서 에고의 성벽을 허물었다면 그는 이미 중생이아니라 성자의 반열에 오른 사람 일 것이다.
〈김선미/인드라망생명공동체 총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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