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 앞 단식농성을 생각하며
페이지 정보
호수 63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1-01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아제아제 바라아제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선미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총무국장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7 17:47 조회 2,101회본문
벌써 한 해를 갈무리해야하는 때가되었다. 그동안 지나치게 포근한 날씨 때문에 겨울을 실감하지 못하고 지냈는데 지금이 겨울임을 새삼 확인 시켜주기라도 하듯 며칠 사이 기온이 뚝 떨어졌다. 그렇지 않아도 연말이라 이것저것 챙길 것들 이 많아서 마음이 분주한데 국가보안법 폐지를 위해 이 추운날씨에 국회 앞 천막에서 단식농성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생각하니 내 마음 한구석이 더 무거워진다. 단체에서 맡고 있는 소임상 일년 중 가장 일감이 많은 요즘은 내 몸 하나를 추스르기도 힘들 지경이어서 하루라도 동참하고 싶다는 생각은 그저 막연한 의무감으로 마음속을 떠돌 뿐이다. 편치 못한 잠자리는 악몽의 연속이다. 꿈속에서 나는 흐릿한 대상을 향해 소리 지른다. ‘고문을 정당화하는 그 어떤 것도 허용해선 안돼 ! 이 세상에서 생명존중보다 더 소중한 명분은 있을 수 없어 !’ 그러나 상대는 말이 없다. 그러다가 어둠 저편으로 사라져 버린다. 그를 붙잡아 두려고 애써보지만 사실은 신음소리를 내고 있을 뿐이다.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우고 그때서야 현실로 돌아온다.
나이가 들수록 실감나는 게 하나있다. 사람은 누구나 각자가 정한 크기의 무게만을 짊어지고 가뿐하게 세상을 살아가고 싶을 것이지만 우리의 삶이 그렇게 만만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애초에 혼자서는 아무도 이 세상에 올 수 없었듯이 세상 어디에도 제멋대로 하면서 살아갈 공간은 없다. 운명은 늘 이런저런 밧줄로 자유의 날개를 옭아매고 만다. 하나의 사실을 놓고 전혀 다른 해 석을 하는 사람과 마주하는 것은 분노와 혼돈속 으로 후리를 추락시킨다. 이 땅이 독재의 마법에 서 치유롭지 못했던 시절 가슴속에서 터져 나오는 증오심을 쓰디쓴 소주로 겨우 달래가며 그래도 역사의 바퀴는 구른다는 말을 진통제처럼 되 뇌이던 청춘시절을 기억해본다. 이제, 그때의 믿 음은 사실임이 확인되었다. 이십년의 시간이 흐르 는 사이 우리사회는 분명히 독재의 시대를 청산하고 민주주의적인 정치질서를 누구도 거부할 수 없는 사실의 수준으로 정착시켰다. 그러나 그와 비례해서 나의 삶이 행복해졌는지를 살펴보면 대답은 부정적이다. 나의 욕망은 저만치 앞서가는데 현실은 더디기만 하고 시간이 흘러감에 따라 또 다른 사회문제와 인간문제들이 끊임없이 줄을 이어 생겨났다. 오히려 마음이 맑은 날 보다는 흐린 날이 많다. 실존의 무게감은 날이 갈수록 더 크게 마음을 짓누른다. 희망은 멀게만 느껴지고 현실은차갑게만 느껴진다. 그렇다고 달아날 공간이 있는 것도 아니다. 삶으로부터 궁극적인 도피란.애초에 구조적으로 불가능한 일이기에 각자에게 주어진 삶의 시간을 어떤 식으로든지 견뎌내야만 한다. 이것이 요즘 내가 생각하는 삶의 현주소다. 그래서 인간세상 속에서는 절대적 행복을 구할 수없다는 부처님의 가르침이 구구절절이 가슴을 파고든다. 우리자신을 이루고 있는 오온 자체가 괴로움이라는 사실을 자신의 경험 속에서 느껴보라던 성인의 가르침이 헛되지 않음을 비로소 얼핏 깨 닫는다.
한 사회의 제도와 법이 그 사회의 구성원들에 게 미치는 영향력은 지대하다. 그래서 사회제도를 바꾸는 것이 삶의 질을 높이기 위해서 선행되어야 하는 절대적인 조건으로 생각되었던 시절이 있었다. 부정의하고 부조리한 자들을 향한 분노가 나의 결백을 보증이라도 하듯 그들과 같은 하늘아래 숨쉬고 있다 는 사실조차도 혐오스러웠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이 제는 우리의 삶에 는 제도와 법으로는 담아낼 수 없는 엄청난 공백이 있 I 음을 안다. 젊은절 그토록 열망했던 사회적 정의가 거대한 존재의 소용돌이 속에서는 조그만 충격에도 부서져 내리는 옥구슬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을 안다. 그리고 당장 내 눈앞에서 내가 바라는 정의의 모습을 구현하고자함이 얼마나 조급한 꿈에 불과한지도 안다. 그렇다고 고귀한 가치의 추구를 포기 하고자함이 아니다. 가치의 끈을 놓는 순간 정신 적인 진화는 중단되고 우리는 인간의 형상을 한 축생의 세계로 추락하고 만다. 그래서 나는, 내가옳다고 생각하는 가치를 공유하지 못하는 상대에 대해 분노와 증오 대신 덤덤하게 인내하는 힘을 기르고자 한다. 나의 가치를 주장하되 스스로 분노의 고통을 증폭시키지는 않으려고 한다. 이것은 사회적 부정의의 개선을 요구하되 동시에 내 발 밑에 흐르는 무지와 욕망과 편협함의 문제도 보고자 함이다.
부처님께서는 인간이 개발해야 할 가장 고귀한 심성으로 사무량심을 가르치셨다. 증오심을 다스리는 데는 자애심을, 인색함을 다스리는 데는 동 정심을, 시기와 질투를 다스리는 데는 함께 기뻐 하는 마음을, 들뜨고 흥분되는 마음을 다스리는 데는 평정한 마음을 개발하여 탐욕과 분노라는강을 건너야한다는 처방전을 주신 것이다. 나의 형편없는 내공으로는 모두 감당하기 힘든 것들이 지만 개미걸음으로라도 조금씩 개발해나가는 것 외에는 아무리 생각해보아도 다른 묘책이 없어 보인다.
〈김선미/인드라망 생명공동체 총무국장〉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