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속의 불교 (방글라데시 불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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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66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04-01 신문면수 7면 카테고리 세계속의 불교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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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18 11:04 조회 2,061회본문
인터넷을 통해 세계속의 불교가 어떻게 성장, 발전하고 있는가를 알아본다
〈편집자주〉
2004년 방글라데시 인구는 약 1억2천5백만명으로 치타공, 치타공 힐 트랙, 코밀라, 콕스 바즈라와 바리살에 1백만명의 불교인구가 거주하고 있다.
방글라데시 불교는 점차적으로 통합되고 있지만 오스틱, 티 베토-버어만, 드라비얀, 아리안의 종파가 존재하고 있다.
역사가들에 의하면 티베토-버어만은 프유, 칸얀, 테트의 3가지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다. 카크만 종족은 치타공 힐 트랙의 역사적인 장소에서 생활하고 있다. 칸얀족은 치타공의 남동쪽에 살고 있는 락힌그룹으로 알려져 있다. 일반적으로 브루나 불교로 알려져 있는 방글라데시 불교인들은 아라칸데스시대 부터 5000년동안 살고 있었던 고대인들로부터 전해졌다.
팔리 문학에 의하면 그들은 마즈히즈마데시 혹은 마드흐야 데시로 알려진 아리얀지방과 아르야바르타에서 거주하고 있었던 것으로 주장되고 있다.
부처님은 86 6세기 라바티강의 남동쪽, 사타카니카의 남쪽, 투노의 브라흐만의 서쪽, 우시라트하자 산의 북쪽에 위치한 마하살시의 아래지역인 카장갈의 동쪽의 중앙지역이나 마즈히마 데시에서 불교를 설법하였다.
부처님께서는 불교를 포교하기 위해 이 지역들을 걸어서 다녔으며. 불자들은 부처님을 전지전능한 분으로 믿고 있었다.
또한 부처님은 세계의 평화를 위해 선을 베푸는 자비의 눈으로 바라보셨으며, 항상 모든 사물들에게 동정심을 가지고 계셨다. 부처님이 가시는 곳마다 불교는 성장하였다. 드한야와디 역사가는 ‘마하 마르트 무니로 알려진 부처님의 불상에서 현재의 부처님 불상이 만들어졌다.’고 주장한다.
마우리스 콜리스는 “위대한 얼굴의 땅”이란 저서에서 이러한 부처님 상은 1784년 프하마'’청-복차에 의해서 만다히야나로운반되었다고 한다. 앙구타라니 카야와 마지 히마니카야에 의하면 부처님은 카장갈로 와서 추종자들에게 두가자 설법을 하셨다. 그러나 부처님 이 그의 생애동안 방글라데시로 와서 설법을 하셨다는 기록은 존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부처님의 생애동안 불교가 방글라데시로 불교의 영 향력이 미쳤으며 부처님으로부터 설법을 들었던 한 두 스님이 벵갈로 와서 설교를 하였기 때문이라고 추측되고 있다.
불교가 마우리얀 황제 아소카왕의 시기에 방글라데시에 전 파되었다는 정확한 증거는 존재하지 않는다.
역사에 의하면 파타리푸트라에서 3번의 불교집회가 결성된 후 소낙과 우타라는 남동지역을 방문하여 불교를 전파하였다.
최근 인도에서 온 불교학자에 의하면 드하카지역 담라이 지역에 하나의 아소칸의 지주가 발견되었다고 한다. 상치에서 발견된 펀드라바르드한 선물로 기록된 보티브 비문과 같은 한 두 개의 증거가 존재하는데 이러한 증거로 미루어 보아 기원 전에 방글라데시에 불교가 전파되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방글라데시에서 불교의 성장은 굽타왕조의 초기로 불교는 기원전에 방글라데시의 여러 곳에서 성장하였음을 추측할 수 있다. 그 시기에는 대승불교가 신봉되었다.
파헨은 갠지즈강의 남쪽지역의 참타왕조에 대한 여정에서 대부분 대승불교가 존재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7세기에 인도 를 순례한 중국의 히우엔 트상스님은 벵갈의 북서쪽인 고우다 지역의 사상카왕은 불교를 혹독하게 박해했으며 방글라데시에는 대승불교가 전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7세기에서 12세기까지 대승교단은 방글라데시에서 황금기였다. 파하르퍼, 자갈다, 비크람퍼, 파티거라하지역에서는 큰 불교사원이 세워졌으며, 스리 티판파 아티쉬, 쉴라바트라 산티락 시트와 같은 불교학자가 방글라데시에서 나타났으며, 그들의 연구 논문은 대승불교와 탄트리즘을 포함하고 있다. 탄트라 불교는 부처님의 근본교리를 망각하고 있다. 그들은불교의 기초교리를 상실하였으며 승가단체의 스님들도 5기지 금지종목인 물고기, 육식, 성교, 춤, 돈에 집착을 가지기도 하였다. 방글라데시에서 불교의 쇠퇴기를 보이자마자 많은 스님과 신도들은 이러한 상황들을 개혁하고자 하였다.
15세기에는 왕가출신인 차카리타의 케약쿠는 버어마 모울메 인을 방문하여 샤르브 스님으로부터 찬드라요티 브힉쿠의 불명을 받고 스님의 계를 수지하였으며, 20년동안 버어마에 머물 면서 경전을 연구하였다.
그는 치타공에 돌아와 시타쿤다 등지에서 아스람을 설립하 였으며, 소승불교를 전파하였으나 방글라데시에서 전통적인 불 교교단을 설립하는데 실패했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소승불교에 대해 생소하게 생각하였다. 바르우아박사는 19세기동안 남 인도와 치타공, 티페라, 락삼, 코밀라지역에는 소승불교가 존재하지 않았으며 그 당시에 그 지역에는 힌두교와 다양한 제사의식인 탄트라가 신봉되었다.
탄트라는 점차적으로 칼라차크라, 브자르야나 , 사하야자나의 세가지로 분류되었다.
사하자야는 유명한 나트 컬트, 바울스, 아바두트에서 성장한 시바이트와 바이스나바이트와 같은 흰두교의 제사의식과 일맥 상통한다.
결과적으로 불교 스님들은 파티목카하 규범을 지키지 않았으며, 신도들은 불교의 사상을 상실하였다. 그들은 두르카, 락스미, 마나사, 사라스와티, 카르티마와 많은 다른 신과 여신들 을 신앙하가 시작하였으며, 불교 전통과 전혀 관련이 없는 의식을 사용하였다.
많은 불자들은 그 당시 방글라데시에 존재한 타락한 수행의 식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다 특히 케인가 브히후 스님은 아라칸의 고대 수도인 무로항을 방문하여 큰 사원에 설치된 마하 무니 불상을 보았으며, 그 불상을 아주 상세하게 본 뜬 모조품을 가지고 와서 아라칸의 조각가들 도움으로 마하무니 불상을 조각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는 불교승가를 조직하는데 실패하였다.
판난사르 마하츠하비르 스님은 버어마로 가서 불교 조각을 공부하였으며, 고향으로 돌아와 방글라데시의 타락한 불교를 바로잡으려 하였으나 실패하여 그는 절망된 상태로 방글라데 시에서 머물렀다.
방글라데시 사람들은 불교의 미래에 대해 걱정하였다. 브히 쿠 찬드라모한과 라드후 마테와 같은 사람들은 이러한 방글라데시의 불교를 어떻게 개혁할 것인가를 고민하였다.
이러한 비관적인 상황에서도 아라칸의 사라메디 마하츠하비 르는 인도를 순례하여 아라칸스와 산스크르트어, 팔리어에 능통한 라드후 마테라는 스님을 만나 상하라자 마하츠하비르 스 님과 방글라데시에서 불교의 발전에 대해 논의하여 그들과 함께 방글라데시를 방문하였다. 그 당시 차크마 왕조는 영국 정부의 신탁지역에 있었으며 통치자는 칸린티 여왕이었다.
그녀는 상하라즈 사라메드하 마하츠비르 스님을 방글라데시 에 초청하였다, 1864년에는 치탕공으로 가서 수행력이 뛰어난 사람들을 모시고 사람들에게 설교하였다. 특히 “마하무니 페 어”의 행사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였으며, 치타공의 새로운 일곱 스님들에게 계를 주었다. 이러한 행사는 소승불교가 전래된 이래 치타공에서 처음으 로 역사적인 우파삼파다의 의식이 되었다.
아라칸의 고대왕들은 특별한 표시와 형태를 지닌 브히크후 스를 신봉하기 시작하였다. 사라메드하 스님은 또한 영국 정부로부터 위대한 인물로 존경을 받았다. 그는 “상하라즈”로 널리 알려졌으며, 그의 추종자들은 “상하라자 나카야”로 널리 알려진 소승불교 기구를 설립하였다.
<자료출처 : http://www.buddhanet/e-learning/ buddhistworld/southeast.htm 번역/ 김용주/ 총지종보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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