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군이 되어 광복을 이루겠다는 꿈을 잠시 접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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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1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6-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기획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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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6-08 14:17 조회 1,962회본문
독립군이 되어 광복을 이루겠다는 꿈을 잠시 접다
독립단 임원 출신 아버지, 가족에 대한 압박과 감시 깊어져
오직 평안한 날 이어지기를 기대하며 밀양 백산으로 귀국
부친은 석방 이후 환인현에서의 생활이 어려워지자 더 북쪽인 유하현으로 옮겼다. 유하현 삼원보는 밀양 출신의 윤세용, 윤세복 형제뿐 아니라 이회영 선생이 활동하던 본거지였다. 망명객들의 자치단체 경학사經學社와 신흥무관학교가 삼원보에 있었다. 경학사는 곳곳에 소학교를 세워 망명자의 자녀를 교육하고, 학교를 졸업한 이들은 자연스럽게 신흥무관학교로 진학하여 독립군이 되는 추세였다.
1920년 8월 2일자 동아일보에 실린 기사는 당시 사정을 이렇게 전한다. ‘봉천성 삼원보에 한민족의 자치국奉天省三源堡에 韓民族의 自治國’이란 기사이다.
“사면에 푸른 산과 맑은 물이 흐르는 곳에 오년 이래 이천호의 조선민족이 모여 한족회가 다스리며 소·중학교의 교육까지, 완연히 하나의 작은 한나라를 일궜다.”
기사 내용은 삼원보 일대가 조선인의 작은 나라가 됐다는 것으로, 이미 그곳에 행정과 경제 등의 기본 체제와 기반 시설을 갖추고 일제에 맞서 자치를 이루고 있다는 내용이다. 한동안 편한 듯했으나 이곳 또한 일본군의 진격과 감시로 위태로운 상황이 되었다. 독립단 임원 출신이라 대성사 가족에 대한 압박과 감시는 더욱 깊어졌다.
대성사의 모친은 생전에 당신이 겪었던 고난의 세월을 자주 말하곤 했다.
“나라를 잃은 국치도 겪었고, 만주 땅에서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습도 보았다. 더할 나위 없이 어려운 세월을 견뎌야했다. 주변에서 도우러 나설 수도 없을 정도로 압박과 감시가 깊었던 시절도 있었다. 그렇다 해도 못 버틸 어려움은 아니었다. 반드시 조선이 독립된다는 의지가 있었기 때문이다.”
만주에서 일가족은 다시 길을 떠났으니, 일제의 눈길이 미치지 못하는 내몽골로 떠났다. 만주에서 무장투쟁을 하던 독립군의 식솔 일부가 내몽골로 떠나는 길에 함께 나선 것이다.
대성사는 당시 내몽골의 사정을 종종 회고했는데, 그때까지 겪었던 어려움은 전초전에 불과했다고 한다. 지붕과 담이라도 있던 만주의 집과 달리 일본군을 피해 온 내몽골에는 허허벌판 눈 닿는 곳이라고는 가없는 초원뿐이었다. 그 가릴 곳 없는 대지에 파오라고 하는 몽골식 천막을 치고 살았는데, 생전 처음 쳐보는 천막이라 제대로 땅에 고정될 리가 없었다. 대성사는 그때의 어려움을 이렇게 회고했다.
“바람이 불면 날아갈 것 같고, 어쩌다 비가 내리면 천막이 무너져 내렸다. 천막이 찢어지면 짐승들도 들고 나기를 한 데와 다를 바 없었다. 또 바람이 불면 천막 대부분이 찢어졌다. 남들은 그럭저럭 천막을 치고 버텼는데, 생전 천막이라고는 구경조차 하지 못해 번번이 실패했고, 나중에는 남아나질 않아서 버틸 도리가 없었다.”
도저히 견디고 버틸 수 없는 지경이 되자 대성사의 가족은 결단을 내린다.
“어떤 어려움도 이곳에서 버티려 했는데, 이제는 도리가 없다. 나는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려 한다. 그곳에서 후일을 도모하고 가족의 안녕이라도 도모해야겠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부친의 비장한 이야기에 누구도 다른 이야기를 할 수 없었다. 대성사 형제는 이곳에서 때를 기다리다가 독립군이 되어 일본군과 싸워 조국 광복을 자신의 손으로 이루겠다는 꿈을 잠시 접어야 했다. 대성사는 만주땅으로 반드시 돌아오겠다고 마음먹었다.
일제 치하를 피해 독립을 위해 싸우기로 작심하고 망명길을 나섰었는데, 이제 만주 일대도 일제 치하에 놓일 지경이 됐으니 차라리 고향으로 돌아가기로 한 것이다. 처음 망명길을 나설 때는 네 식구였으나 서간도 땅에서 대성사 밑으로 여동생 둘이 더 태어나 이제는 모두 여섯 식구가 됐다. 고향을 떠날 때는 재산을 처분하여 넉넉하였다. 하지만 그 재산을 독립을 위해 바치고 곡절을 겪으면서 가세는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함께 끌려가 고초를 겪은 큰아들의 건강도 회복되지 않았다. 수중엔 여비 한 닢 남아 있지 않았다.
고향으로 돌아가겠다는 결심을 한 후 주변 사람들이 대성사 가족을 위해 백방으로 나섰다. 서만주 땅에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바쳐 동포와 독립을 위해 헌신한 모습을 생생히 보아서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돈이 있는 이들은 돈 한 푼을 보태고, 그마저 없는 이들은 옥수수라도 한 됫박을 더해 귀국 채비를 도왔다.
귀국길은 힘겨웠다. 망명길은 조국 독립의 꿈을 갖고 기꺼이 고난의 투쟁에 발을 딛은 것이었으나 돌아가는 길은 그 꿈을 미루고 현실을 받아들이기로 한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도 대성사 부모는 의젓하게 자란 자식들을 보며 미래를 믿기로 했다. 1922년경의 일이다.
대성사 가족이 다시 돌아온 곳은 밀양읍에서 남쪽으로 낙동강변에 자리 잡은 하남면 백산리라는 곳이다. 밀양강이 완만히 흐르다가 낙동강과 합쳐지고, 인근의 삼랑진과 진영에서 더 나아가 김해와 부산으로 이어지는, 교통과 물자가 오가는 상업의 요지이다. 백산은 영남 일대에서 가장 넓고 비옥한 진영평야의 중심에 있다. 장터는 활발하고 인근 삼랑진, 마산, 창원, 진해, 김해와 부산에서까지 장꾼들이 몰려와 늘 활기차고 풍요로운 마을이다. 대성사 가족은 외가에서 장만해준 백산리 676번지에 머물게 된다. 집터는 넓었으며 하남의 중심지에 자리하고 있었다. 남쪽으로 낙동강이 흐르고 동쪽 편에는 밀양강이 흘렀다. 집에서 잠깐 걸어 나가면 낙동강이 보이고, 강 건너 진영쪽 모래톱이 섬을 이루고 있는 평화로운 풍광과 만나게 된다. 모든 일은 순조롭고 살림은 풍족하며 오직 평안한 날이 이어지기를 기대했다.
어느 날 부친이 대성사를 불렀다.
“집안일을 돕는 것도 좋으나 이젠 학교에 갈 때가 됐다.”
“일본인이 세운 학교에서 그들로부터 배울 수 없습니다.”
“대구에 지사들이 뜻을 모아 학교를 세웠단다. 그러니 일본인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배울 수 있게 됐다. 너도 그곳에서 공부할 준비를 하거라.”
서간도 유하현에서 소학교를 마친 후 마땅히 배움을 계속할 기회가 없었다. 백산으로 돌아와서도 왜인들의 학교에 갈수 없어 집안에서 고서를 읽거나 지인들로부터 책을 구해 읽는 일로 지식에 대한 갈증을 풀 수밖에 없었다. 대체로 밀양 일대의 책이란 책은 모두 읽었다고 전한다. 당시 한학 서적과 불경은 물론이고 활자가 찍힌 책이라면 무엇이건 구해 읽던 시절이다.
그런 차에 진학할 수 있다는 소식은 대성사에게 새로운 세상으로 나가는 길목이 됐다. 대성사 부친은 ‘사람은 마땅히 배워야 하고 배움을 통해 자신의 쓸모를 깨닫게 된다’는 지론이 있었다.
하남면 백산의 1930년대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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