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수행과 불공으로 자신의 업을 닦고 타인을 위해 복을 지어주며 자신의 자성불을 밝히자

페이지 정보

호수 27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0-01 신문면수 5면 카테고리 설법 서브카테고리 -

페이지 정보

필자명 - 필자법명 남혜 필자소속 - 필자호칭 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0-11 15:47 조회 1,730회

본문

수행과 불공으로 자신의 업을 닦고 타인을 위해 복을 지어주며 자신의 자성불을 밝히자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위해서 불공 잘 해드릴께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이 글은 내가 직접 겪은 당체법문의 사례이자 나의 처절한 반성문이다. 


 승직자가 되기 위해 2년 3개월의 시무생활을 했던 나는 드디어 총기 45년(2016년) 10월 괴산 수련원 중원사에서 진행되는 추계강공회에서 승직계를 받게 되었다. 승직이 된다는 것은 부처님의 제자가 된다는 것이다. 부처님의 제자로서 승직계를 받기 전에 부처님에게 인사를 드리는 것이 제자가 된 도리라 생각되어 추계강공이 열리기 며칠 전에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설악산 봉정암에 올라가 부처님에게 불공을 드리기로 했다.


 새벽에 총지사에서 출발하여 설악산 백담사 입구에서 봉정암까지 등반을 시작하여 늦은 오후 무렵 봉정암에 도착하여 숙소 배정을 받고 봉정암에서 제공하는 공양으로 미역국에 밥을 말아 간단하게 요기를 채운 뒤 잠시 쉬었다가 불공을 하기위해 염주를 꺼내려고 하는데 염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출발하기 전에 분명히 염주를 가방 안에 넣어왔고 등반 중간에 잠시 쉴 때 염주가 있는 것까지 확인을 했는데 정작 불공을 하려하니 염주가 보이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부터 마음이 불안하고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무슨 일인가 꼭 일어날 것만 같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그래도 불공을 해야 하기에 염주 없이 불공을 하고 다음날 새벽에 봉정암을 출발하여 다시 총지사로 돌아오게 되었다. 총지사에 돌아온 후에도 염주가 없어진 것이 마음에 걸려 당시 총지사에서 나를 가르치고 교육시켜주셨던 인덕심 전수님에게 염주가 없어져서 염주 없이 불공했던 일을 말씀드렸다. 전수님께서는 불공을 해보고 결과를 알려주시겠다고 하셨다. 그리고 저녁 늦은 시간 전수님에게 전화가 왔다. 전수님께서는 내일 당장 다시 염주를 가지고 봉정암에 올라가 불공을 하고 오라는 것이었다. 그날은 추계강공회가 열리기 이틀 전이었다. 시무생활동안 전수님께서 하시는 말은 대부분 다 따랐었는데 그날은 이상하게 내일 봉정암에 가고 싶지 않은 것이었다. 그래서 전수님에게 강공이 하루 밖에 남지 않아서 강공 끝나고 다녀오겠다고 말씀드렸다. 전수님께서는 다시 한 번 내일 다녀올 것을 말했지만 나는 그 말을 따르지 않았다. 


 그리고 추계강공에서 승직계를 받는지 10일 후 우려했던 그 일이 일어나고 말았다. 새벽 3시경 남해 집에서 전화가 왔다. 이 시간에 집에서 온 전화에 마음이 내려앉았다. 전화 내용은 아버지가 다쳐서 병원으로 가고 있다는 것이었다. 시골집은 마루와 마당의 높이 차이가 크다. 아버지께서는 새벽에 화장실에 가려고 나서다 어둠에 보이지 않아 발을 헛디뎌 바닥으로 넘어지셨다. 병원에서는 목뼈가 부려져 수술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날 7시간이 넘는 긴 수술시간에도 총지사 법등 정사님과 인덕심 전수님이 끝까지 함께 불공을 해주셨다. 병원에서는 수술은 잘 끝났지만 신경이 손상돼 자율호흡에 문제가 생겨 인공호흡기로 연명치료를 하지 않으면 오래가지 못할 거라 했다. 누나들은 연명치료하기를 원했지만 나는 아버지를 고통 없이 고이 보내드리고 싶었다. 그래서 연명치료 포기각서에 사인을 하였다. 그리고 아버지에게 말씀드렸다. “아버지 아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아버지를 위해서 불공 잘 해드릴께요. 사랑합니다. 아버지!” 그날은 내가 태어나서 처음으로 아버지에게 사랑한다고 말한 날이었다.


 병원에 입원한지 20일이 되던 날 병원에서 아버지가 하루를 넘기기 힘들 거라는 이야기를 듣고 가족들이 병원으로 모두 모였다. 그날은 이상하게 아버지께서 기분이 좋아 보이셨다. 모든 가족들과 다 이야기를 하고 정신도 맑아 보이셨다. 아버지께서 오래오래 사실 것만 같아보였다. 그리고 그 다음날 새벽시간 아버지께서 가늘게 숨을 쉬시는데 눈이 감기지 않는 것이었다. 수건에 물을 묻혀 아버지 눈에 덮어 드리고 가족들 모두 아버지를 위해서 불공을 시작했다. 그리고 반야심경이 끝나갈 무렵 가늘게 들리던 아버지의 숨소리가 드릴지 않았다. 그렇게 아버지께서는 병원에 입원하신지 21일 후 열반에 드셨다.


 승직계를 받고 스승이 된 나는 부산 삼밀사로 발령을 받게 되었다. 갓 스승이 된 나를 김화자 신정회 회장님을 비롯한 모든 삼밀사 보살님들이 자신의 아들처럼 잘 대해주셔서 스승으로서의 첫걸음을 어렵지 않게 시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마음속에 응어리진 한 가지가 남아 있었다. 그것은 봉정암에 올라가 다시 불공을 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해 8월 배낭에 염주, 초, 향, 쌀, 과일을 넣어 어깨에 짊어지고 봉정암에 올라 부처님께 인사를 드리고 아버지를 위해 철야불공을 드렸다. 다음날 새벽에 불공을 끝내고 마지막으로 부처님의 진신사리를 모신 탑에 올라 부처님께 참회의 절을 하기 시작했다. 절을 하는 동안 나에 대한 자책과 아버지에 대한 미안함에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절을 시작한지 세 시간이 넘어서자 다리에 힘이 풀려 더 이상 일어날 수 없었다. 그렇게 한동안 그 자리에 앉아있다 봉정함을 내려오기 시작했다. 내려오는 길에 신기하게 다리가 아프지 않았다.


 그날 저녁 삼밀사로 돌아와 잠을 자는데 아버지께서 삼밀사로 오셨다. 아버지께서는 내가 스승으로서 잘하고 있는지 보러 오셨다고 하셨다. 아버지와 함께 사택에서 점심공양을 끝낸 후 아버지께서는 어머니를 만나러 남해에 가신다고 하셨다. 내가 남해까지 태워드린다고 하니 아버지는 괜찮다며 부산 사상시외버스터미널까지만 태워달라고 하셨다. 사상시외버스터미널에 도착하여 아버지와 헤어지는데 마음속에서 지금 아버지와 헤어지면 다시는 만나지 못할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아버지를 향해 아버지! 아버지! 크게 불렀다. 아버지께서는 뒤돌아 웃으시며 나를 향해 손을 흔들어 주시고 사상시외버스터미널 안으로 들어가셨다. 그리고 그 후로는 아버지께서 꿈에 찾아오지 않으셨다.


 업이라는 것은 지은대로 일어나야하는 속성이 있다. 그것이 인과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업이 닥칠 때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말을 듣지 않고 스스로 불구덩이 속으로 들어가게 된다. 하지만 그 업과 인과를 극복하는 가장 좋은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수행과 불공으로 자신의 업을 닦고, 타인을 위해 복을 지어주며, 자신의 자성불을 밝히는 것이다. 그 이유는 수행과 불공으로 부처님에게 가까이 다가간 사람만이 부처님의 당체법문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제 나도 조금은 알게 되었다. 당체법문이 올 때와 업이 닥칠 때 어떤 상황이고 어떤 마음인지를.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옴마니반메훔


e34c7f1e08ef81778f36d471977b832f_1665470818_1184.jpg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