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처님 진신지골 사리 한국이운의 참뜻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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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73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5-12-01 신문면수 2면 카테고리 대법고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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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5-25 19:35 조회 1,858회본문
법원주림에 “8만 4천 사리탑 가운데 중국에 19탑이 있으며 그 중 하나인 치저우의 법문사 탑 아래 '부처님의 손가락 뼈인 불지사리가 묻혀 있고, 서기 704년(장안4년) 측천무후가 현수국사 법장을 법문사로 보낼 때 해동신라국 시랑겸 한림학사 승무랑 정수병부시랑 최치원을 동행시켜 탑기첨례 (탑의 지하궁을 열고 불지사리 참배)를 했다.“는 7일간의 행도 기록이 남아 있다, 중국에서는 당 우송이래 장쩌민에 이르기까지 황제는 이 불지 사리 봉양이 관례가 되어 내려 왔고 민간에서는 이에 빌면 소원성취 한다 하여 기적의 신령 스러운 성보로 간주되고 있다.
이러한 성스러운 불지사리가 지난 11월 11일 중국 법문사에서 한국으로 이운되어 서울은 펜싱경기장에서, 부산은 벡스코에서 각각 20일간씩 친견법회를 봉행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 불자들은 불지 사리에 대한 신성함과 영험성을 체득하지 못하고 단지 중국 의 보물로 간주하여 호응과 관 심도가 떨어져 친견법회를 찾는 대중이 없어 썰렁함을 자아 내고 있다.
11월 9일 중국 법문사에서는 불지사리를 한국으로 봉송하기 위한 이운법회를 개최하였다. 불지사리는 중국에서 귀중한 국보로 지하의 유물관에 보관되어 있기 때문에 일반인들에 게 공개되는 것은 몇 년에 한 번으로 이 불지사리를 친견하는 것은 아주 어렵고 힘든 일이다. 그러한 이유에서인지 이 날 법회에 참석하는 인파는 수천으로 법문사 도량은 만장기 와 인파들로 가득하였다.
법회가 진행되는 동안 불지 사리를 보호하기 위해 수 십명의 중국 공안과 무장한 군인이 출동하여 삼엄한 경계를 강 화하고 있었으며, 중국내 신문과 방송 등 모든 언론기관들은 불지사리 한국이운법회를 취재 하느라 분주하였다.
이운법회에 참석한 수천의중국 불자들은 경영하는 상점을 휴업하고 법회에 참석하였 으며, 법회가 봉행되는 동안 간절한 마음으로 두손을 합장한 이들의 모습을 보며 부처님께 서는 이들의 소원을-성취시켜 줄 것만 같은 느낌이다
또한 불지사리를 한국으로 이운하기 위해 비행기에 선적 하는 의식에서 새벽 1시의 밤 늦은 시간이지만 중국의 많은 시민들이 참석하고, 중국 방송 매체에서는 이 광경을 화면에 담기위해 분주하게 움직였으며, 의식을 집전하는 중국 스님들의 모습은 엄숙하고, 장중하였다. 이 의식에 참석한 스님 및 사부대중들은 불지사리가 마치 부처님께서 한국으로 여행을 떠나 무사히 여행을 마치고 귀 국하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기원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불지사리를 태운 비행기가 인천공항에 도착하여 내리는 과정에서 한국 불자들은 마치 화물을 내리 듯 중국에서 가졌던 장엄하고 엄숙한 의식을 찾을 수가 없었으며, 인천공항에 마중 나온 한국 불자들은 겨우 몇 십명에 불과했다. 조계사와 펜싱경기장으로 이운하는 과정에서도 의식이나 법회에 참가하는 한국 불자들은 겨우 몇 백 여명이었다.
똑같은 대상을 가지고 중국인들과 한국인들이 가지는 마음가짐과 태도가 너무나 큰 괴리감을 느낄 수가 있었다.
중국에서는 마치 부처님처럼 모시고 공양하는 불지사리가 한국에서는 단지 중국의 중요한 보물로 밖에 인식되고 있는 것을 보면서 상호간 가치관의 차이인자 아니면 불심의 차이인지 분간할 수가 없었다.
불지사리는 부처님의 분신이라 할 수 있다. 이러한 부처님의 분신이 태국, 홍콩, 대만에서의 친견법회는 성황리에 마쳤는데 우리나라에서만 신앙적으로 존중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신앙적 공허감을 느낄 수 있었다.
신앙 대상물은 신앙 그 자체로 모든 중생들에게 행복과 안위를 제공해야 하며, 대중들에게 회향하는 행사로 이루어져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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