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딱창의 역경사 셰랍린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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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5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0-01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인물사페이지 정보
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교수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0-11 16:01 조회 1,747회본문
티벳불교의 4대종파는 모두 나란다마하위하라를 중심으로 석가모니붓다의 인도불교 계승을 공식적으로 표방한다. 교육체제로서 나란다대학을 중요시하는 이유는 석존께서 심은 불법의 전통을 최종적으로 결집하고 완성한 지표이자 중심이기 때문이다. 4대종파 가운데 겔룩빠와 사꺄빠가 현밀겸수의 온전한 모습을 전하는데 특히 사꺄빠의 경우 교학과 인명학의 탁월함으로인해 다른 종파의 존경을 늘 받아왔다. 지금도 4대종파의 학승과 요기들은 종파를 가리지 않고 왕래하며 종학을 서로 연마한다. 인도불교사를 돌이켜보면 불교의 학승과 외도의 학승들이 논쟁의 규칙을 정해 서로의 날선 종학을 겨룬 것을 보면 진리를 구하는 위대한 인간정신의 열린 의식의 모범을 보여주는 것 같다. 적어도 무슬림에 의해 폭력으로 사라지 전까지 그래왔다.
쫑카빠와 거의 동시대에 살았던 인물 중에 사꺄빠의 조사로 ‘딱창의 역경사’로 알려진 셰랍린첸(1405-1477)이라는 분이 있다. 전기와 관련해 많은 자료들이 있지만 간략히 요약하면 1405년 을유년 얄독 딱룽지역의 랑도 캉말에서 태어났다. 세랍린첸의 전기는 1470년이 되어서야 기록이 되었는데 어릴 때부터 사원을 흠모해 3살때 역경사 캽촉뻴상뽀로부터 수계를 받고 5살때부터 다라보살 예찬을 배웠다. 어느 날 친구, 이웃들과 『문수진실명의경』을 염송하고, 절에 가서 공양을 올렸는데 그날 꿈에서 중국의 오대산을 보고 등정하는 현몽을 하였다. 이것은 훗날 다섯 가지 중요한 성취를 모두 이룰 것이라는 예시로 훗날 해석하고 있다. 8살 때 아사리 톱곌로부터 8년간 공부했는데 이때 현교와 밀교, 티벳에서 중요시했던 9가지 무예를 골고루 익혔다. 특히캄지역에서 법주로 알려진 닥빠상뽀로부터 많은 밀교관정을 받았다.
20세가 되어 쎙게 곌첸 뻴상뽀로부터 비구계를 받고, 창지역의 최콜사원에 들어가 현교의 많은 교학들을 섭렵했다. 1431년 최콜사를 떠나 데뿡사원에 들어가 사우언의 설립자인 잠양 따시 뻴덴으로부터 배웠다. 그러나 6개월후 데뿡사원을 떠나 상뿌 뉴똑의 뻰뽀 나란다 사원에 가서 사원의 설립자인 롱뾘 세자 꾼릭에게 배웠다. 세랍린첸이 배운 현교의 탁월한 교학은 이미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것이었지만, 1436년 ‘당대 학승중 최고의 학승’으로 일컬어지는 왕축 소남린첸 뻴을 만나서는 깔라챠끄라딴뜨라를 배웠고, 3년간 깊은 경지를 수습한 다음 훗날, 1455년 이에 대한 유명한 주석을 집필하였다. 딱창의 역경사가 유명해진 것은 당대 넘볼 수 없는 쫑카빠의 주장에 토를 달았기 때문이다. 중관과 논리학을 주제로 한 딱창의 비판에 대해 쫑카빠를 옹호한 것은 데뿡대 승원 고망사원대학을 설립한 유명한 학승 잠양쉐빠이다. 방한한 적이 있는 유명한 제프리홉킨스의 제자인 스톡턴대학 이종복 교수는 이에 대한 논문을 발표하였는데, 이를 요약하면 쫑카빠는 무자성에 대한 인식에 대해 논리적 접근과 무명으로부터 생사에 유전하는 자아의 성찰, 마지막으로 요기지에 의한 무분별지에 도달해야 한다고 주장한 반면 딱창의 역경사는 첫 째는 공덕을 닦고, 두 번째 단계에서 분석적 사고에 의한 무아를 연마하며, 세 번째 무분별의 일체지를 완성한다고 주장한다. 잠양쉐빠는 무분별지의 체득은 논리적 분석과 요기지의 실제를 체득하는 것으로 요약하였다. 이러한 논란들은 이론과 경험, 즉 논리와 유가라는 불교수행의 양 바퀴에 대해 딱창의 역경사는 공덕의 적집을 포함해 보다 넓은 도차제의 시야와 범주를 적용했다고 할 수 있다. 이종복 교수의 주장대로 어느 전통의 우월을 논해서는 안되는 것이지만, 이를 계기로 후대의 학승들은 보다 세밀한 이론을 발전시킬 수 있었다.
딱창 역경사의 삶은 불교학자의 연구가 끝내 무분별지, 또는 요기지의 수습으로 나아가 성취하는 것으로 밀교에 그 방편이 있음을 몸소 보여주고 있다. 그는 쩨동 린첸강 사원을 설립하여 여기서 밀교 승원대학의 교과과정들을 규정지었다. 탁월한 스승 아래 많은 제자들이 모여들어 이름을 날렸는데, 딱창의 역경사는 고향 근처에 유명한 딸링 최데사원을 설립하고 여기서 말년을 주석하였다. 제자 가운데는 겔룩의 학승 놀상갸초 (1423-1513)를 비롯해 헤아릴 수 없는 제자 들이 있었다. 딱창의 역경사 셰랍린첸은 당대 겔룩빠를 뛰어넘는 방대하고 현교 연구의 중심을 이룩하였고, 지금도 겔룩빠와 사꺄빠는 날선 교학을 경쟁하며 서로 발전하고 있다. 딱창의 역경사는 1477년 입적하였는데 그가 남긴 마지막 유작은 『일체지오처(一切智五處)』였으니 그가 어릴 때 중국의 오대산에 등정했던 꿈을 성취하고, 그 최후의 유작을 남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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