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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념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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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67호 발행인 법등[구창회] 발간일 2013-10-05 신문면수 4면 카테고리 불교의 선정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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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 필자법명 화령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중앙교육원장 철학박사 화령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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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5-29 11:36 조회 2,79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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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의 선정 (22회)

심념처

마음은 무상한 것이지만 우리의 전도된 생각으로 마음은 항상 불변한 것으로 착 각하고 있다. 마음의 무상성을 깨닫게 하기 위하여 부처님께서는 심념처의 법문 을 말씀하셨다. 심념처는 일종의 자기 감시방법이라고도 할 수 있으며, 지금 당장 의 자기 마음의 실상을 관조하여 마음의 연기성, 무상성을 깨달아 집착을 내려놓 고 괴로움을 해탈하는 수행이다.



마음은 근본적으로 청정한 것 

심념처 수행으로 원래 자리 찾아야


불교의 심법은 심식을 안식 - 이식 - 비식 - 설식 - 신식 - 의식의 6식으로 나눈 다. 의식을 제외한 나머지 5식을 전시 이라고 하며 마지막의 의식을 제6 식이라고 한다. 의식이 앞의 시을 총괄하는 것으로 우리는 보통 이것을 마음이라고 한다. 여기에 말라식과 아뢰야식을 더하여 8식으로 부른다. 말라식과 아뢰야식은 우리의 감추어진 마음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팔식이 마음의 주체로 서 심왕이라고 하며 여기에 심왕을 따라 같이 작용하는 종속적인 마음의 작 용을 심소라고 한다. 다시 말하면 심소는 마음이 갖추고 있는 작용, 성질과 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여기에는 수, 상, 촉, 작의 등이 포함된다. 심은 심소 와 떨어져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며 늘 몇 개의 심소와 일체를 이루고 심소 또한 단독으로 존재할 수 없으므로 심과 심소는 항상 상응하여 같이 일어난다. 심, 즉 마음과 의식은 때로는 같은 의미로 쓰이며 마음 가운데의 탐욕이나 성냄 등이 곧 심소이다.

마음은 근본적으로는 청정한 것이지만 각종 탐, 진, 치의 모든 번뇌가 연기법으 로 인하여 나타난다. 따라서 이러한 탐진치의 번뇌는 원래부터 갖추어진 자성이 아니기 때문에 제거할수가있다. 그 방법은마음을 살피는수행을통하여 원래 청 정한 마음의 모습을 경험할 수 있으며 해탈의 길로 갈 수가 있게 된다. 심념처의 수행은 마음의 본성이 청정함을 깨닫는 순수한 경험이며 또한 그것을 깨달을 수 있는 능력이 있음을 알아차리는 과정이기도 하다.

마음은 스스로를 관찰하고 스스로를 관조하며 스스루를 감시할 수 있는 능력 이 있기 때문에 이러한 스스로를 살피는 마음의 특질을 이용하여 우리는 어떤 한 순간의 마음의 움직임을 포착하고 심소에 반연하는 대상을 관찰할 수 있다. 이것 이 심념처의 포인트가 되는 관심 으로서 수행을 통하여 마음의 움직임을 놓 치지 않고 파라가며 살피고 분석하여 컨트롤하는 것이 심념처의 목적이다. 



마음의 실상을 관찰하여 탐-진-치와 위선, 질투, 이기심을 극복


심념처를 통하여 관찰하는 것은 우리의 마음 혹은 의식으로서, 우리의 현재의 마음이 탐진치의 어느 것에 해당하는지 아니면 탐진치가 없는 상태인지 한 곳에 집중하고 있는지 마음이 산란한지 등을 끊임없이 바라보는 것이다. 즉, 마음으로 써 마음을 보는 것이 된다. 여실하게 현재의 자기의 마음의 움직임을 따라가며 마 음의 실상을 바라보고 그렇게 하여 지금 당장의 마음의 상태를 분명하게 알아차 려야 한다. 마음의 모습을 바로 알아야 그것을 따라 잡을 수 있고 그것을 통제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반적으로 자기의 마음을 살필 수 있다. 피상적으로는 그렇다는 말이 다. 그렇기 때문에 화도 참고 욕심이 나도 절제하고 바보 같은 생각을 했다가도 마 음을 고쳐먹는다. 그렇지만 때로는 자기의 마음을 너무 깊이 들여다보는 것을 꺼 려하는 경향도 있다. 왜냐 하면 자기의 마음을 깊이 들여다보면 자기의 결점이 너 무나 많이 드러나기 때문에 자존심에 상처를 입는 것처럼 느끼기도 한다. 세밀하 게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면 욕심내고 이기적이며 질투하고 비겁하며 위선적인  자기의 마음 상태가 고스란히 드러나기 때문에 본능적으로 이런 것을 들여다보는 것을 꺼린다. 어쩔 수 없이 자기의 이런 마음을 들여다보게 되었을 때는 어떻게든 이것을 감추려고 한다. 심념처 수행은 이러한 습관을 개선하려는 것이며 우리의 진실한 내심을 들여다보아 그 실체를 분명히 자각하고 결점을 고쳐나감으로써 성 격상의 발전을 가져오게 된다.



심소의 관조-16종심

마음을 바라보며 보는 자 마저 사라지게


《대념처경 》에서 부처님께서는 마음을 살피는 방법을 말씀하셨다. 마음에 탐욕이 있으면 탐욕이 있다고 분명히 알아차리고, 탐욕이 사라지면 사라 졌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마음에 진에나 우치가 없으면 없다고 분명히 알아차 리고, 마음이 산란할 때는 산란한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는 등 마음의 모든 작용이 일어나면 일어났다고 분명히 알아차리며 사라지면 사라졌다고 분명히 알아차리 라는 말씀이다. 이와 같이《대념처경》에서는 우리가 살펴야 할 마음 상태로서 탐욕과 무탐, 진심곽 무진심, 치심과 무치심, 수축심과 산란심, 광대심과 불광대심, 처일심과 부전일심, 해탈심과 미해탈심의 16종의 마 음을 들고 있다.

매번 어떤 마음이 일어날 때는 그 일어나는 마음을 객관적으로 관찰하되 ‘나’라 는 것과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또한 거기에 자성이 있다고 알아서도 안 된다. 나 의 마음이 이러이러하다, 혹은 나의 마음이 이렇게 움직인다라고 하는 이 ‘나의 마 음’이라는 생각이 없이 지극히 객관적으로 마음이 일어났다 머물고 소멸하는 과 정을 살펴야 한다. 마음이 청정하거나 오염되었거나에 상관없이, 또 거기에 따라 마음이 으쓱거리거나 위축됨이 없이 단지 주의를 기울여 분명하게 알아차리는 것 이 중요하다. 그렇게 하여 그 마음이 사라지게 해야 하며 거기에 집착하여 좋아하 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개입시키면 안 된다는 의미이다. 그렇게 객관적으로 마음 을 바라보면 모든 마음은 생겼다가 잠시 머문 다음 사라져버리는 지극히 무상한 존재임을 알게 된다.



보리는 자기의 마음을 여실하게 아는 것 

사념처 수행은 현대인들에게 더욱 중요


마음의 모든 변화 과정을 살피다 보면 언제나 존재하는 관찰자가 있는 듯 생각 되기도 하지만 이것 또한 무상한 것임을 깨달아야 한다. 꾸준한 연습에 의하여 분 명하게 보이는 듯한 이 관찰자마저도 함께 함께 사라지도록 해야 한다. 생각이 일 어나면 그것을 바라보는 자도 함께 일어났다가 그 생각이 사라지면 관찰자도 함께 사라진다. 이것이 마음의 무상성이며 무자성의 모습이다. 하나하나의 마음은 찰 나 생멸로서 온 곳도 없고 간 곳도 없으나 끊임없이 쉬지 않고 이어진다. 그러나  우리는 일체 만물이 불변하지 않고 항상 하는 것으로 착각하며 산다. 사물의무상 은 그래도 어느 정도 느끼지만 자기 마음의 무상성은 자각하지 못하고 하나의 생 각에 사로잡히면 거기에 집착하여 모든 번뇌를 만들어 낸다. 인간 사회의 모든 갈등은 수시로 변화하는 자기의 마음을 바라보지 못하고 하나의 생각을 고정화 시 켜 그것을 관철하려고 하기 때문에 일어난다. 정치나 종교, 사상의 대립과 갈등은 그 본질을 잊어버리고 하나의 고정된 생각에 얽매여 거기에 집착히기 때문에 발생 하는 것이다. 과거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대립도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얼마나 의미 없고 무가치한 본질을 잊어버린 어리석은 다툼이 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우리의 마음이 잠시도 가만있지 못하는 것을 부처님께서는 이 나무 저 나 무로 까불며 폴짝폴짝 뛰어다니는 원숭이에 비유하셨다. 특히 현대인들의 마음은 너무나 산란하여 잠시도 자기 생각을 멈추어 바라보기가 힘들다. 멈추어 서서 자기의 마음을 관조할 수 있을 때 마음의 무상과 무자성을 철저히 깨닫고 어리석은 집착에서 벗어날 수 있다. 심념처 수행을 통하여 여실하게 자기의 마음을 관찰하 면서 마음의 일어나고 사라지는 원인을 분명하게 보고 제어함으로써 마음을 원래 의 청정한 자리로 되돌려 놓을 수 있게 된다. 밀교의 대표적 경전인《대일경》에 서도 ‘여실지자심이 곧 보리’라고 하셨다. 자기의 마음을 잘 아는 것, 그것이 곧 깨달음이요 해탈이기 때문에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살피는 심념 처의 수행은 특히 더 중요한 수행이라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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