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교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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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91호 발행인 우승 발간일 2007-06-01 신문면수 2면 카테고리 -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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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07 17:45 조회 2,656회본문
밀교의 역사
인도에서 탄생한 불교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열반 하신 후 부파불교시대를 거치면서 이론 중심, 승려중심의 불교로 흐르면서 민중의 삶을 외면하고 자비에 바탕을 둔 불교의 근본정신을 소홀히 했던 기간이 있었다. 이것을 극복하기 위하여 대승불교가 나타나 누구나 보살이 되어 성불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민중구제에 앞장섰다. 그러나 대승불교도 곧 이어 너무 현학적이고 이론적인 불교가 되어 대중들과 멀어지게 되었다.
대승불교의 정화
이러한 틈을 타 바라문교는 불교의 상을 모방하고 민간신앙을 흡수하여 힌두 교로 탈바꿈하면서 위세를 떨치기 시작했다. 밀교는 이러한 만중의 열의를 반영하여 인도 재래의 신앙을 폭넓게 수용하면서 그들의 의례의 상당 부분을 불교적으로 승화시킴과 동시에 대승의 교학체계를 도입하여 불교의 근본정신을 되살리려고 한데서 출발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정신이 7세기경에『대일경』과『금강정경』으로 나타남 으로서 밀교는 뛰어난 이론체계와 완벽한 수행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이 양부 대경의 출현으로 밀교는 대승불교의 연장선상에서 불교의 모든 정신을 구현한 대승불교의 정화라고 일컬어지게 되었다.
밀교의 역사는 인도에서의 전개과정을 기준으로 초기, 중기, 후기의 3단계로 나눈다.
초기밀교는 인도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성립한 밀교로서 다라니의 독송을 중심으로 하는 밀교였다. 이 시기의 밀교는 아직 이론적인 정립이 이루어지지 않았으며 경전 속에서 다라니의 공덕이 설해지는 정도였다. 일본의 학자들은 이 시기의 밀교를 다듬어지지 않은 잡밀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기밀교는 7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새롭게 성립한(대일경), (금강정경)등의 경전을 기반으로 하는 체계적인 밀교이며 중국에서는 중당에서 만당에 걸쳐서 번영했으며 그 영향이 우리나라와 일본에도 미쳐졌다. 이 시기의 밀교는 이론과 수행체계가 잘 갖추어져 있으며 성불과 중생구제를 궁극의 목표로 삼았다. 이 점에서는 현세이익을 지향하는 초기밀교의 다라니 독송 위주의 것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밀교라고 할수있다.
전개과정상 3단계
후기밀교는 8세기 이후에 인도에서 일어난 딴뜨리즘의 유행과 함께 성립한 밀 교로서 딴뜨라불교라고도 한다. 이전의금욕적인 불교에서는 금기시하고 부정한 것으로 보았던 것들을 딴뜨라불교에서는 긍정적인 것으로 보고 그러한 것들을 성불의 수단으로 삼았다. 예를 들면 성행위 나피, 뼈, 가죽 등을 후기밀교에서는 성스러운 것으로 긍정하여 수행의 방편으로 삼았던 것이다. 후기 밀교의 영향을 받은 티벳밀교에서 사람의 뼈나 가죽 등을 법구로 쓰는 것도 그러한 이유에서이다. 이처럼 딴뜨라 밀교에서는 성적인 요가나 생리적인 행법도 과감하게 도입하였기 때문에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에서는 좌도밀교라고 하여 금기시한다. 후기밀교의 경전은 송대에 한역된 것이 있지만 유교적 윤리관이 강한 중국에서는 크게 받아 들여지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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