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교총지종

총지신문 아카이브

불교총지종은 ‘불교의 생활화, 생활의 불교화’를 표방하고 자리이타의 대승불교 정신을 일상에서 실천하는 생활불교 종단입니다.

바람직한 후원

페이지 정보

호수 27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12-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단 서브카테고리 지혜의눈

페이지 정보

필자명 김태원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칼럼리스트 필자정보 - 리라이터 -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12-07 12:14 조회 1,657회

본문

바람직한 후원

후원 대상이 어떠해야 한다는 규정 불필요 

어떠한 집착도 없이 돕는 무주상보시 해야 


최근에 빈곤 포르노(poverty porno)란 단어가 아주 뜨거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정의는 “모금을 유도하기 위해 곤경에 처한 이들의 상황을 자극적으로 묘사하여 동정심을 일으키는 영상이나 사진” 등을 말합니다.

동정심을 유발할 정도의 생활 모습이란 것이 현실에서 일으키는 내용은 잘못된 판단을 가져오기도 합니다. 일례로 가난한 가정의 어린이를 후원하는 사람이 그 어린이가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는 사실을 알고 후원을 끊은 사례가 있었습니다. 후원하는 분은 피아노 학원을 다닌다는 것은 일정정도 경제적 여유가 있어야만 가능한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을 후원한다는 것은 그 사람이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도록 돕는 행위입니다. 그런데 피아노 학원을 다니는 것이 바로 인간다운 삶을 살아가려는 몸짓으로 볼 수 없을까요? 더구나 그 어린이가 피아노 학원을 갈 수 있었던 것은 정부의 지원이 있었다는 배경이 알려지면서 결국 후원자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가난”이라는 기준에 맞춰 행동한 것이죠. 

우리는 가난한 사람의 생활은 어떠해야 한다는 선입견을 의식적으로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 기준에 못미치는 “가난한” 모습이 더 많은 후원을 가져온다는점을 악용한 것이 바로 빈곤 포르노입니다. 선한 의도가 나쁜 결과를 가져오는 사례로는 입양을 들 수가 있습니다. 전쟁 고아를 위해 실행한 해외입양이 하나의 거대한 산업으로 탈바꿈하여 물의를 일으킨 경우가 대표적이죠. 그렇지만 이런 잘못된 행위를 막기위해 후원행위를 못하게 할 수는 없습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굶주림과 질병의 고통 속에서 살아가고 있고 우리는 그 고통을 덜어주려고 노력해야 하기 때문이죠. 혹자는 그런 행위를 “가난한” 사람의 의존성을 키워준다는 이유로 대하기도 합니다. 그럼에도 불교적 세계관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을 돕는 행위를 지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사람을 가르치는 일에 종사하다보면 당연한 내용이라고 설명하는 내용을 어떤 사람들은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기도 합니다. 

불이(不二)라는 개념같은 것들이 대표적인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세상은 모두 개체적 사물로 독립되어 있습니다. 그런 현상을 부정하는 듯한 불이의 개념은 선뜻 받들여지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나비효과와 같은 현대 물리학의 내용이 알려지면서 세계의 실상을 상의상존(相依相存)의 연기론(緣起論)으로 설명하 불교의 세계관이 단순히 관념의 산물이 아니라 구체적 현실태(現實態)를 나타내주고 있음을 깨닫게 해주었습니다. 게다가 불교는 후원의 바람직한 모습을 제시하기도 합다. 먼저 비참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후원을 이끌어내려는 자선단체의 태도를 비판해야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후원자가 후원 대상은 어떠해야 한다라는 규정 해서는 안됩니다. 오른손이 한 일을 왼손이 모르도록 해야하는 것이고, 무주상(無住相) 보시(布施) 즉 집착함이 없이 도와야 하는 것이죠. 가난한 사람을 후원한다 것이 또다른 권력을 행사하는 것으로 변질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사람 사이에는 무수한 중간지대의 사람들이 놓여있습니다. 그 경계선을 긋는 은 각자의 판단이지만 그 판단이 옳은지 검증할 수 있는 방법은 없습니다. 그러니 그저 기부하고 그리고 잊어야하고, 기부는 상대를 위한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한 것니다. 내 소유를 헐어서 다른 이에게 전달한다는 것은 상대에게 베푸는 것이 아니라 내가 너무 많이 가지고 있음을 깨닫게 만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기부하는 돈, 물건이 여전히 내 소유의 끈으로 이어져 있게 만들지 않아야 합니다. 방하착(放下著)!


칼럼리스트 김태원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