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관(史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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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74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2-09-01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종합 서브카테고리 지혜의눈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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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2-09-06 15:01 조회 1,720회본문
조선 양반의 증가로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체
사회, 경제, 문화의 영역으로 넓혀 바라봐야
정치를 중심으로 역사를 바라보는 것은 매우 협소한 역사인식을 갖게 될 위험성이 있습니다. 근대 이전의 신분제 사회에서 정치는 10%도 안 되는 소수의 상층 지배층 사이에서 일어나는 사건을 다룰 뿐입니다. 조선시대의 경우 지배층 내에서도 중인과 같은 하층 지배층과 상민과 천민은 정치사에서 배제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조선시대를 정치사 위주로 역사를 바라본다면 당쟁으로 나라가 망했다는 식민사관의 논리에 포섭되기 쉬운 한계를 가지고 있지요. 반면에 경제와 사회분야는 피지배층의 생활이 담겨있어서 역사를 보다 풍부하게 바라볼 수 있게 만들어줍니다. 특히 인류역사 전체를 관통하는 흐름은 모든 사람들의 정치적 권리의 확대과정이기도 하였습니다.
이러한 정치적 권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먼저 신분적 제약을 타파해야 합니다. 그 중 가장 극적인 사건이 근대사회로 진입하는 과정에서 봉건적 특권을 유지시키는 구체제(앙시엥 레짐)를 타파한 프랑스 대혁명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이 한국사에서는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사건이 없어서 봉건적 신분질서가 강고하게 유지되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조선사회도 후기로 갈수록 신분제도가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단 신분적 특권을 타파하는 혁명적 과정이 아니라 양반이라는 신분층이 증가하는 점진적 과정으로 봉건적 신분질서가 해체되고 있었습니다. 19세기에 들어오면 대구지방의 경우는 양반에 속하는 계층이 무려 70%에 달하였습니다. 그래서 양반이라는 말은 조선 후기에 이르면 불특정의 제삼자를 부르는 호칭으로 바뀌게 됩니다. 우리가 저자거리에서 사람들끼리 싸울 때 “이 양반이!”하는 소리를 듣는 경우가 있습니다. 특권층은 소수일 때 의미가 있는 것이지 인구의 다수가 양반계층이라면 특권층이라는 의미는 희석될 수밖에 없지요.
그런데 식민지로 전락한 조선에서 경제적 불평등을 조금이나마 해소하려는 국가적 노력이 전개되었다면 믿을 수 있을까요? 1592년 임진전쟁이후 피폐해진 사회를 어느 정도 회복시키기 위해 조선 정부는 대대적인 수취제도를 개혁하였습니다. 조선시대 일반민이 가장 부담스러워하는 세금은 공납이었습니다. 공납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물품을 전국의 각 고을에 현물로 부과한 것인데 부과대상이 각 고을의 민호(民戶)였습니다. 이 경우 담세능력을 고려해서 각 호(戶)마다 경제적 부담의 차등을 두었지만 미미했고 따라서 공납의 경우도 신분적 차등이 작동하였습니다.
결국 정부의 재정을 확보하려면 일정한 액수를 거둬야 하고 이는 담세능력이 있는 부유계층에게 세금을 더 걷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17세기 이후에 시행된 것이 대동법(大同法)으로 부과대상을 민호에서 토지로 바꾸었던 것이죠. 이는 혁명적 변화였는데 일단 현물에서 쌀로 세금의 내용이 바뀌었다는 것은 부과대상이 민호(民戶)에서 토지로 바뀌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한마디로 집집마다 균등하게 부과하는 것에서 토지가 있는 사람에게 부과하는 것으로의 변화를 의미합니다. 그러면 토지가 없는 빈민은 과세대상에서 제외되었고 토지가 많은 양반지주들은 부담이 늘어날 수밖에 없습니다. 대동법을 오늘날 세제로 비유하자면 일종의 부유세와 조금 비슷하지 않을까요?
우리가 또 주목해야할 부분은 대동법이라는 정책이 대지주인 양반관료들에 의해 수립되었다는 것입니다. 조선시대 양반관료층은 성리학이라는 수기치인(修己治人)의 정치 이념에 충실하였기에 자신들의 부담이 늘어나는 정책을 수립할 수 있었던 것이죠. 그래서 성리학을 낡은 중세 봉건제의 통치이념으로만 보지 않고 어느 정도 근대성이 포함되어 있다는 시각도 있습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선시대 역사를 바라보면 조선왕조가 무능했기 때문에 일제의 식민지로 전락했다는 식민사관의 논리를 비판할 수 있습니다. 아시다시피 식민사관이란 식민지로 전락한 원인을 오로지 내인론(內因論)에서만 찾으려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발전적 측면을 의도적으로 축소하거나 감추려는 잘못된 사관(史觀)입니다. 우리가 역사를 정치사의 좁은 영역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사회, 경제, 문화의 영역으로 넓혀서 바라봐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칼럼리스트 김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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