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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밀교의 새로운 장을 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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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4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1-01 신문면수 11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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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13 10:18 조회 1,9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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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밀교의 새로운 장을 열다
총지종 40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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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해가 총기40년이 되는 해이다. 사람 나이로 치면 불혹(不惑)에 접어들었 다. 적지 않은 역사이다. 총지종의 창종은 이 땅에 밀교중흥의 씨를 뿌린 역 사적인 사건이라 할 수 있다. 삼국시대부터 시작된 밀교는 고려에 와서 그 정점을 이룬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조선조에 접어들어 숭유억불(崇儒抑佛)의 정책으로 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고, 특히 밀교는 선교(禪敎) 양종(兩 宗)에 흡수되면서 모습은 사라지게 되었다. 다행히 해방 이후에 구국도생(救 國度生)의 대비원력(大悲願力)과 밀교중흥의 일대사명(一大使命)으로 한국밀 교의 신흥종단을 창종하였으니 그 역사적 의미가 지대하지 아니하다 할 수 없다. 밀교의 비밀의궤와 수법을 정립하고 삼밀수행법을 체계화하였으니 한 국밀교의 대표종단으로 자리매김하게 됨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창종 40년이 흐른 지금에 이르러서 우리는 그 발자취를 뒤돌아보지 않을 수 없다. 역사를 통해 새로운 도약과 발전을 준비하는 발걸음이라 할 수 있다. 총지종의 창종 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40년 역사의 발자취는 어떠하였는지를 살펴 보는 작업은 바로 온고이지신(溫故而知新)의 마음자세인 것이다.  




1. 총지종의 창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가? 


원정 대성사께서 이루신 밀교종단 의 창종은 네 가지 측면에서 큰 의의 를 갖는다. 첫째는, 이 땅 한반도에 5백년 동안 잠들었던 밀교를 다시금 중흥시켰다 는 점이며, 둘째는, 정확한 삼밀의궤 를 갖춘 밀교수법을 정립했다는 점이 고, 셋째는, 종단의 재단법인화를 들 수 있다. 종단 운영에 투명성과 합리 성을 토대로 확고한 기틀을 마련하였 다는 점은 한국불교계의 귀감이 되고 있다. 넷째, 출가종단이 아닌 재가종 단으로서 승속동수(僧俗同修)의 수행 풍토를 이루었다는 점이다. 삼밀수행 으로 자기 스스로 염송정진에 들어가 는 수행체계를 갖추어 놓은 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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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총지종의 40년 역사 


40년의 역사를 시기별, 상황별로 분 류하는 작업이 필요하다. 주요 역사 를 다음과 같이 시기별로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창종일인 1972년 12월24일을 기점 으로 그 이전을 제1기로 정하고‘창 종 준비를 위한 불사’를 펼쳤던 시기 로 분류하였다. 창종 이전의 역사가 창종과 그 이후의 역사 못지 않게 중 요한 의미를 갖는다. 창종을 위하여 모든 준비를 마쳤기 때문이다. 이 시 기를 총지종 역사의 제1기로 분류하 였다. 


제1기 : 창종 준비를 위한 불사 

제1기의 주요 사실(史實)로는 총지 종의 주요 사상(事相) 가운데 하나인 ‘비밀의궤법’의 제정을 들 수 있고, ‘왕생막’과‘조등(弔燈)’, ‘왕생다라 니’를 직접 고안하고 제작하여 교도 가정의 장례법을 마련한 사실, 종단 의 상징인‘육합상’의 고안, ‘준제관 음상’과‘현도만다라’의 조성, 총지 종의 교전인「불교총전」의 편찬과 총 지종의 교리와 실천법의 핵심을 이루 고 있는「대승장엄보왕경」과「대승이 취육바라밀다경」을 역경하여「밀교장 경」이라는 제명으로 한 권의 교전으 로 편찬한 것이 가장 돋보이는 대목 다. 또 하나 역사적인 일재사건은 바 로 총지종의 신앙대상자 본존(本尊) 을 관세음보살의 본심진언인 육자대 명다라니를 문자만다라로써 봉안하기 로 결정했다는 점이다. 종단의 교역자인 아사리(밀교의 성 직자)의 법복인‘법의’의 의식(衣式) 을 결정한 점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 (史實)이다. 총기 원년(서기1972년) 11월 11일 서울 충정로 선교부에서 스승과 교도들이 모인 자리에서 대성 사께서는 총지종의 신앙대상인 본존 과 불사의식을 다음과 같이 결정 발 표하셨다. 「첫째, 본존은 육자대명을 봉안한 다. 둘째, 불전(佛前) 공양물은 헌화 (獻花)와 소향(燒香)에 한하고, 정수 (淨水)와 촛불은 쓰지 않기로 결정한 다. 셋째, 법의(法衣)의 의제(衣制)는 신라시대의 상의양식과 같이 깃을 밑 에까지 내려서 만들고 소매는 작은 홍탁소매로 하며 색조는 백·황· 홍·황의 4색으로 사종수법에 맞추어 착용한다. 넷째, 가사는 금가사(襟袈 裟)로 한다. 흑자색지(黑紫色地)에 육합상을 세 곳에 백색(白色)으로 자 수(刺繡)를 한다. 목에 걸면 뒤 항부 (項部)에 육합상이 보이고 전면은 양 흉부(兩胸部)에 육합상이 보이며 규 격에 있어서 폭은 두겹으로 만들어서 반을 접는 것이 6Cm5푼, 길이가 140Cm 되도록 하는 것이다. 금가사와 법의에는 전면에 한 개씩 의 4지결(智結)의 흑색노끈으로 단추 를 달아서 사용한다.」고 하였다. 종조 님께서는 법의의 양식과 의궤의 제정 에 있어서 큰 원칙을 두고 있었으니 밀교의 사종법(四種法)이었다. 식재, 증익, 경애, 항복의 사종법에 따라 법의를 사색(四色)으로 맞추었 고, 결인을 행할시 손을 감싸는 헝겊 도 사종법의 사색(四色)에 근거를 두 었다. 이것이 사색건(四色巾)이다. 염 주 사용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이 사종법의 사색(四色)에 바탕을 두었 다. 사종법(四種法)에 맞추어 백· 황·적·흑색의 염주를 사용하셨다. 그로부터 6년후, 법의는 흑색 법의 를 주로 착용하는 것으로 바뀌었다. 총기7년(1978)에 개정된 내용은「첫 째, 공식행사와 서원당에서는 흑색 법 의를 입고 기타 백·황·홍색은 사택 에서 수법(修法)을 행할 때만 입는다. 둘째, 전수의 정복은 공식시간·공 식행사·가정방문·기타 공무 집행시 만 착용하고 그 외는 사복을 착용해 도 무방하다. 셋째, 성하(盛夏)에는 상의만 흰색 브라우스로 대용해도 무 방하다.」는 것이었다. 1982년 법의는 다시 개정되었다. 흑 색법의만을 착용키로 한 것이다. 당 시 종령이셨던 록정 대종사께서는 가 사개착불사(袈裟改着佛事)를 올리면 서「종령 및 대종사는 황색 금가사에 법의(法衣)는 자색(紫色)으로 하고, 모든 스승은 흑색 법의에 자색(紫色) 가사를 개착(改着)」하기로 했다. 사색 법의 가운데 자색과 흑색법의 만 남게 되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되 었다. 오늘날과 같은 법의(法衣)의 의제(衣制)는 총기30년(2001년)에 개 정되었다. 종령의 법의와 금가사는 황색법의에 적색 금가사를, 일반 스 승의 경우는 자색 법의에 황색 금가 사를 착용하기로 한 것이다. 제1기에 주목할만한 사실(史實)은 창종전의 제반 여건이 만족스럽지 못 한 가운데서 일궈낸 불사들이어서 그 의미는 더욱 크다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불철주야로 용맹정진하신 창종주 원 정 대성사와 선대 스승님들의 대원력 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제2기 : 입교개종(立敎開宗)과 창종 후의 교단사’ 

제2기는‘로서 총기 원년(1972)12 월24일 이후에서 총기2년(1973) 6월1 일까지로 분류하였다. 창종을 기점으 로 해서 종단의 종제(宗制)가 확립되 기전까지의 시기로 분류하였다. 종제 (宗制)가 확립된 시기를 3기로 규정 하였다. 제2기의 주요 사실로는 사원 도량의 건립과 공식법회 회향서원사 항의 결정을 들 수 있다. 이 시기는 사원도량 건립에 주력했 던 시기였다. 대부분의 사원이 이 시 기에 건립되었다 해도 과언이 아니 다. 자성일 공식법회시에 발원하는 공공서원사항이 이 시기에 만들어졌 는데, 오늘날까지도 그 틀을 유지해 오고 있다. 공공서원사항은‘옴자례 주례준제 총지종교세발전 사바하, 옴 자례주례준제 부국강병국태민안 사바 하, 옴자례주례준제 조국평화통일 사 바하, 옴자례주례준제 일체교도가정 소구여의 사바하, 옴자례주례준제 일 체교도가정제재난 사바하’이다. 


제3기 : 종제(宗制) 확립후의 교단사 

제3기는 총기2년(1973)년 6월에서 총기7년(1978)1월20일까지로 정했다. ‘종제(宗制) 확립후의 교단사’라 이 름을 붙였다. 종단의 모습을 제대로 갖춘 시기라고 볼 수 있다. 가장 활 발하게 교화활동을 펼쳤던 시기이다. 교상과 사상면에서도 괄목상대한 발 전과 기본토대를 이룬 시기다. 주요 사실(史實)로는, 직제와 행정 기구면에서‘종헌종법의 제정, 중앙 종의회 기구 설립, 종무행정시구인 통리원과 심의기구인 원의회의 개원’ ‘용달과의 설치’, ‘재단창립총회 개 최’등을 들 수 있고, 교상과 사상의 면에서 ‘보은시법(報恩施法) 실시’ ‘제1회 강공회 개회’‘반야심경 독송 실시’‘자성일 대중동참 불사법 실 시’‘진택불사법(鎭宅佛事法) 실시’ ‘종단 찬불가 제작’‘전교(傳敎)와 시교(試敎)제도의 실시’‘진호국가불 사의궤의 제정’‘망자(亡者) 천도관 정법(薦度灌頂法) 제정 실시’ 등이 다. 특히 동참불사법의 실시에 주목 하게 된다. 현재 실시되고 있는 동참불공은 이 시기에 만들어졌다. 총기 2년 계축 (1973) 11월14일의 일이다.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매일 공식시간에 동참 불공을 올렸던 것이 아니고 1주간 서 원불공을 하고 마치는 자성일 공식시 간에 교도들이 한 자리에 모여서 나 와 다른 이의 서원이 모두 성취되기 를 발원했다. 사종수법에 근거하여 만들어진 동 참기도법이었다. 그 외에도‘각 사원 의 명칭 변경’‘투명단중법(投名壇中 法) 실시’‘정법시법(定法施法)의 실 시’ 연구기관인 ‘법장원(法藏院)의 신설’‘총본산 건립 착수’‘본산 경 내에 성불탑(成佛塔) 건립’등이 있 었다. 


제4기 : 총본산 건설 후의 교단사 

제4기는 총기 7년(1978) 1월24일부 터 총기 9년(1980) 9월12일까지로 정 하고‘총본산 건설 후의 교단사’라 이름 붙였다. 제4기의 가장 큰 핵심은 총본산 건립이다. 1978년 1월 19일 총본산을 준공하 여 행정기구인 통리원을 총본산 건물 로 이전하고 동년 4월 18일 총본산 총지사 설단불사를 봉행하였다. 그 외에도‘가사봉대 및 행위승서식 봉행’‘원정 종조님의 제2대 종령추 대’‘보주수 진언과 보협수(寶手) 진언, 구소법, 준제연명법(准提延命 法)의 시행’‘총지종의 인사법(성도합 시다) 제정’‘공덕성취법(십선성취법) 의 시행’‘염송법 제정’‘수법기간과 일체 행사의 양력 시행’‘흑백두 수행 법(黑白豆修行法)의 시행’‘단일정진 (單一精進)과 복수정진법(複數精進 法)의 실시’등을 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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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5기 : 종조 열반 후의 교단사 

제5기는‘종조 열반 후의 교단사’ 라고 이름을 붙였다. 종조님의 열반 으로부터 현재까지를 이 시기에 포함 하였다. 9월 8일 열반에 드시고 5일장을 마 친 이후부터 현재에 이르는 시기까지 다. 1980년 9월 8일 밤11시30분 종조 님은 74세의 일기로 세연을 다하시고 열반에 드셨다. 5일장의 장례로 다비 를 마치고 종단은 새로운 종령체제로 돌입했다. 이후 ‘종조 사리친견불사’‘종조 멸도절 봉행’‘교도 결연관정수계 실 시’‘군부대 장병 위문과 본존만다라 봉안’‘장학금 제도 시행’‘종립유치 원 개원 및 현판불사’‘「종조법설집」 출간’‘??정통밀교 기초문답집?? 간 행’‘신규스승 시교(試敎)제도 시행’ ‘전국 합창단 경연대회 개최’‘종립 학교법인 설립 및 동해중학교 인수’ ‘불교방송국(佛敎放送局) 이사 종단 등록’‘한국불교종단협의회 회원 종 단 등록’‘종단 제법규의 전면 개정’ ‘불교텔레비전 공동 설립’‘양부 만 다라 조성 및 봉안’‘불단과 닷집의 장엄’등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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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역사의 출발점 

40년의 역사를 주마간산으로 훑어 보았다. 종조님의 숨결과 선대 스승 님들의 체취를 느꼈을지는 모르겠다. 총지종의 발자취를 정리해서 재차 말 씀드린다면, 제1기의 창종 이전의 역 사는 창종을 위한 준비와 교상확립에 전념한 시기였다면 제2기의 창종과 그 후의 교단사는 종단의 교상과 사 상을 더욱 체계화하고 다양한 교화방 편을 전개했던 시기라 할 수 있다. 수행적인 면에서나 교리적인 면에 서 모든 체계를 갖추어 나갔고, 종단 내외로 교세를 확장시켜 나갔던 시기 였다. 제3기의 종제확립후의 교단사 는 말 그대로 종단의 모든 체제를 갖 추었던 시기였다. 종제(宗制)를 더욱 확립시키면서 가장 활발한 교화활동 을 펼쳤던 시기다. 제4기인 총본산 건립후의 교단사는 총본산 건립에 전 력했던 시기였고, 그 외에 의궤와 제 도의 정비를 계속 이어나갔던 시기 다. 특히, 스승의 인사이동과 신규스 승임명을 통하여 활발한 교화활동의 전기를 마련한 시기였다. 그동안은 제도와 의궤의 확립에 몰두하여 왔다 면, 이 시기부터는 본격적으로 인재 양성에 주안점을 두었던 시기였다. 제5기는 종조 열반의 역사가 기준점 이 된다. 종조 열반 이후의 종단 모습 이다. 종단의 제일 큰 어른께서 열반 에 드시어 종단이 자칫 크게 동요될 수 있는 시기이나 승단과 교도가 흔 들림 없이 일심으로 화합 단결하여 종단을 꾸려 나갔다는 사실이다. 그 이후의 최근 10년간의 주요 사실(史 實)을 들자면, ‘사회복지재단 설립’ ‘전통식 사원 건립’‘국제재가불교지 도자대회 개최’등을 들 수 있다. 종조 원정 대성사의 열반 이후의 역사는 아직도 진행 중에 있다. 종조 열반 이후의 역사를 어떻게 정리할 것인가? 그것은 오로지 후학들의 노 력에 달려있다. 제대로 다듬고 가꾸어 나가야할 책무가 우리들의 몫이자 새 로운 역사의 출발점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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