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불교의 전래와 밀교의 역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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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01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8-04-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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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19 08:59 조회 1,888회본문
신라시대의 밀교승
명랑 법사가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 군대 를 물리치기 위해 건립한 사천왕사의 절터. 이 절터에 목탑이 세워진 흔적이 남아 있다.〈자료 출처 : 블로그 국정영상원〉
경북 경주시 배반동 935-2번지에' 위치한 통일신라시대의 호국사찰 ‘사천왕사지’ 전경. 〈사진출처: 문화재청〉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밀교승으로는 신라시 대의 명랑 법사와 혜통 국사를 들 수 있다. 이외에도 밀본, 불가사의, 현초, 혜초, 혜일, 오진 등의 스님을 들 수 있다.
1) 명랑법사
명랑은 자장율사의 생질로 사문이 되었는데, 선덕여왕 원년(632년)에 당나라로 들어갔다가 선덕여왕 4년(635년)에 신라로 돌아왔다고 한다. 그때 명랑법사가 용궁에 들 어가서 비밀불교의 비법을 전수받고, 황금 천 량을 얻어서 땅 밑으로 잠행하여 자 기집 우물 밑으로부터 솟아나와서 거기다 절 을 짓고, 황금으로 불탑과 불상을 장엄하고 절이름을 금광사라고 하였다.
명랑이 당나라에 갔을 시기에 중국에서 밀 교가 성행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인도승인 선 무외와 금강지가 당나라에 오기 이전시대로 잡부밀교의 형태를 띠고 있었다. 많은 밀교경 전들이 역출되었고, 비를 오게 하는 청우법 이나 천수관음신앙의 천수관음법 등 여러 밀주법들이 유포되었다. 또 다 라니나 신주경들이 많이 번역되었는 ‘ 데, 명랑은 이와같은 경전을 통해 밀교의 비 법을 전수받았던 것으로 짐작된다.
명랑이 문무왕 8년(668년)에 문두루 비법 으로 당나라를 물리쳤다는 기록은 유명한 일 화이기도 하다. 당나라 군대를 물리쳤던 이 문두루 비법은 바로 밀교의 신밀을 말 하는 것이다. 문두루는「무드라」를 음 역하여 붙여진 것으로 바로 결인을 의미한다. 즉 명랑은 결인이라고 하는 - 문두루의 비법으로 외적을 물리쳤던 것이다. 명랑법사가 개창한 ‘신인종 은 바로 ‘인계 결인을 주로 행 하였음을 역설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명랑 법사가 문두루 비법으로 당나라 군대 를 물리치기 위해 건립한 사천왕사의 절터. 이 절터에 목탑이 세워진 흔적이 남아 있다.〈자료 출처 : 블로그 국정영상원〉
『삼국유사』의 기록을 보면, 명랑이 용왕에 게 전수받은 비법으로 경주의 낭산의 신유림에 단을 쌓고 다섯 방위 의 신을 모시고 유가승 12인과 같이 문두루의 비법을 행하여 풍랑을 일으켜 바다를 건어오던 당나라 군대를 싸우기도 전 에 모두 침몰시켰다고 한다. 그리하여 단을 쌓았던 자리에는 절울 지어 사천왕사라 하였고, 명랑은 신인종의 종조 로 숭앙되었다고 한다. 그 이후 신인종 은 신라 전역에 퍼졌고 여러 차례 외적의 침 입이 있을 때마다 이 신인의 주력으로 물리쳤다고 한다. 특히 김유신 등이 건립한 경주의 원원사는 통일신라시 대 문두루비법의 중심도량이기도 하였다.
2) 혜통국사
명랑과 더불어 혜통 또한 신라시대의 대표적인 밀교승 이다.『삼국유사』권5- ‘신주편혜통항룡조’에 혜통국사의 일대기 가 전해지고 있다. 혜통국사는 문무왕 시대의 스님으로 중국 에 들어가서 선무외 삼장으로 부터 밀교의 비법을 전수받았 다고 한다. 그런 점에서 혜통 은 당시 중국에 퍼져있던 정 순밀교를 전수받은 것으로 짐작된다. 그러나 중국에 선무외, 금강지의 양 삼장에 의해서 체계 화된 정순밀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 신라 에서 잡부밀교가 전래되었던 것으로 보여진 다. 즉 명랑과 혜통 이전에 이미 여러 가지의 밀교적 요소들이 있어 왔던 것이다.
여기서 잠깐. 혜통국사와 선무외의 관련설 에 대해서는 짚어봐야 할 부분이 있다.『삼국 유사》의 혜통국사 전기를 보면, 선무외 삼장과 관계되는 기록이 나오고 있는데, 혜통국사 가 중국으로 간 시기와 선무외가 중국에 왔 다는 입당 연대가 다소 차이가 있다는 점이다. 이들 양자간에 교류가 있었을까하는 의문점을 갖게 된다. 선무외 삼장이 당나라에 , 들어온 연대는 개원 4년설이 유력하다. 이때가 당 현종대로서715년이다. 그런데 혜통국사가 당나라에서 귀국한 연대는 인덕 2년, 즉 665년이다. 문무왕 5년 때의 일이 다. 혜통이 신라에 돌아온 후 50년이 지난 후 에 선무외 삼장이 중국 장안으로 도착한 것 이다. 그렇다면 혜통은 누구에게 밀교를 받았 던 것일까? 연대 차이가 있음을 감안한다면, 과연『삼국유사』의 기록은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러한 점은 여전히 의문으로 남는다. 이러한 의문점이 있기는 하지만 일반적으로 학계에서는『삼국유사』의 기록을 인정하는 분위기다.
혜통 국사가 신라의 대표적인 밀교승이었다 는 사실은『조선불교통사)』에 잘 나타나 있다. 기록을 보면, ‘혜통화상이 진 언종의 개조이며 해동 밀종 에는 오로지 혜통 밖에없다’ 고 하였다. 이 기 록을 비추어 볼때 혜통은 신라밀교에 있어 지 대한 영향을 미쳤고 한국밀교사에,중요한 위 치에 있음을 짐작할 수 있다. 혜통의 밀교가 중국 선무외브의 밀교를 그대로 닮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혜통이 개종한 밀교의 종명에서 잘 나타나 있다.
혜통의 밀교를 총지종 혹은 진언 종이라 이름하는데, 종지는 다 라니, 즉 진언이란 뜻으로 ‘한량없이 많고 깊은 뜻을 섭지하고 기억 하여 잃지 않으며, 온갖 선법을 능히 가지고, 갖가지 악법을 막아주고 물리 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총지’가 ‘진언 다라니’이므로 혜통의 총지종은 곧 진언 다 라니를 수행방편으로 삼고 있는 정순 한 밀교의 형태였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개 성의 총지사, 전주의,주석원,경주의 신충봉성사 등이 총 지종의 중심도량이었다.
3) 밀본 법사
그 외에 명랑과 동시대 사람으로 밀본 법 사(짜 0)를 들 수 있다. 그는 주술에 능 하였으며 선덕여왕을 비롯한 재상들의 병을 가지법으로 고치는 등 여러 가 지 기적을 보여 널리 민중들에게 선망되었다. 밀본은 명랑과 혜통 보다 앞서서 신라 초전기 불교에 밀교 신앙을 태 동시켰던 분이다. 밀본은『약사경』을 치병주술타에 사용하였는데, 이는 다 라니경전이 신라시대에 널리 성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약사경』은『관정경(1려 쎄)』에 편입되어 있는 경으로 약사여래가 일 체 중생의 질병을 치료하여 고통에서 벗어나 게 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관정경』은 전 체적으로 업설을 중심으로 치병제액의 주술을 설하고 있는 경전이다. 밀교가 신라불교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 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밀본은『관정경』에 입각하여 강력한 치병 주술을 행한 신라 최초의 밀교승 이라면, 명랑법사는『관정경』에 입각해서 밀 교의례에 따라 호국법회를 행하였다는 점에 주목된다. 밀교가 호국법회로 자리잡고 있었 다는 사실은 그만큼 신라불교에서 밀교가 국 가적으로 큰 위처를 점하고 있었음을 보여주 는 것이다. 백좌강회와 팔관회』를 행하였다는 점,『관정경』에 의한 문 두루 비법을 행하였다는 사실 등은 이미 신 라 불교에 호국법회로서 밀교 의례가 깊숙이 스며들어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주 술의례에 있어서 호국사상과 유가 사상이 담겨 있는『금광명경)』,『대방광십륜경』등의 밀교경전이 활용되었다는 점은 신라 불교가 곧 밀교의 호국의례였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4) 그 외의 밀교승
이외의 신라 밀교승으로 혜일, 혜초, 명효, 무원, 무루, 현초, 의림, 오진, 불가사의, 균양 등이 활동하였고, 고려시대에는 도선, 광학, 대연, 담제, 홍법, 묘청 등이 활동하였다. 그
러나 상세한 전기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3, 밀교 종파
신라시대의 밀교종파로는 신인종 과 총지종이 있었다는 사실은『삼국 유사』에 전해지고 있다. 명랑은 선덕여왕 원 년(632년) 중국에 들어가서 수학한 후 귀국 하여 금광사를 창건하고 신인종을 세웠다. 명랑은『불설관정복마봉인대 신주경』에 의한 불보살의 결인의 비법, 즉 문두루비법을 전래 하였다. 문두루비법은 신인을 뜻하는 것으로 손으로 결인을 맺는 수행법을 말하는 데, 신인종의 종명은 바로 여기에서 유래한 다. 신인종 계통을 계승한 고승으로는 안혜, 낭융, 광학, 대연 등이 있다. 고려 태조 왕건 의 건국에서도 밀교의 비법과 호국사상이 뿌 리를 내리고 있었고 개성에 현성사주) 를 지어 밀교의 근본도량으로 삼았다는 기록 이 전해지고 있으나 이들 고승들에 대 한 전기는 미상이라 자세히 알 수는 없다.
신라시대의 또다른 밀교종으로는 혜통이 세운 종지종을 들 수 있다. 종지는-진 언 -다라니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총지종이 라는 종명은 곧 신주 - 진언을 주로 행하는 종단임을 추측케 하다. 이 총지 종의 종명이 처음에는 ‘진념업’이라 불려지다가 고려말 내지 조선초에 와서 총지종으로 개명된 것으로 추정된다.
고려를 거치며 융성하였던 밀교는 조선시 대에 오면서 오백 년의 기나긴 법난의.늪에 빠지게 되면서 밀교종파도 파란의 세월을 보 내게 되었다. 조선 태조는 건국 7년에 88개의 사찰만 남겨두고 모든 사찰을 폐지하였고, 태 종은 12개의 불교종파를 7개로 통폐합하였으 며, 세종은 이를 다시 선종과 교종으로 통합하고 각각 18개의 사찰만을 존 속시켰다. 밀교의 경우 신인종은 중 도종에 합쳐져 중신종으로 되었다가 결국 교종에 병합되었고, 총지종은 율종인 남산종과 합쳐 서 총남종으로 되었다가 마지막으로 선종에 병합되었다.
결국 신라의 명랑법사와 혜통국사가 세웠 던 밀교종파는 조선시대에 접어들면서 교종 과 선종에 흡수되어 그 이름마저 소멸되고 말았던 것이다. 여기에 그치지 않고 선 . 교의 양종까지도 조계종이라는. 하나의 종 명으로 묶어 버렸다. 오늘날 한국불교에는 마 치 조계종만이 있어 왔던 것처럼 오해를 받 는 이유 중의 하나이다. 조선조에 쇠퇴의 길 로 접어든 불교는 조선조 일부 왕들이 불교 옹호정책을 펴는 가운데 완전히 사라지지 않 고 그나마 명맥을 이어갈 수 있었으나 불행 하게도 밀교는 통불교 속에 융합되면서 거의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특히 조선말 일제 36 간의 식민탄압 속에 불교 뿐만 아니라 민족 의 모든 문화가 말살되었고 승려의 도성출입 이 금지되는 등 일제하의 한국불교는 쇠퇴의 길을 걷게 되므로써 밀교는 기억에 사라진지 오래되었다. 그러나 통불교 속에 융합되어 사 라졌다고 여겨진 밀교는 여전히 그 흔적이 남아 있다. 치취를 감춘 것이 아니라 한국불 교의 역사 속에 그대로 살아 숨쉬고 있다. 모 든 의식과 작법들이 곧 밀교의 의궤요 수법 들이기 때문이다. 진언과 다라니, 의궤작법이 그대로 녹아 있기 때문이다. 여기에 해방 이 후 현대 한국밀교종단이 탄생하면서 한국밀 교는 새로운 중흥을 맞게 되었다. 질서정연한 교상과 사상으로 밀교는 깊은 잠에서 깨어난 것이다.
-밀교연구소 법경 정사
(다음호에서는 '현대 한국밀교종단의 탄생과 앞 으로 나아갈 방향’ 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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