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대 달라이라마 텐진 갸초(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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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80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3-03-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밀교인물사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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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3-03-06 12:10 조회 1,558회본문
달라이라마 14세의 어릴 적 이름인 하모된둡이 고향을 출발해 라사에 도착하는데는 석달이 걸렸다. 1940년 겨울 하모 된둡은 포탈라궁으로 이동해 공식적으로 달라이라마 13세의 환생으로 인정되었고, 1940년 2월 22일 정식으로 즉위식을 가졌다. 하모 된둡은 조캉사원을 방문해 정수리 머리카락을 손가락만큼 남겨두고 삭발한 계사로부터 나머지 머리카락을 잘라 정식으로 사미계를 받는 타푸의식을 진행하였다. 이때 새로이 받은 이름은 ‘잠뻴 아왕 롭상 예셰 텐진 갸초’였다.
이때부터 성하는 기초교육을 받기 시작했는데 그 전통은 인도 나란다대학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것은 석존께서도 공부했던 인도 오방명의 일부인 논리, 예술, 문법, 약학 등이 포함되어 있고, 불교철학으로 넘어와서는 계율, 구사, 현관장엄론, 입중론, 논리학이 그 중심을 이룬다. 1950년 여름 티벳에는 큰 지진이 일어나 텐진 갸초가 머물던 놀부링까궁이 흔들렸다. 이틀 후 티벳의 섭정 타트라는 캄 지역정부로부터 중공군의 침략이 있을 거라는
다급한 전보를 받았다. 8만이 넘는 현대식 장비와 훈련받은 중공군이 8천5백명도 채안되는 보잘 것 없는 방위군을 무력화하는데는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았으며 이때부터 티벳은 1959년 완전히 합병될 때까지 중공의 통제하에 놓이게 되었다. 11월초 암도에 있던 텐진 갸초의 형이 라사에 도착했는데 중공과 인접했던 암도지역은 이미 인민재판을 비롯해 중공의 직접적인 간섭과 본격적인 통제가 시작되었다.
사정이 급박해지자 텐진 갸초는 그의 나이 15세인 당해 1950년 11월 17일, 놀부링까 궁에서 티벳의 종교적, 정치적 지도자로 자리에 올랐다. 달라이라마 14세는 죄수들을 석방시켰다. 또한 새 수상으로서 승려인롭상 따시와 재가자인 루캉와 2인을 임명하였다. 달라이라마는 수상들과 상의 끝에 미국과 영국, 네팔에 티벳의 원조를 구하는 사절단을 파견하고 중공에도 사절단을 보내 협상하려 했지만 서구의 태도는 소극적이었고 오히려 중공은 티벳지배가 공고히 되고, 상당한 영토가 중공에 편입되었다. 급기야 1951년 5월 23일 티벳은 중공측의 위협과 협박에 의해 17가지 조항에 강제 합의함으로써 끝내 중공의 자치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달라이라마 14세는 외부로는 중공의 완전 병합 압력을 누그러뜨리고, 내부로는중공에 대한 국민들의 분노를 진정시키는 양면의 고통을 마주해야 했다.
1954년 7월부터 1955년 6월간 달라이라마 14세는 모택동과 주은래, 등소평과 같은 중공의 지도자들을 만나기도 하였다. 한편 달라이라마 14세는 1956년 11월부터 1957년 3월까지 인도를 방문하여 붓다 탄생 2500주년의 기념행사에 참석하기도 하였다. 1958년 말 달라이라마 14세는 정치문제와 별개로 겔룩빠의 교과과정에 따른 사원대학의 모든 일정과 과목을 수학하고, 마지막으로 최고 학위인 게셰 하람빠의 시험을 치루어 합격하였다.
티벳은 전통에 따라 네충이라는 수호존을 신탁으로 강림토록 하여 앞날의 조언을 구하였다. 수호존은 지체없이 조국을 떠나라는 답변이 돌아왔고, 드디어 1959년 3월 17일 속인의 복장으로 변장한 달라이라마 14세는 링린뽀체와 티장 린뽀체를 비롯한 왕사와 고승, 정부각료 일부와 가족으로 구성된 일행을 구성해 포탈라궁을 탈출하여 말과 도보로 혼신의 탈출을 감행하였다. 라사를 출발한 지 3주의 쉼 없는 탈출행로 끝에 1959년 3월 31일 달라이라마 14세 일행은 드디어 인도 국경에 도착하여 인도정부 수비대의 안내로 현재 인도 아누나찰 쁘라데쉬 주에 해당되는 봄딜라에 무사히 도착하였다. 4월 20일 달라이라마 14세와 인도정부의 네루수상이 만나 달라이라마 4세 일행에게 인도에서의 정착지와 이후 뒤따를 수많은 인도 망명 티벳인들의 정착촌 지원에 협조하기로 약속하였다.
의학사(醫學史) 연구자인 이현숙 한국생태환경사연구소장은〈신라사학보〉에 실은 논문 「생태환경으로 본 신라멸망에 대한 시론」에서 한랭건조한 기후변화와 천연두의 창궐로 통일신라가 몰락에 이르렀다고 최근 주장했다. 불교학자로서 인류를 둘러싸고 있는 자연기후와 전염병들이 불교문화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새로이 연구해 볼 화제이다. 아마 전쟁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에 풍작마저 따른다면 문화, 예술, 건축 등이 발전하고, 화려해질 것이다. 반면 전쟁과 기근이 발생하고 생존의 위협을 받을 때에는 밀교나 선불교와 같이 실용적이며 간결한 이론과 수행체계가 보다 발전할 것이다.
본고의 주제인 밀교를 중심으로 역사적 추를 나란다대학과 티벳불교로 옮겨보면 티벳불교는 혹독한 기후와 불안한 정치적 변동을 극복하고 논리학과 밀교를 중심으로 실용성이 강한 독자적 불교를 세웠다. 특히 15만 경권에 육박하는 삼장의 보고를 실천중심의 도차제 양권으로 구성한 쫑카빠의 『보리도차제론』과『비밀도차제론』은 인류 정신문명의 보고라 일컬어도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티벳은 현재 나라를 잃었지만 왕실의 지지에 힘 입어 불교교단은 오래도록 불교연구와 수행에 몰입할 수 있었고, 인도 나란다대학을 계승, 발전시켜 불교를 세계의 정신적 스승으로 이끄는 새로운 운명을 수행하고 있다. 티벳에 동정하는 개인이나 단체는 많지만 밀교종단으로서 심오한 밀교수행의 깊이를 아는 단체보다 티벳불교의 역사와 비극에 대한 이해는 누구도 미치지 못할 것이다.
1959년 게셰 하람빠 학위 시험을 치루는 달라이라마 14세 텐진 갸초((Photo/OHHDL) 출처=달라이라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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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라마 14세의 즉위 직후, 1950년 11월 17일 포탈라궁((Photo/OHHD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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