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길에 찍힌 발자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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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14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05-03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교리/설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심일화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1 09:11 조회 2,487회본문
눈길에 찍힌 발자국
스님은 공양을 마치고 늘 뒤란으로 돌아 갔다.
암자 뒤란에는 산죽들이 파랗게 울타리 를 치고 있었고, 굴뚝만한 돌배나무 한 그 루가 암자 지붕에 가만히 손을 얹고 있었 다. 그리고 주춧돌처럼 생긴 반반한 돌은 돌배나무 발 밑에 놓여 있었다.
스님은 돌 위에 밥덩이를 두어 숟가락 놓으며 중얼거렸다.
“관세음보살”
그러자 산죽 숲속에서 얼굴을 삐죽 내밀 고 있던 산토끼가 스님에게 눈을 맞춰주었 다. 스님이 가고 나자, 산토끼는 살금살금 다가와 밥덩이를 먹었다. 스님은 그 산토 끼를 ‘화엄이’라고 불렀다. 돌 위에 밥덩 이를 놓고 나서는, “화엄아, 공양 시간이 다.”하고 산죽 숲을 바라보곤 하였던 것이 다. 그런데 산토끼는 그 밥덩이를 다 먹은 적이 없었다.
언제나 조금씩 남겨두어 자기보다 더 작 은 생명들이 날아와 먹게 하였다. 뭇 생명 과 나눠 먹을 줄 아는 것을 보면 사람보다 못할 게 없는 산토끼였다. 그래서 스님은 그 잿빛 산토끼를 암자에서 함께 수행하는 친구로 여겼다.
“참 기특하기도 하지. 너를 보면 인간이 라는 내가 부끄럽구나.”
산토끼가 가고 나면 흩어진 밥알을 쪼기 위해 산새들이 날아오곤 하였던 것이다. 이따금 재를 지내고 나서 과일 조각이라도 특별 음식으로 나오는 날이면 다람쥐, 청 설모 등도 돌 주위로 다가왔다.
화엄이는 하루도 빠지지 않고 암자를 찾 아왔다. 스님 역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화 엄이에게 밥덩이를 공양하였다. 그러던 겨 울 어느날 이었다.
폭설이 며칠째 내리고 있었다. 눈이 맨 먼저 한 일은 산길을 지워 없애버린 것이 었다. 돌배나무 무릎까지 차오른 눈은 산 짐승들의 왕래도 끊어지게 하였다.
암자는 적막해지고 스님의 걱정만큼 눈 이 쌓여만 갈 뿐이었다. 숨소리처럼 가늘 게 들려오는 기척이 있다면 산죽이 내는 소리가 전부였다.
산죽은 가지가 휘어지면서 눈을 받을 만 큼 받았다가는 털어내곤 하였는데, 그때마 다 묵은 올빼미가 날갯짓하듯 ‘푸드득 푸 드득’ 소리를 내는 것이었다. 스님은 암자 에서만 하루 종일 앉았다 누웠다 하면서 망연자실 퍼붓는 눈을 바라보았다. 뚫린 길이라곤 우물로 가는 길과 화장실 가는 몇 걸음 길이 고작이었다. 사람이 살아가 는 데 필요한 이 세상에서 가장 짧은 길이 었다. 저 산밑 마을까지의 산길은 이미 눈 이불에 덮여 사라지고 없었다.
며칠 후에는 양식이 바닥나 쫄쫄 굶어야 할 형편이었다.
“이러다간 봄이 될 때까지 암자에 갇히 게 될지도 모르겠구먼. 화엄이가 나타나지
않는 걸 보니 굉장한 눈이군. 이럴 줄 알 았으면 겨울 양^을 미리 준비해 둘걸. 지 금 금강이는 얼마나 애를 태우고 있을까.”
금강이는 스님과 암자에서 함께 살다가 경전을 공부하기 위해 큰 절에 내려가 있 는, 올해 열네 살 난 사미승이었다. 금강이 는 큰 절로 온 편지나 일정한 때마다 양^ 을 가져오는 어린 스님이었다. 스님은 이 생각 저 생각으로 밤에도 잠을 못 이루었 다.
눈의 무게를 견디지 못해 몸을 뒤채는 산죽처럼 뒤척이며 새벽을 맞이하곤 하였 다. 금강이 또한 암자에 갇혀 있을 스님 생각으로 발을 동동 굴렀다.
양^을 가지고 가야 하는데, 산길이 숨 어버렸으므로 달리 방법이 없었다. 금강이 는 공양할 때마다 숟가락이 목탁처럼 떠올라 밥이 잘 넘어가 지 않았다. 젊은 스 님들이 그런 금강 이의 마음을 다 독거려 주었지 만 금강이는 퍼붓는 눈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 암자에 계신 스님은 지혜가 많은 분이시니 너 무 걱정하지 말거라.”
“스님도 잘 알지 않습니까. 보름마다 - - 제가 %을 가지고 올라 간 것을.”
금강이는 너무 태연한 얼굴을 하고 있는 길잡이 스님이 얄밉기도 하였다.
“눈이 내려서 그런 걸 어떡하나. 아마도 스님께서는 이런 때가 올 것을 예견하시고 암자 부엌의 옹기에 저장해 둔 양식이 있 을 거다.”
“그래두 전 암자를 다녀와야 마음이 놓 이겠어요. 그러니 길을 잘 아는 스님이 안 내를 해주면 좋겠어요.”
“늘 네 혼자서 다니지 않았느냐.”
“제가 다니던 지름길은 위험해요. 낭떠 러지 길에다 가파른 계곡을 몇 개나 건너 야하거든요.”
금강이가 울상을 짓자, 길잡이 스님이 합장을 하며 말했다.
“그럼, 좀 돌아가는 길이기는 하지만 길 잡이 스님을 내가 소개해 줄까.”
“그래 주세요. 스님.”
마침내 금강이는 눈이 그친 다음날 길잡 이 스님을 소개받았다. 길잡이 스님은 눈 덮인 산길이라 자신이 없지만 그래도 위험 하지 않은 길이니 함께 가보자고 나섰다.
“좀 먼길이지만 나를 따라 오너라.”
금강이는 양^을 짊어지고 길잡이 스님 처럼 신발에 감발을 쳤다. 싸리나무를 짚 으로 구부려 만든 감발은 눈길에 미끄러지 지 않기 위해 차는 덧버선 모양이었다. 보 기에도 아주 둔하게 생겨 걸음을 더디게 할 것 같지만, 실제로는 쌍인 눈에 잘 빠 지지 않고 성큼성큼 걷게 해 주었다. 그런 데 길잡이 스님은 큰 절을 빠져 나와 산길 초입에 들어서서는 기세를 누그러뜨렸다.
“엄청 내렸구나. 나무들이 저렇게 고개 만 내밀고 있으니.”
“거 보세요.”
길잡이 스님이 소개하겠다는 산길 부근 도 눈이 차올라 어디가 어딘지 분간이 잘 안되었다.
“어디다가 발을 내딛어야 할지 막
길잡이 스님이 당황해
하자, 금강이가 입을
삐쭉 내밀었다.
“거 보세요. 큰 절로 되돌아 갈 수밖에요.” “ 아니다.
지금 기도를 하면 관세음 보살님이 우 리 소망을 들어주실 거 다. 자, 합장 하고 기도를 하 자꾸나.” 금강이는 기어
“관세음보살님, 암자로 가는 길을 가르쳐주세요.”
그때 합장한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길 잡이 스님이 소리쳤다.
“산짐승 발자국이다.”
산짐승이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선명한 발자국이었다. 어린 노루 발자국 같기도 하고, 사슴 발자국 같기도 하고, 새 끼 멧돼지 발자국 같기도 하였다. 흰 종이 위에 도장을 찍듯 꾹꾹 찍혀져 있었다.
“봐라, 이 산짐승 발자국을 어서 따라가 보자.”
온 산이 눈에 덮여 버리자, 먹이를 구하 러 큰 절까지 내려온 산짐승이 분명하였 다.
“산짐승 발자국을 따라가다 보면 산짐승 굴이 나오겠죠.”
“아니다. 나는 안다. 이런 날은 먹이를 구하러 분명히 저 산속의 암자 부근도 서 성거렸을 게다.”
“우리 스님이 계신 암자 말입니까.”
“그렇다.”
길잡이 스님과 금강이는 산짐승이 찍어
놓은 발자국을 따라서 산을 올라갔다. 산 등성이를 하나 넘은 뒤, 길잡이 스님이 얼 굴에 미소를 머금었다.
“발자국을 잘 보아라. ’ 내가 찾던 길이 다.” ,
눈에 익은 수백 살 된 느티나무가 지팡 이를 짚은 할아버지처럼 쉬고 있었다. 그 리고 조금 더 오르자 곰바위가 보였고, 능 선을 넘어서자마자 처녀바위가 흰 눈을 면 사포처럼 쓰고 있었다. 이제 길잡이 스님 은 암자까지 찾아가는 일을 걱정하지 않았 다. 두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을 것 같 았다.
큰 절 부근에서부터 시작된 산짐승 발자 국도 계속 찍혀져 이어지고 있었다. 얼마 쯤 눈길을 걸었을까.
암자 추녀 끝에서 들려오는 풍경소리가 금강이를 먼저 맞아주었다. 그제야 길잡이 스님이 잠시 쉬어가자고 하였다. 그러나 암자 스님이 보고 싶은 금강이는 마음이 급했다. 산짐승 발자국은 암자 부근에서 끝이 나 있었다.
암자는 조용하였다. 스님은 참선을 하고 있는지도 몰랐다. 빈방에서 지그시 눈을 감은채 참선에 들면 몇 시간이나 돌부처처 럼 꿈쩍 않는 것이었다.
암자 창호에 비친 햇살은 눈만큼이나 하 얗게 빛났다. 금강이는 암자의 스님을 작 은 소리로 불렀다.
“스님, 스님“
그때 길잡이 스님이 금강이의 팔을 잡아 끌며 말했다.
“쉿, 조용히 하거라. 금강아, 저 산토끼 가 바로.”
산토끼 한 마리가 암자 뒤란에서 나타나 우물 쪽으로 껑충껑충 사라지고 있었다. 화엄이었다.
암자 스님에게 날마다 공양을 받았던 잿 빛 산토끼였다. 금강이와 길잡이 스님은 눈을 둥그렇게 치뜨면서 서로 약속이나 한 듯 ‘관세음보살’을 외었다.
산토끼의 엉덩이마저 눈에 묻히자 소나 무 잔가지에 얹혀 있던 눈꽃이 후두둑 졌 다. 금강이와 길잡이 스님에게 응답을 보 내듯 낙화처럼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길 잡이 스님이 떨리는 소리로 말했다.
“금강아, 저 산토끼야말로 우리를 여기 까지 무사히 오게 한 관세음보살님이시
, 하
다.
그러고 보니 그들을 암자꺄지 데리고 온 발자국은 저 산토끼 발자국이 분명하였다. 화엄이가 찍어놓은 발자국은 마치 꽃잎을 떨어뜨려 놓은 것 같았다. 그제야 금강이 는 손나팔을 만들어 소리쳤다.
“화엄아, 화엄아!”
금강이의 외침은 메아리 없이 텅 빈 산 으로 퍼져나갔다.
메아리도 눈 덮인 산길을 잃어버린 듯 돌아오지 않고 있었다. 또다시 떨어지는 눈꽃이 금강이의 선한 눈망울에 어리었다.
“작은 생명이 자연의 일부라면, 자연은 이 렇듯 우리에게 보여줍니다. 나눔의 실체와 환원하는 순리의 모습을....”
-심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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