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도화상의 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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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13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03-08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교리/설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심일화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1 08:08 조회 2,637회본문
아도화상의 전법
선산 도리사
아직 겨울이라기엔 이른 늦가을이었다. 옷 은 비록 남루했지만 용모가 예사롭지 않은 한 고구려인이 신라 땅 일선군(지금의 경상 북도 선산)에 있는 부자 모례장자 집을 찾아 왔다.
『어떻게 제 집엘 오시게 되었는지요?』
모례장자는 행색과는 달리 용모가 순수한 낯선 객에게 점잖고 융숭하게 대하면서도 일 말의 경계를 금할 수 없었다.
『나는 묵호자라는 고구려 승려입니다. 인 연있는 땅이라 찾아왔으니 나를 이곳에 묵을 수 있도록 주선하여 주십시오.』
당시는 신라에 불교가 공인되지 않은 때인 지라 모례장자는 묵호자의 불법 에 관한 설명이 쉽게 납득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고는 전생부터의 인연이었는지 아 무래도 낯선 객이 신비스럽고 큰 불도를 알 고 있는 대인인 듯하여 지하에 밀실을 지어 편히 거처케 했다.
이 무렵 조정에서는 중국에서 의복과 함께 보내온 향의 이 름과 쓰는 법을 몰라 사람 을 시켜 나라 안을 두루 돌아다니며. 알아보게 했다.
이 소문을 들어 묵 호자는 사람을 불러 친히'일러줬다.
『이는 향이라는 것 으로 태우면 그윽한 향기가 풍기지요. 만 일 이를 태우면서 정 성이 신성한 곳에까지 이르도록 간곡히 축원하 면 무슨 소원이든지 영험 이 있을 것입니다.』
그 후 얼마가 지난 뒤 나라에 서는 묵호자를 청하는 사신을 보내 왔다.
『공주마마가 위독하옵니다. 백방으로 약을 쓰고 의원을 불러 치료를 했으나 전혀 효험 이 없어 이렇게 모시러 왔사오니 어서 궁으 로 함께 가주시지요.』
불법을 펴기 위해 숨어서 때를 기다리던 묵호자는 때가 온 듯 선뜻 승낙하고 서라벌 로 항했다.
묵호자는 공주가 누워 있는 방에 들어가 향을 피우고 불공을 드렸다. 그윽한 향기가 방 안에 차츰 퍼져 가득하고 묵호자의 염불 이 끝나자 공주는 감았던 눈을 스르르 뜨면 서 제정신을 찾았다.
왕은 기뻐하며 묵호자에게 소원을 물었다.
『빈승에게는 아무것도 구하는 일이 없습니 다. 다만 천경림에 절을 세워서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의 복을 비는 것을 바랄 뿐입니 다.』
왕은 즉시 이를 허락하여 불사를 시작케 했다. 묵호자는 그때부터 숨겨 둔 불명 아도 란 이름을 쓰기 시작했다.
아도화상의 어머니 고도령은 중국에서 온 사신 아굴마와 연정이 깊어 아도를 낳게 되 었다. 그 후 아도가 다섯 살이 되자 고도령 은 아도를 출가시켰다. 총명하여 어른들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던 아도가 16세가 되던 해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찾아와 모든 사연을 이야기하고는 아도를 중국으로 보냈다. 아도 는 중국에 가서 아버지 아굴마를 만나고는 현창 화상 문하에 들어가 3년간 공부한 후 고구려로 돌아왔다.
어머니 고도령은 아들을 만나 반가웠으나 내색하지 않고 다시 신라 땅으로 보냈다.
『신라땅에는 천경림을 비롯하여 7곳의 큰 가람터가 있으니 이는 모두 불전 의 인 연지로서 앞으로 불법이 깊이 전해질 곳이 다. 그곳에 가서 대교를 전하면 응당 네가 이 땅의 개조가 될 것이다.』
아도는 어머니의 이같은 가르침을 잊지' 않 고 수행에 전력하며 불법을 폈다.
그러던 어느 날. 왕이 세상을 뜨고 새 임 금이 등장하자 나라에서는 하루아침에 아도 화상을 해치려 했다. 아도는 제자들과 함께 다시 모례장자의 집으로 돌아왔다.
그들은 그곳에서 경을 가르치고 설법했다. 많은 신봉자가 따르는 가운데 낮에는 소와 양을 1천 마리씩 길렀다. 그렇게 5년의 세월 이 흐른 뒤 아도화상은 행선지도 밝히지 않 고 훌쩍 그곳을 떠났다. 모례장자가 가는 길 을 물었으나『나를 만나려거든 얼마 후 칡순 이 내려올 것이니 칡순을 따라오시오.』라는 말을 남겼을 뿐이었다.
그 해 겨울.
과연 기이하게도 정월 엄동설한에 모래장 자 집 문턱으로 칡순이 들어왔다. 모례장자 는 그 줄기를 따라갔다. 그곳엔 아도화상이 있었으니 그곳이 바로 신라불교의 초전지인 지금의 도리사 터였다.
『잘 오셨소, 모례장자. 내 이곳에 절을 세 우려 하니 이 망태기에 곡식 두 말을 시주하 시오.』
아도화상은 모례장자 앞에 작은 망태기를 내놓고 시주를 권했다. 모례장자는 기꺼이 승낙을 하고는 다시 집으로 내려와 곡식 두 말을 망태기에 부었으나 어인 일인지 망태기 는 두 말은 커녕 두 섬을 부어도 차지 않았다. 결국 모례장자는 재산을 다 시주하여 도리사를 세웠다.
모례장자의 시주로 절을 다 지은 아도화상이 잠시 서라벌 나들이를 하고 돌아오는데 절이 세워 진 태조산 밑에 때 아닌 복사꽃이 만개 하여 눈이 부셨다.
아도화상은 이에 절 이름을「도리사」 라 칭했고 마을 이 름을 도개마을이라 했다.
도리사에서는 지난
1976년 경내 화엄석탑 및 담장 석축을 정비하다 가 아도화상 석상을 발견했 다. 같은 해 탑 해체 작업 중
부처님 진신사리 1과가 출현해 전 국 불자들이 구름처럼 몰려와 친견하고 세인들에게 화제가 됐다.
지금도 도리사 인근 마을에 가면 양과 소 천 마리를 길렀던 곳이라 해서「양천골」「우천 골」이라 부르고, 도개동 웃마을에는 외양간 이 있었다 해서「우실」이라 부른다. 또 모례 장자의 집터는「모례장자터」그리고 우물은 「모례장자샘」이라 하는데 모례장자샘에서는 지금도 맑은 물이 샘솟고 있다. 마을에서는 긴 화강암을 우물 정 자 모양으로 엇갈리 게 짜 맞추어 놓았다.
“옛 신라 땅이 유서깊은 가람터로 자리매김하기 까지 오로지 불교를 널리 펴고, 국가의 안녕을 기 원했던 한 스님의 대원력이 느껴진다”
-심일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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