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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산사 관세음보살과 의상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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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1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09-12-20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교리/설화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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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07:03 조회 2,74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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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불교설화 (39회)

낙산사 관세음보살과 의상대사

의상대사(625~702)는 원효대사와 함께 신라때 가장 존경을 받았던 유명한 고승이다. 그는 문무왕  원년(661)에 불법을 배우고자 중국 당나라로 유학을 갔 다가 많은것을 깨닫고 670년에 귀국한 분이다. 그는 귀 국 후 관세음보살님이 머물고 계신다는 강원도 양양의 낙산사 앞 바닷가로 가서 목욕 재계하고 절벽에 있는 굴 입구를 향하여 7일 동안 정성스럽게 관세음보살 진신을 친견하기 위한 기도를 올렸다.

7일째 되는날 새벽 이제 관세음보살님께서 광 림 하실 때가 되었음을 느낀 의상대사는 기도할 때 깔고 앉았던 방석을 물 위에 뛰우자 불법을 수호하는 신장들이 나타나 의상대사를 굴 속으 로 인도 하였다.

텅 빈 굴 안에서 의상대사는 공중을 향해 합 장을 하고 절 하였다. 어쩐 일인지 관세음 보살 님은 그 모습을 드러내지 않은 채 수정염주 한 벌만 하사 하였다. 의상대사가 수정염주를 받아 가지고 굴 밖으로 나오려는데 동해의 용이 나타 나 여의보주 한개를 바치는 것이었다. 의상대사 는 마음 속으로 생각하였다. 아! 나의 정성이 부 족했기 때문에 관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 지 않으셨구나. 의상대사는 다시 7일을 더 기도 한 뒤 또 굴 안으로 들어가 3일 동안 관세음보 살님을 친견하고자 기도했다 그러자 드디어 관 세음보살님께서 모습을 드러내고서 의상대사를 향하여 말씀하셨다.

“그대가 서 있는 곳 바로 위 산 꼭대기에 대나무가 두 그루 솟아 있을 것이다. 그곳에 절을 짓도록 하라”

의상대사는 뛸 듯이 기쁜 마음으로 합장을 하고 굴 밖 으로 나와 산위로 올라 가보니 과연 대나무 두 그루가 솟아 나 있었다. 그는 이곳이 참으로 관음진신께서 머무 르시는 곳임을 확인하고는 그 곳에 터를 닦고 절을 지었 다. 이 절이 바로 관음기도 도량으로 유명한 지금의 강원도 양양 낙산사 이다.

의상대사는 낙산사를 창건한 후 관세음보살님의 소상  을 조성하여 법당에 모셨는데 그 원만하고 아름다 운 상호가 꼭 살아 움직이는 듯하였다. 그러자 대나무는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그 뒤, 원효 대사가 관음진신을 친견하기 위하여

이 곳 낙산사를 (태아왔다. 처음 원효대사가 남쪽 동구 밖에 이르렀을 때였다. 흰 옷을 입은 한 여인이 논에서 벼를 베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농담삼아 그 여인에게 벼를 좀 달라고 하자 그 여인도 흉년이 들어서 쭉정이 밖 에는 없다고 농담 삼아 말 하였다. 원효대사는 좀 언짢 았다. 다시 원효대사는 그 곳을 지나 낙산사 쪽으로 가 다가 다리가 놓인 시냇가에 이르렀다. 다리 밑에서 한여 인이 빨래를 하고 있었다. 원효대사는 그여인 곁으로 다 가가서 물 한 모금을 청하였다. 그런데 그여인은 깨끗한 물을 떠 주는 것이 아니라 빨래를 헹군 더러운 물을 떠 주는 것이었다. 원효대사는 몹시 불쾌하여 망설 일 것도 없이 얼른 그물을 버리고 위에서 다시 맑은 물을 떠서 마셨다. 바로 그 때였다. 들 가운 데 서 있는 소나무에서 푸른 새 한 마리가 지저 귀면서 말했다.

“제호(뷰호,훌륭한 음료수)를 버리다니; 화상은 관음보살 친견은 단념하시오”

그 소리를 들은 원효대사는 깜짝 놀라서 뒤를 돌아다보니 새는 간 곳이 없고 여인도 보이지 않 았다. 그런데 새가 울던 그 소나무 아래에 신발 한 짝이 벗겨져 있었다. 원효대사는 이상하다는 생각을 하면서 목적지인 낙산사에 도착하여 법당 으로 들어가 관세음보살님께 합장하고 절을 하려 는데, 관음보살상의 좌대 아래에 또 한짝의 신발 이 떨어져 있는게 아닌가?

이에 원효대사는 비로소 앞서 만났던 두여인이 관세음보살님의 화현임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당시 사람들은 새가 울었던 그 소나무를 관음송이라 하였다. 원효대사는 또 전에 의상대사가 관세음보살님을 친견했던 굴 속으로 들어가 다시 관세음 보살님을 친견 하고자 했으나, 풍랑이 너무 심하여 도저 히 들어갈 수가 없었다. 원효대사는 끝내 다시는 친견하 지 못하고 돌아왔다. (삼국유사 권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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