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창건 밀교신앙 유포처 무안 총지사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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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5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4-15 신문면수 10면 카테고리 순례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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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11:55 조회 1,706회본문
‘총지’ 모든 것 지닌 비장 의미
석장승만 외롭게 남아있는 총지사지
총지는 모든 것을 다 지녔다는 비장(채포)의 뜻이다. 밀교 용어로 다라니 (진언)를 의미한다. 총지사는 그 이름에서도 알 수 있듯 밀교신앙을'널리 선 양한 사찰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총지사는 신라의 밀교승으로 대당 구법 순례를 떠났던 혜통이 665년에 개산했다고 한다. 혜통은 혜일, 명랑 과 함께 중국에 건너가 당밀 을 공부한 역사적 인물이고, 개산 시기 인 665년은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킨 이후이므로 .그의 총지사 개산설은 어 느 정도 신빙성이 있다.
총지사는 처음 백운산에 창건되었 으나 고려 현종 7년 에 화재로 소실되어 승달산 기슭으로 옮겨 중창 했고, 임진왜란 때 다시 소실된 것을 재차 중건했다. 지금 총지마을로 불 리는 몽탄면 대치리 일대가 모두 총 지사의 사역이었는데 승려 800여명, 승방 200동에 임'자가 9개에 이를 정도로 대찰이었다고 한다.
다른' 일설도 있다. 인근의 법천사 를 신라 성덕왕 때인 725년 서역 금지국 의 정명 스 님이 세웠다는 이야기가 전해지는데 총지사도 그 무렵에 창건되었을 가능 성이 크다. 만약 바닷길로 들어온 서 역의 전법자가 창건한 절이라면 고구 려 백제로부터 불교가,전래되었다는 기존의 통설을 깨는 사적이 될 수도 있다.
인근의 목우암은 고려 원종 5년인 1264년 원나라의 원명 스님이 세웠다고 한다. 총지사의 소 한 마리 가 그곳으로 건너 온 꿈을 꾸고는 세 웠다고 하니 이미 그 이전에 총지사 가 있었다는 것이 된다.
간다라인 금지국과 원나라의 스님 이 이곳을 찾은 까닭은 서해안이라는 지역적 특성 때문일 것이다. 또 산 이름이 승달산 이 된 것은 원 명의 제자 500여명이 그를 찾아 이곳 으로 와서 깨달음을 이루었기에 붙여 진 것이라 한다.
이는 당시 서해안 지방과 다른 나 라들 간의 교류를 짐작해 볼 수 있는 근거가 된다.
아직 총지사지의 본격적인 발굴작 업이 안되어 그 사료적 전거나 증거
로 내세울 유구조차 없지만 운주사의 비로자나불상군, ‘옴마니반메훔’ 숫 막새, 총지사의 사명, 인근 법천사의 창건 유래 등으로 미루어 보면 이 지 역에 밀법이 성행했던 것으로 추정된 다. 요즘에는 운주사 관련 논서 가운 데 밀교적 연관성이 . 있는 것들이 종 종 나오기도 한다.
아무튼 총지사의 창건은 모호하지 만 고려 현종 7년인 1016년에 화재로 소실되어 지금의 자리로 이건하였으 며 임진왜란 당시 폐찰이 된 것을 다 시 복원하였으나 순조 10년인 1810년
무렵에 또 불타서 사라진 기록은 남 아있다.
그런데 사라진 까닭이 명당으로 소
문난 종지사 뒷산에 중청도 현감을 지낸 임면수가 아버지의 묘를 썼기 때문이었다. 절 뒤에 묘를 쓰자 스님 들이 이를 반대했고 그러자 임씨 문 、중에서 절집을 불태워 버린 것이다. 총지사의 폐사에 관해 이처럼 어처구 니 없는 사연이 전한다.
총지사 폐찰 일화
총지사는 절의 규모 못지않게 불당 건축의 정교함이 호남지방에서 으뜸 ,이었다고 하는데, 1810년(순조 10년) 방화로 전소되기 전까지도 장성 이남 에서 출가하는 승려들의 도승지 였었다.
당시 충청도 석성현감을 지낸 임면 수 는 풍수지리에 미쳐 이른 바 명당 터 찾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 던 듯 싶다. 그가 내노라하는 지관들 을 거느리고 명당 터를 찾아 삼남 일 대를 뒤지다가 마침내 승달산 기슭에 당도했다.
지관들은 이구동성으로 이곳이야말 로 조선 팔도에서 제일가는 명당 터
라고 입을 모았다.
지관들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임 면수는 그 곳을 대뜸 선친의 묘터로 결정해버리고 만다. 당연히 주지 스 님을 비롯하여 800여 명을 헤아리는 스님들이 모두 결사반대를 했다.
그러나 임면수는 법당 뒤뜰의 담장 찌 허물고는 거창하게 묘역까지 조 성4여 아비의 유골을 이장하고 말았 다. 참다못한 젊은 스님 몇이 화풀이 를 겸해 참나무 말뚝을 깎아서 몰래 그 묘에 박아버렸다.
뒤늦게 이런 사실을 알게 된 임면 수가 노발대발하여 절을 모조리 허물 어버리겠다면서 승려들의 퇴거를 종 용했다.
스님들이 불응하자' 강제로 승려들 을 끌어내고 가복들을 시켜서 사찰에 불을 지르고 말았다. 스님들의 항거 는 거셌다. 죽기를 작정한 스님들은 함께 법당으로 들어가 염불을 하며 꿈쩍도 않았다.
임면수는 강제로 끌려나와 인근에 있는 법천사로 보내진 일부의 승려들 을 제외한 기백 명의 승려들을 절과 함께 불살랐다고 한다.
느 총지사지석장승 무안군 민속자료 제23호)
총지사터 입구 양옆에 나란히 서 있는 2기의 돌장승으로, 절의 영역표 시 기능과 더불어 경내에서의 수렵 - 어로 등의 금지를 알리며 잡귀의 출 입을 막는 수호신상의 구실을 했다.
여기서 동북방 계곡에 폐사 된 절터가 남아 있다. 남장승 은 높이 145(311,폭 95(311이며 여장승 은 높이 172011,폭 85011이다.
거대한 화강석을 최대한 자연스럽 게 살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민둥머 리와 이마, 커다란 왕방울 눈, 우뚝 솟은 주먹코와 작은 입이 조각되어 있다. 두 장승의 모습이 거의 비슷하 나, 남장승은 외수염을 하나 더 조각 해 두었다. ,
장승의 앞에는 각각 넓직한 판돌의 제단이 놓여 있으나, 장승과 관련된 의례는 전하지 않고, 다만 할머니들 이 때를 가리지 않고 소원을 비는 곳 이라 한다. 조선 현종 7년(1666) 지 금의 총지사를 중건하면서 함께 세운 것으로 추정된다.
장승은 사찰 입구에 세워져 잡귀 를 막고 사찰경내 에서 살생 을 금하며, 사역 경계를 표시한 신앙석상 으로서 수문신 - 경계신 의 역할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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