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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가셨지만 남기신 참뜻은 불길 속 연꽃처럼 피어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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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4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3-25 신문면수 9면 카테고리 교계종합2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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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10:49 조회 1,751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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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님은 가셨지만 남기신 참뜻은 불길 속 연꽃처럼 피어날 것”
법구, 일체 장엄 없이 가사로만 덮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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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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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사로만 덮인 법구가 다비장으로 이운되고 있다.


일체의 장엄없이 가사로만 덮인 법 정 스님의 법구는 3월 12일 서울 길상 사를 떠나 오후 5시경 순천 송광사에 도착 문수전에 모셔졌다.

스님의 법체는 13일 오전 10시 108 번의 명종이 울리는 가운데 . 영결식. 없 이 대웅전 앞 삼배만을 올리고 다비장 으로 '아윤됐다. 송광사 상가입구 산쪽 약 10 지점에 있는 다비장까지는 약 1시간이 소요됐다.

참나무단 위에 법구를 모신 후 오전 11시 40분경 문도대표 길상사 덕현 스 님 등 9명 스님의 거화로 다비가 시작 됐다. 다비가 진행되는 동안 문중 스 님들의. 즉석 영결사와 추도사가 올려 졌다. 덕현 스님은 “스님은 가셨지만 불길 속에서 스님의 남기신 참뜻은 연 꽃처럼 피어날 것으로 믿는다”며 대중 들과 함께 “화중생연 ”을 외 '쳤다.

다비식에는 조계총림 송광사 방장 보성 스님을 비롯해 법흥 스님, 혜정 스님, 고산 스님, 설정 스님, 현호 스 님, 한나라당 이계진 의원, 민주당 손 학규 전 대표, 등 사부대중 1만여 명이 운집해 법정스님의 입적을 애도했다.

습골 

3월 14일 오전 10시 다비장에서 습 골 의식이 봉행됐다. 법정 스님의 유 골은 송광사...지장전에 마련된 분향소 에 안치되었고, 일부는 송광사 불일암 에 나머지는 서울 길상사로 옮겨졌다.

유골은 길상사헤서 쇄골한 후, 4월 28일 49재 이후 불일암과 강원도 토굴 에서 산골될 예정이다. ‘

유언 

〈상좌들 보아라〉인연이 있어 신뢰 와 믿음으로 만나게 된 것을 감사한 다. 괴팍한 나의 성품으로 남긴 상처 들은 마지막 여행길에 모두 거두어가 려 하니 무심한 강물에 흘려보내주면 고맙겠다. 모두들 스스로 깨닫도록 열 과 성을 다해서 거들지 '못하고 떠나게 되어 미안한4가음 그지없다. 내가 떠 나더라도 마음 속에 있는 스승을 따라 청정수행에 매진하여 자신 안에 있는 불성을 드러내기 바란다.... 덕조는 맏 상좌로서 다른 생각하지 말고 결제 중 에는 제방선원에서, 해제 중에는 불일 암에서 10년간 오로지 수행에만 매진 한 후 사제들로부터 맏사형으로 존중 을 받으면서 사제들을 잘 이끌어주기 바란다….덕진은 머리맡에 남아있는 책 을 나에게 신문을 배달한 사람에게 전 하여 주면 고맙겠다....내가 떠나는 경 우 내 이름으로 번거롭고 부질없는 검 은 의식을 행하지 말고, 사리를 찾으 려고 하지도 말며, 관과 수의를 마련 하지 말고, 편리하고 이웃에 방해되지 않는 곳에서 지체없이 평소의 승복을 입은 상태로 다비하여 주기 바란다.

행장 

법정 스님은 1932년 2월 15일 전남 해남군 문내면 선두리에서 박근배  선생과 김인엽  여사 사 이에서 출생했다. 우수영 초등학교, 목 포상업학교를 졸업하고 전남대 상과대 학 3학년 재학 중 한국전쟁의 참상을 목도하고 출가를 결심한다. 1954년 2월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오대산으로 가기 위해 밤차로 상경한다. 눈이 많 이 내려 길이 막히자 서울 안국동 선 학원에서 당대의 선지식이었던 효봉 스님을 친견하고 대화를 나누던 중 그 자리에서 머리를 깎는다. 그때를 스님 은 “삭발후 먹물옷으로 갈아입고 나니 훨훨 날아갈 것 같았다. 어찌나 기분 이 좋던지 나는 그길로 밖에 나가 종 로통을 한바퀴 돌았다”라고 회고했다 고 한다.

바로 다음날 통영 미래사로 내려가 행자 생활을 한다. 당시 환속 전 고은 시인, 박완일 법사 등이 함께 공부했 다.

1956년 7월 송광사에서 효봉스님을 은사로 사미계를 수계한 스님은 1959 년 3월 통도사 금강계단에서 자운스님 을 계사로 비구계를 수지하고 1959년 4월 해인사 전문 강원에서 명봉스님을 강주로 대교과를 졸업한다.

1960년 초 운허스님과 함께 통도사 에서 불교사전 편찬 작업에 참여하고 이를 계기로 타고난 문재를 발휘, 저 작활동을 시작한다. 이후 지리산 쌍계 사. 가야산 해인사, 조계산 송광사 등 제방선원에서 수선안거0펴규토)를 한다.

4.19와 5.16을 지나온 스님은 1967년 동국역경원 개설에 참여하고, 서울 봉 은사 다래헌에서 운허 스님 등과 함께 동국역경원 경전 번역 작업에 진력한 다. 1972년에는 첫 저서〈영혼의 모음〉 을 발간하고 1973년 불교신문 논설위 원과 주필을 역임했다. 이 시절 함석 헌, 장준하, 김동길 등과 함께 민주수 호국민협의회를 결성, 유신철폐 개헌 서명운동에 참여하는 한편 씨알의 소 리 편집위원으로 참여한다.

1972년 10월 유신이 선포된 이후 유 신반대투쟁이 전국으로 확산되는 와중 에 민청학련의 배후로 인혁당이 지목 되고 1975년 8명의 젊은이들이 사형당 한다. 이 사건을 접하고 "명색 출가 수 행자로서 마음에 적개심과 증오심을 품는다는 일에 자책을 느낀다”며 송광 사 불일암으로 들어가 홀로 수행에 들 어간다.

법정 스님은 이후 오랜 독살이 수행을 두고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망 각한 채 전통과 타성에 젖어 지극히 관념적이고 형식적이며 맹목적인 수도 생활에 선뜻 용해되고 싶지 않았다”고 말한 적이 있다.

스님이 해인사에 살 당시의 일화다

장경각 쪽에서 할머니 한 분이 내려오 며 팔만대장경이 어디 있냐고 물었다. 지금 내려 온 곳에 있다고 하자 할머 니는.“빨래판같이 생긴 거요?”라고 되 물었다고 한다.

이때부터 스님은 아무리 훌륭한 팔 만대징경 말씀이라도 일반인들이 다가 갈 수 없는 난해한 글자로 남아 있다

34년간 180쇄를 찍는 베스트셀러가 되 었다.

이후 '찾아오는 사람이 많아지자 17 년의 불일암 수행을 접고, 오92년 산문 집〈버리고 떠나기〉를 내고는 강원도 진부 산골 오두막으로 거처를 옮겨 최 근까지 고독하고 청정한 수행을 해왔 다.

법정 스님은 오두막에서 지내면서도 대중과의 소통은 계속했다. 1994년 순 수 시민운동 단체 '맑고 향기롭게’를 결성하고 양재동 구룡사에서 창립법회 를,갖는다. 1995년 고급요정이던 성북 동 대원각을 시인 백석의 연인 김영한 보살로부터 시주받아 1997년 길상사를 창건한 후 회주로 있으며 격월로 정기 법문을 했다.

2003년에는 회주를 사임하고 봄 가 을 대중 법문을 한다. 2007년 7월 폐암 잔단을 받고 도미, 치료후 회복되었다 가 2009년 4월 재발, 겨울부터 제주 서 귀포에서 요양을 해왔다.

법정 스님은 뛰어난 필력과 깊은 감 성으로 자신의 수행체험과 일상을 쉽 고 간결한 문체로 선보이며 일반대중 에게 큰 감명을 주었다. 저서로 길상 사 소식지 게재글 모음집〈아름다운 마무리〉를 비롯해 법문집〈일기일회〉, 〈한 사람은 모두룰, 모두는 한 사람을〉, 〈흘로 사는 즐거움〉,〈산에는 꽃이 피네 〉,〈오두막 편지〉,〈새들이 떠나간 숲 은 적막하다〉,〈물소리 바람소리〉,〈산 방한담〉,〈텅빈충만〉,〈서 있는 사람들 〉,〈살아 있는 것은 다 행복하라〉,〈맑 고 향기롭게〉,〈숫타니파타〉,〈진리의 말씀〉,〈인연이야기〉등이 있다.

-윤우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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