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국토 신라의 저력 보여준 동양최대 가람 황룡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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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26호 발행인 원송[서진업] 발간일 2010-05-13 신문면수 12면 카테고리 기획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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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미디어커넷 입력일시 18-06-22 13:07 조회 1,764회본문
“밀교의례 통한 불력으로 국가 수호”
황룡사지
경상북도 경주시 구황동 황룡사지 는 분황사에서 안얍지,.반월성 사이 에 있는 큰 절터루 사적 제6호이다. 황룡사는 진흥 왕이 7세에 왕위에 올라 나이 21세 되던 553년(진흥왕 14)에 월성 동쪽에 새로운 궁궐을 짓게 하였으나 그곳에서 황룡 이 나타났다 는 보고를 받고 사찰로 고쳐 짓게 하 여 절 이름을 황룡사라 하였다는 기 록이〈삼국사기〉에 전한다.
553년에 짓기 시작하여 569년에 주 위에 돌담장을 두르고 경역 을 마련하여 일단 사찰의 건물배치가 완료되었다.
그 후 574년, 인도의 아소카왕이 철 57,000근 - 금 3만분으로 석가삼존 불상을 만들려다 뜻을 이루지 못하 고 금과 철, 그리고 삼존불상의 모형 을 배에 실어 ‘ 보낸 것이 신라 땅에 닿게 되자, 이것을 재료로 삼존불상 을 만들게 되었는데, 5111가 넘는 이
불상을 모시기 위해 진평왕 6년 에 금당을 짓게 되었다.
선덕여왕 12년(643)에는 당나라에 서 유학하고 돌아온 자장 스님의 권 유로 외적의 침입을 막기위한 기원 을 담은 9층 목탑을 짓게 되는데, 탑 신부 약 65111,상륜부 151X1,전체 높 이 80로 추정된다.
각 층마다 적국을 상징하도록 하였 으며, 백제의 장인 아비지에 의해 645년에 완공되었다.
이와 같이 553년에 처음으로 짓기 시작한 황룡사는 645년 목탑이 완성 될 때까지 4대왕 93년간에 걸쳐 국가 적으로 조성된 대사찰이었으며, 역대 임금이 이 절에 와서 고승의 설법과 강의를 받은 신라 최고의 국가사찰 로 유지되어 왔다.
신라의 3가지 보물 중 천사옥대 를 제외한 2가지 보물이 황룡 사 9층 목탑과 장육존상이었다는 것 에서도 황룡사가 차지하는 비중을 짐작할 수 있다. 또한 ‘신라의 땅이 곧 부처가 사는 땅’이라는 신라인들 의 불교관이 잘 나타나 있는 곳이기 도 하다.
인도 아소카 왕이 보낸 철로 장육존상 조성
고려조에 있어서도 이 절은 숭앙과 보호를 받아왔다. 현종 때인 1012년 에는 경주에—남아 있던 조유궁 을 헐어 그.재목으로 구층탑을 수 리하기도 하였고, 그 뒤 1105년에는 예종이 상서 김한충 을 보내어 수리한 황룡사의 낙성식에
참석하도록 한 기록이 있다.
그러나 황룡사는 1238년(고종 25) 몽고병의 침입 때 모두 불타 버리고, 오늘날까지 다시 복원되지 못하고 민가와 경작지로 변하여 겨우 흔적 만 남아 있다.
황룡사지의 발굴조사는 1970년대에 들어서 본격화되었다. 문화재연구소 에 경주고적발굴조사단이 결성되고, 1976년 6월부터 발굴조사에 착수하 여 1983년 12월까지 8년 동안 진행되 었다. 백제 지역의 익산 미륵사지 발 굴조사와 더불어 우리나라 고고학 발굴 사상 최대규모, 최장 기간 진행 된 발굴작업으로 기록되고 있다.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지 터는 이만 오천여 평에 이르며 원래의 황룡사 담장 내 면적이 동서 288끄,' 남북 281111에 달하며, 불국사의 8배에 이 르는 동양 최대의 절이었다. 당초 늪 지를 매립하여 대지를 마련하였음이 발굴조사 결과 밝혀지기도 했다.
사찰의 건물배치는 중문 - 탑 ;금당 .강당 이 남 북으로 배치된, 이른바 1탑식가람배 치 를 기본으로 하
고, 탑의 전방으로 좌우에 대칭되게 건물을 세워 종루 - 경루 를 마련하였음이 확인되었다.
특이하게도 금당의 좌우에 거의 같 은 규모의 건물을 나란히 세웠음이 밝혀졌는데, 이 건물 역시 금당과 같 은 성격으로 보인다. 또한, 강당의 좌우에도 독립된 건물을 배치했고, 동서남북으로 마련된 회랑 이 서로 연결되지 않고 독립된 상태였 음이 확인되었다.
발굴조사 결과, 황룡사의 가람배치 가 이처럼 전혀 새로운 형태였음이 밝혀져, 지금까지 막연히 추정해왔던 것을 바로잡게 되었다. 일본인 학자 에 의하여 1930년에 조사 발표되었던 내용은 회랑의 형태가 남북이 길고 동서가 짧은 장방형으로 모두 서로 연결되도록 되어 있고, 그 내부에 탑 과 금당이 남북으로 배치되었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정방형에 가까운 회랑 내부에 삼금당과 종루와 경루 가 있어 이것이 신라의 독특한 가람 형태임을 알게 되었다.
동양최대 ‘치미’,규모러작
황룡사는 평지에 위치한 관계로 아 늑한 느낌이 없는 것을 보완하기 위 해 가람 배치에 신경 쓴 흔적이 보인 다. 즉 남문 3칸, 중문5칸, 목탑 7칸, 금당 9칸, 강당 11칸으로 절 안으로 갈수록 칸 수를 늘려 부처님의 넓은 세계로 확대되는 느낌이 들도록 배 치하였다.
황룡사 인접 지역에는 신라시대 옛 시가지 흔적이 남아있다. 서쪽, 남쪽 으로 곧게 뻗은 신라시대 옛길과 배 수구 등을 볼 수 있는데 사람이 다니 던 인도와 수레가 다니던 차도가 구 분되어 있다. 황룡사지를 중심으로 한 일종의 번화가가 형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이 밖에도 발굴조사 결과 이 . 절이 그 규모에서 동양최대의 사찰이었음 을 알게 되었고, 특히 구층탑은 무려 80끼나 되는 높이를 가진 대탑으로 동양 최고의 목조건물이 존재하였음 을 분명히 밝히게 되었다.
출토된 유물은 무려 4만여점에 달 하며, 이 중 각 시대에 걸쳐 만들어 져 사용된 와전류 을 새긴 보상화문전 은 지금까지 출토된 예 가 없는 통일신라시대의 우수한 작 품이다.
솔거 벽화, 거대 종 전설
옛날 황룡사 규모를 추정할 수 있 는 것 중 하나가 망새’ 라고도 불리 는 건물의 치미이다. 치미는 전통 건 축물의 용마루 양쪽 끝머리에 얹는 상징적인 장식 기와인데 화재를 예 방하는 주술적 기능도 함께 지니고 있다. ’
황룡사지에서 출토된 치미는 우리 나라에서 발견된 치미 중 가장 큰 것 으로 높이가 182으끄, 최대 너비 105쪼로 일본이나 중국에서도 아직 발견된 예가 없어 동양최대라 할 만 하다. 아울러 치미의 크기로 건물의 웅장함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게 한 다.
금속류로서는 금동제불상 .풍탁 -금동제귀걸이 우 청동거울 등 이 수습되었으며, 이 중 금동불상 1 점은 여래입상 으로서 높 이 10에 지나지 않으나 조각 솜씨 가 우수하며 도금이 매우 찬란하고 화려하다.
금당에는 솔거가 그린 벽화가 있었 다고 전하며, 목탑지에서 발견된 당 나라 백자항아리는 당시의 문물교류 를 잘 알 수 있게 한다.〈삼국유사〉 에 의하면 종루에는 거대한 종이 있 었는데, 몽고가 침입했을 때에 없어 진 것으로 보인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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