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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정대성사 밀교사관의 계승과 과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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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297호 발행인 우인(최명현) 발간일 2024-08-01 신문면수 8면 카테고리 밀교 서브카테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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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명 정성준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박사 필자정보 - 리라이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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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24-10-15 11:57 조회 153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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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글: 원정대성사 밀교사관의 계승과 과제 (2회)

원정대성사 밀교사관의 계승과 과제

Ⅱ. 행장과 창종 이념


1. 행장의 요약과 활동기 구분

원정대성사의 행장은 일대기인 <불공잘해라>에 주로 나타나 있으며 대성사의 사상은 종조법설집을 중심으로 정통밀교 불교총지종, 불교총지종의 홈페이지에 소개되어 있다. 이에 따르면 대성사의 전기는 크게 다섯 시기로 구분할 수 있다. 

제1기 : 성장기와 공직생활 : 1907-1935

제2기 : 공직생활과 연구·수행기 : 1936-1952

제3기 : 진각종 입교와 교법 정립기 : 1953-1971

제4기 : 총지종 개종과 종학 정립기: 1972-1980.7

제5기 : 부촉과 열반 : 1980.7-1980.9


대성사의 전기에 대해 주요 사건별로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 제1기 : 탄생과 성장기

원정대성사는 1907년 1월 29일 경남 밀양에서 일직 손씨의 26세손으로 태어났으며 부친은 손기현, 모친은 이근호였다. 대성사가 유년시절을 보냈던 밀양은 의병활동의 주요 활동무대였고, 1910년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대성사는 사서삼경(四書三經)을 마치고 현대 고등교육도 받았다. 

대성사의 성장기에 경험한 부친의 독립운동은 대성사의 성장에 큰 영향을 주었다. 부친 손기현는 안창호, 이희영, 이동영이 주축이 된 신민회(新民會)의 독립운동 기지 건설에 동참해 1912년 만주 서간도로 망명하였고 이때 대성사의 나이 6세였다. 7년 후 일제는 봉오동 전투 패배로 인해 대대적인 조선인 사냥을 벌였는데 부친인 손기현도 주요 인물로 체포되었고, 대성사의 부친 손기현은 자유시참변과 관련해 체포되어 모진 고문을 받았다. 1922년 가족은 밀양 인근으로 돌아왔고, 1924년부터 대구 중등교육기관인 교남(嶠南)학교에서 현대 교육을 받았다.


2) 제2기 : 공직생활과 연구·수행기 

대성사는 1927년 졸업할 당시 나이가 21세 였으며 이때 강숙이(姜淑伊)와 혼인하였다. 1936년 대성사는 경남 함양군 학교비 위원회 서기가 되어 함양공립농업실수학교의 예산사무를 맡았고, 1937년 중일전쟁으로 인해 일제의 수탈이 심해지자 서기직을 사임하고 다시 만주로 이주하였다. 대성사는 하얼삔에서 법원 사무일을 시작하였지만 주변의 도움으로 정미소 사업을 겸하여 크게 돈을 벌었다. 일제 패망 후 대성사는 미군정으로부터 밀양공립농잠중학교의 행정관에 임명되어 행정업무를 담당하였다. 이때부터 대성사는 학교행정 등 공직에 몸담게 되었다.


3) 제3기 : 진각종 입교와 교법 정립기

대성사는 경상남도 밀양읍 지방주사로 승진하였다. 대성사가 밀교의 길을 걷게 된 계기는 회당(悔堂) 손규상(孫珪祥) 조사를 만난 것이었다. 회당대종사는 1947년 5월 대각(大覺)을 얻은 후 경상북도 일대에 서원당을 세우고 참회원이라 하였다. 1953년 8월 24일 심인불교건국참회원은 ‘대한불교진각종 심인불교 보살회’로 전환하여 인회(印會)를 결성하고 회당대종사를 회장으로 추대하였다.

회당대종사가 표방한 것은 심인불교(心印佛敎)로 밀교에 속했다. 대성사는 밀교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였으며 1953년 9월 30일 공직에 사표를 내고 스승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 대성사는 11월 2일 정사 후보로 임용되어 시취(試取) 스승, 정사보(正師補)를 거쳐 1955년 4월 13일 정사로 승진하였다. 1956년 대성사는 회당대종사가 주석하던 서울 왕십리 심인당의 스승으로 봉직하였고, 그해 12월 진각종의 초대 사감의 직책을 맡았다. 회당대종사와 대성사는 본격적인 종단의 체계를 세우고 역경에도 힘썼다. 

1963년 회당대종사가 대구 침산동 심인당(현 불승 심인당)에서 열반하였다. 다음 해 1964년 총인직을 신설하고 진각종이 공식 명칭이 되었다. 대성사는 초대 총인이 되었고, 하월곡동 대지를 마련해 현재 진각종의 터전이 마련되었다. 


4) 제4기 : 총지종 개종과 종학 정립기

1968년 해인사에서 열린 한일불교도대회가 계기가 되었다. 대성사는 준제관음법(准提觀音法)을 제시하였으며 한때 만장일치로 가결되었지만 끝내 수용되지 않았다. 1971년 12월 대성사는 총인을 비롯한 모든 직책에서 사임하고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 거소에 은거하였다. 대성사는 100일 불공에 들어갔고, 1972년 4월 4일 원정 대성사는 백발 노인으로부터 금관을 전해받고, “대승장엄보왕경과 준제관음법으로 교화하라.”는 가르침을 받았다. 1972년 6월 28일 기로원장직을 내려놓고 서울선교부 응신서원당을 거쳐 상도동에 칩거하면서 자신의 과제로 삼았던 진각종의 교리를 체계화하는데 진력하였다. 

1972년 9월 9일 대성사는 밀교수행법의 방법과 공덕을 담은 현밀원통성불심요집을 소의전적으로 삼아 비밀불교의 의궤를 제종, 공포하고 전수를 시작하였다. 11월 17일 최초 육자진언을 본존으로 추존했다. 1972년 원정대성사는 뜻을 함께하는 교도들과 서울선교부를 개설하고 그해 12월 24일 정통 밀교종단으로서 총지종의 창종을 선포했다. 


5) 제5기 : 부촉과 열반 

대성사는 1980년 7월 18일 모든 공직에서 퇴임하고 같은 해 9월 8일 총지종의 교세와 전법을 부촉하고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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