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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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9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6-01 신문면수 6면 카테고리 인물 / 설화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필자명 박묘정 필자법명 - 필자소속 - 필자호칭 - 필자정보 - 리라이터 -페이지 정보
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3:20 조회 2,362회본문
진혜 대사
진해대사가 살았던 고려는 불교국가 였다. 따라서 승려들은 사회적인 지위 가 높았다. 과거 시험에 승과 제도가 있어서 승려도 관직에 나갈 수 있었다. 그러나 여성들은 관직에 나갈 수 없었 고 마음대로 승려가 될 수 없었다. 주로 정절을 지키기 위해서 또는 생 계 유지를 위해서 승려(비구니)가 되 었다.
남편을 잃은 서민 여성들이 재혼 이 어려워 선택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시대에는 불교 자체가 대체로 여 성들은 도를 깨우치고 성불을 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라는 부정적인 생 각을 가지고 있던 시기였다. 이런 어려운 시기에 당당히‘대사’ 칭호를 받은 여성이 있었다. 대사는 승과에 합격한 남성들에게 내리는‘대 덕’보다 더 높은 지위에 오른 것이 다.
진혜 대사는 명문 양천 허씨 가문의 장녀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수상을 지 낸 허공이었고 어머니는 윤관의 후손 이었다. 그 시대 제일의 귀족 가문에 서 태어나 성품이 정숙하고 신의가 있 으며 아름답고 조신했다고 한다. 14살 때 언양 김씨 가문의 김 변과 결혼했다. 김 변과 진혜 대사 사이에 는 아들 4명과 딸 3명이 있었다. 그는 다른 여인들과 같이 혼인 해서 남편을 섬기고 음식이나 길쌈에 힘쓰면서 아 내의 도리를 다 했다. 어머니가 되어 서는 자식을 훌륭히 키웠다. 진혜 대사의 제2의 인생은 남편이 죽은 후부터 시작 되었다.
진혜대사가 수행했던 양산 통도사. 신라제 27대 선덕여왕 15년(646) 자장율사스님에
의하여 창건되었으며 우리나라 삼보사찰(三寶寺刹)의 하나로 널리 알려져 있다.
충렬 왕 27년 남편이 죽자 나라에서 베풀어 주는 의식을 모두 사양하고 스 스로 장례도구를 마련하여 대덕산 남 쪽에 묘지를 만들어 장례를 지냈다. 장례가 끝나고 가까운 곳에 집을 짓고 그 근처에‘감응사’라는 절을 지어 남 편을 위해 불공을 드렸다. 이 때 진혜 대사의 나이는 47세였다. 집안의 재화 와 보물을 털어 금과 은 글씨로 사경 을 하고 이 이외에도 많은 불사를 일 으켰다. 이때부터 진혜 대사는 고려의 귀족 여인들과는 다른 삶을 살았다. 충렬 왕 28년 중국에서‘무선사’라 는 사람이 왔다.
진혜 대사는 그를 만 나고 그의 불사에 참석하여 법문을 들 었다. 충렬 왕 30년 ’철상화상’이 강 남에서 왔을 때는 그에게 대승 계를 받기도 했다. 그 후에도 미륵대원(미륵사지로 추 정)에 가서 석불에게 예를 올리고 여 러 산천을 순례 하면서 많은 유적지를 탐방했다. 그리고 드디어 충숙 왕 2년 (1315)에 머리를 깎고 비구니가 되었 다. 비구니가 된 이후에도 그는 계속 성 지순례를 다녔다. 통도사에 가서 사리 도 얻었고 경주 계림으로 가서 마음껏 장관을 돌아보고 왔으며 이 밖에도 그 가 밟은 전국 사찰이 수도 없이 많았 다.
고려 시대에는 남편이 허락하지 않 으면 비구니가 될 가능성은 거의 없었 다. 결혼 후 남편이 죽거나 자식들이 장성한 후 또는 임종 직전에 해야 했 다. 진혜 대사의 경우도 남편이 죽은 후 비구니가 되었지만 다른 여성 불교 신자와는 다른 아주 적극적인 신앙 활 동을 펼쳤다는 점에서 남달랐다고 할 수 있다. 다른 귀족 여성들이 불경을 읽거나 염불, 시주 등을 열심히 했다 면 진혜 대사는 전국 산천 곳곳을 다 니며 10여 년간 구도 여행을 했다.
출가 동기 속에는 쉽게 집을 떠나 마음대로 원하는 장소에 가거나 만나 고 싶은 사람을 만나고 원하는 일을 할 수 있고 마음껏 세상을 직접 볼 수 있는 것이 포함 되어 있을 수도 있다. 진혜 대사는 충숙왕 7년(1320)년 장 남의 집 근처인 개성 남산의 남쪽에 초당을 짓고 머물다가 4년 후 병이 들 어 향년 70세로 세상을 떠났다. 임종 할 때에도 말이 어지럽지 않고 행동이 평소와 같았다고 한다. 담당 관리가 부음을 알리니 임금이 그 절의가 한결같음을 찬탄하고‘변한 국대부인 진혜 대사로 추봉 했다.
이는 그의 사후에 주어진 시호이므 로 한계는 있지만 이것이 고려 500년 을 통해 비구니로 대사 호칭을 받은 유일한 사례다. 이는 그의 불교적 행 적은 기록으로 알아 볼 수는 없지만 적어도 대사라는 호칭을 내려 줄 만큼 불교적 행적이 뛰어났다는 사실을 보 여 주고 있다. 그는 여성이어서 집을 떠나 마음대 로 구도 여행을 할 수 없었음에도 그 한계를 뛰어넘어 10여년 동안 마음껏 구도 여행을 했다. 비구니가 되기 힘들었던 한계를 넘 어 비구니가 되었고 그의 사후에는 고 려 500년 동안 아무도 해 내지 못했던 대사가 되었다.
그는 여성에게 내려진 온갖 편견과 한계를 뛰어넘어 자기가 하고 싶은 일 을 해낸 진정한 선구자라고 생각된다.
-박묘정-
* ‘세상사는 이야기’가 ‘규제와 편견의 한계를 넘어 선 여성들’로 기사를 당분간 대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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