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류의 영원한 스승,‘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지 -『 룸비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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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 137호 발행인 지성[이기식] 발간일 2011-04-06 신문면수 3면 카테고리 특집 서브카테고리 -페이지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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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력자 총지종 입력일시 18-06-07 15:33 조회 2,316회본문
불기2555년 부처님오신날 특별기획 1 ‘불교 4대 성지’를 가다!
네팔 남부 타라이 지역에 위치한 룸비니는 기원전 563 년, 훗날에 석가모니라고 불리게 되는 고타마 싯다르타 태자가 태어난 불교 성지이다. 석가모니는 석가(釋迦)족 출신의 성자(聖者)라는 뜻이다. 룸비니는 석가(샤카)족의 도읍이었던 카필라바스투(카 필라)에서 서쪽으로 약 16km지점에 위치해있다. 석가 탄 생 이후 수많은 순례자들이 찾아왔으며 그 가운데 한 사 람인 인도의 아소카왕은 이곳에 석가를 찬미하는 기념 돌 기둥을 세웠다. 이 돌기둥은 1896년 발견되었는데, ‘이곳에서 샤카족의 성자(聖者) 불타가 탄생한 것에 연유해서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하고, 또 생산량의 1/8만을 납입한다’라는 의미 의 법칙이 새겨져 있어 석가 탄생지라는 것이 확인되었 다. 곳곳에 불타의 탄생과 연관된 유적들이 많이 남아 있 다.
멀리서 바라본 룸비니 동산의 마야데비 사원. 오른쪽으로 희미하게 아쇼카왕의 석주가 보인다.
고타마 싯다르타는 이 지역을 다스리던 숫도다나(정반 왕) 왕과 마야데비 왕비 사이에서 잉태됐다. 석가모니 부 처님의 재세시와 그 이전에 싯달타 태자로 있을 당시의 룸비니 지역에는 석가족과 콜리야족이라는 두 가문이 평 화롭게 살고 있었다. 당시 싯달타 태자의 아버지 숫도다 나왕은 태양족의 아들이라고도 불리는 석가족의 크샤트 리아(무사) 계급으로 카필라성과 함께 현재의 네팔 평야 지역에 위치한 나라를 통치하고 있었다. 한편 그에게는 마야데비라 불리우는 왕비가 있었는데 그녀는 애기를 낳을 때가 되어 데바다하에 위치한 그녀의 친정으로 가는 중에 룸비니 동산의 무우수 나무 아래에서 싯달타 태자를 낳게 된다. 룸비니는 싯다르타 태자의 외 할아버지가 아내의 이름을 따 조성한 동산이다. 싯달타 태자의 탄생설화는 많은 불교경전에서 흥미롭게 묘사되고 있다. 경전에 따르면, 싯달타 태자는 전생에 이 미 깨달음의 조건을 모두 갖추었는데 마침내 때가되어 하 늘의 도솔천에서 내려와 마야데비의 뱃 속으로 들어갔다 고 한다.
또한 왕비 마야데비는 임신 10개월이 되던 때에 그 당 시의 풍습대로 아이를 낳기 위해 그녀의 친정집이 있는 데바다하로 떠나게 되는데, 친정집으로 향하던 중 음력 4 월 8일 보름날, 아름다운 룸비니 동산에 이르러 잠시 휴 식을 취하고 있었다. 룸비니 동산의 아름다운 경관을 정신없이 쳐다보며 한 참을 서있는 동안 갑자기 출산의 진통이 찾아왔고 무우수 나무의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게 되는데, 그분이 바로 석가모니 부처님이다. 싯달타 태자가 태어날 때 브라만신이 아이를 받아주었 고 또다른 신들과 처녀들은 마하데비 왕비를 보호해주었 으며, 하늘에서는 따뜻한 물과 차가운 물이 내려왔는데 이 물로써 아이를 씻어 주었다고 한다. 또한 아이를 낳은 후 왕비의 몸을 씻기 위해 향유(香 油)가 가득한 연못이 생겨나기도 하였으며 이것을 상징하 듯 지금도 기름강이라 불리우는 강이 룸비니 동산에 있는 아쇼카 석주의 남동쪽으로 흐르고 있다. 부처님은 태어나자마자 동서남북 사방으로 차례로 돌아 본후 북쪽을 향해 일곱 걸음을 걸었으며, 그때 태자가 밟 았던 걸음마다 땅에서 연꽃이 피어올랐다고 한다. 걸음을 멈추고 부처님은 한 손으로 하늘을 가리키고 다른 한 손 으로는 땅을 가리킨후 다음과 같이 외쳤다.
“천상천하유 아독존(天上天下唯我獨尊) 삼계개고아당안지(三界皆苦我 當安之)”라고 외쳤다. 이 내용은 경전에 따라 조금씩 차 이가 있기도 하다. ‘하늘 위, 땅 아래에 오직 나만이 존귀 하도다. 일체의 모든 괴로움은 중생을 위하여 내가 멈추게 하리 라. 이것은 나의 마지막 탄생으로 이제 더 이상의 태어남 은 없을 것이다’라는 유명한 탄생게를 남기게 된다. 이 말을 마치자마자 땅에서는 잇따라 일곱 개의 기적이 일어 났다. 하늘과 땅이 진동하고 바람이 멈추었으며 새들은 은신처를 찾아 날아들고 모든 나무들은 꽃을 피우고 열매 를 맺었다고 한다. 고요와 평화가 온누리에 가득 차 있었 던 것이다. 이 룸비니 동산은 기원전 3세기경 인도를 최초로 통일 한 아소카 왕이 돌기둥에‘신성한 지역’이라는 표식을 남 겨‘부처님 탄생지’로 공인되었다. 그후 1896년 독일 고 고학자 휘러가 땅속에 묻혀 있던 기둥을 발굴하고 몇 년 뒤에 그 고대 문자를 해독하면서 석가모니 부처님의 탄생 지라는 사실을 입증하게 되었다.
룸비니의 발굴과 개발
룸비니 동산 안에 있는 보리수 나무. 마야데비 왕비가 태자를 낳을때 잡았던 나무는 남아있지 않다.
이 나무들은 부처님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심은 보리수 나무들이다.
부처님이 열반하신 후, 기원전 249년에 아쇼카 대왕이 룸비니를 방문하여 4개의 스투파(탑)와 말의 모양을 조성 한 석주(石柱-돌기둥)를 세웠다. 중국의 법현 스님과 현 장 법사가 인도를 순례하면서 남긴 불국기나 대당서역기 에 의하면, 룸비니에는 아름다운 목욕탕과 마야데비 왕비 가 부처님을 낳을때 가지를 잡았던 그 오래된 무우수 나 무가 그대로 남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그 자취를 찾아 볼 수가 없다. 룸비니 동산에는 커다란 보리수 나무들이 있는데, 여기서 각종 법회가 열리기도 한다. 이 보리수는 부처님의 탄생지를 기념하기 위해 후대에 심은 것이다. 아쇼카 왕이 부처님의 탄생지를 경축하기 위해 석주를 세 웠는데 중국 당나라의 현장 스님이 인도를 순례할 당시에 는 석주가 벼락을 맞아 두 동강이 나 있었다고 한다. 지 금도 석주 아랫부분은 그대로 서 있으나 그 옆자리에 석 주의 윗부분이 땅에 떨어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룸비니는 오랫동안 방치되어 오다가 1896년 독일의 고 고학자 휘러가 츄리아 구역의 언덕을 돌아다니다가 아쇼 카왕의 석주를 발견하였으며, 이후에 여러 곳에서 수많은 스투파와 절터를 발굴하게 되었다. 이후 1958년 제4차 세계불교도대회에 참석한 네팔의 마 헨드 국왕이 룸비니 개발을 위하여 많은 성금을 내놓기도 하였다. 이어서 네팔 정부는 당시 유엔 사무총장이었던 버마(현 미얀마) 출신 우 탄트에게 유엔 산하 룸비니개발 위원회를 설치할 것을 건의했다.
우 탄트는 1967년 붓다 의 탄생지 룸비니를 직접 방문하고나서 그 건의를 받아들 였다. 더나아가 룸비니 동산의 고고학적인 가치와 세계문 화유산으로서의 중요성을 국제사회에 알리면서 룸비니의 개발계획을 제안했다. 여기에 룸비니개발위원회는 전 세 계를 대상으로 룸비니 동산 근처의 일정 용지를 국제사원 구역으로 설정하고 99년간 사실상 무상으로 임대해주는 조건으로 각국 고유의 불교 사찰을 세울 수 있도록 허가 했다. 현재 룸비니 동산 안에는 국제사원구역으로 지정된 곳에 한국의 대성석가사를 비롯하여 중국 일본 대만 미국 티벳 네덜란드 스위스 오스트리아 등 20여 개국이 각국의 고유 사찰을 지어 운영하고 있다. 룸비니와 관련해서 1978년 11월에는 일본에서 개최된 국제불교신자회의에서 1979년을‘룸비니의 해’로 지정되 기도 하였다.
룸비니 동산에 있는 한국불교사찰 대성석가사의 대웅전
룸비니 동산의 유적지
1) 아쇼카왕 석주
아쇼카왕 석주. 흰색 글씨가 아쇼카왕이 새긴 비문이다.
1896년 독일의 고고학자 휠러가 츄리아 언덕에서 아쇼 카 석주를 발견하면서 부처님의 탄생지가 세상에 알리게 되었다. 이 석주는 기원전 250년 싯달타 태자의 탄생지에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이곳을 방문하였던 마우리아 왕조 의 아쇼카 대왕에 의해 세워진 것이다. 아쇼카왕의 통치 기간 중 20년쯤 되는 시기이다. 이 석주를 현장 법사는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사천왕 이 태자를 안았던 스투파쪽에서 멀지않은 곳에 큰 돌기둥 이 있다. 위에는 말모양의 조각이 만들어져 있는데 아쇼 카 왕이세운 것이다.
나중에 악룡(惡龍)의 벼락 같은 큰 소리에 그 기둥은 가운데가 부러져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현재 말의 모양을 한 머리부분은 없어지고 벼락 때문에 조금은 손상된 흔적이 남아 있는 나머지 석주에는 유명한 글귀가 새겨져 있다. 브라만의 문자로 다섯줄 남짓 쓰여져 있다. 내용은 이 렇다. ‘많은 신들의 사랑을 받고 있는 피야다시(즉, 아쇼 카 왕을 말함)왕은 즉위한지 20년이 지나서 직접 이곳을 찾아 기도하였다. 여기에서 붓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하셨 기 때문이다. 그래서 돌로 말의 형상을 만들고 석주를 세 우도록 하였다. 여기에서 위대한 분이 탄생하셨음을 경배 하며 룸비니 마을은 세금을 면제하고 생산물의 8분의 1만 을 받도록 한다.’는 내용이다. 경배의 기념으로 룸비니 마을에 특별한 혜택을 내린 것이다.
무엇보다 석가모니께서 탄생한 곳이라는 글귀는 귀중한 사료(史料)가 되고 있다. 현재 아쇼카 석주는 마야데비 사원의 서쪽에 위치해 있 고 높이가 7.2m이며, 석주 밑부분에서 약 3.3n되는 지점 에 위에서 말한 아쇼카 왕의 비문이 새겨져 있다. 1976년 에서 1978년 사이에 실시한 발굴조사에서 석주의 윗부분 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는 말모양의 조각 일부가 아쇼카 석주의 북쪽 10m지점에서 발굴되었다. 이 조각들은 마우 리야 왕조 시대의 유적을 발굴하는 과정에서 발굴된 것이 다.
2) 마야데비 사원
마야데비 사원. 처음에는 외부건축물이 없었다. 사원 내부
에 싯달타 태자의 탄생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현재 발굴작업
중에 있어 출입이 쉽지 않다.
룸비니 동산에 세워진 마야데비 사원 안에 있는 부처님 탄
생 설화를 담은 조각상. 마야데비가 오른손으로 무우수 나무를
잡고 아이를 낳는 모습. 천녀들이 아이를 받아낼 준비를 하고
있다.
마야데비 사원은 아쇼카 석주의 동쪽 바로 옆에 위치하 고 있다. 그 사원 안에는 기원전 3세기 초기부터 사람들 이 믿기 시작했다고 추정되는 붓다의 탄생장면이 부조(浮 彫) 형태로 조각된 돌 하나가 놓여져 있다.
그 옆에는 같은 모양의 또다른 부조가 놓여 있는데 그 부조에는 마야데비 부인이 싯달타 태자를 낳는 장면이 새 겨져 있다. 오른쪽에는 마야데비가 그의 오른손으로 무우수 나무를 잡고 아이를 낳는 모습과 그 아래 중간쯤에는 새로 태어 난 아기의 주위에 광배가 드리워진채 연꽃 위에 서 있는 모습이 새겨져 있고, 그 왼쪽에는 창조신인 브라만이 태 어난 아기를 받쳐들고 있는 모습과 두 천녀가 마야데비의 시중을 드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한편 윗부분에는 하늘의 천신들이 아이를 씻을 물과 연 꽃을 뿌리고 있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이 조각물은 대략 AD 11세기에서 15세기 사이에 네팔의 카르날리 지방에서 융성했던 나가왕조의 말라왕에 의해 조성되었다고 한다. 1976년에서 1978년까지 실시된 발굴조사에서 마야데비 사원 밑에서 마우리야 왕조 시대의 것으로 보이는 황금제 사리의 뚜껑과 불에 탄 유골들이 발굴되기도 하였다. 지금은 발굴 작업 중에 있어 출입이 극히 통제되고 있 다. 마야데비 사원에 처음에는 지금과 같은 육중한 외부 건축물이 없었는데 나중에 세워진 것이라고 한다. 개발이 오히려 원래의 모습과 자연 경관을 훼손하는 측면이 있는 데 유적지는 관리보존을 하되 가능하면 원형 그대로 두는 것이 바람직하다. 고고학의적 가치가 우선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탄생 모습을 새겨놓은 조각물 아래에는 태어나서 일곱 발걸음 을 했다는 발자국이 선명하게 찍힌 돌이 놓여있다.
3) 싯달타 연못
싯달타 연못. 마야데비가 부처님을 낳고 목욕을 했다고 하
는 곳이다. 사진에 나타나 있지 않지만 연못의 오른쪽에 마야
데비 사원이 있다.
사원의 남쪽으로 마야데비가 부처님을 낳고 목욕을 했 다고 하는 곳으로 추정되는 싯달타 연못이 있다. 이 연못 을 달리‘푸스카르니’라고 부르기도 한다.
중국의 법현 스님이 룸비니를 순례하며 남긴「불국기」에 는‘마야데비 부인이 목욕한 연못에는 지금도 사람들이 그 물을 마신다’는 기록이 있으며, 현장 법사 역시「대당 서역기」에‘룸비니 숲에 도착하니 석가족 사람들이 목욕 하는 연못이 있다. 물이 맑아 거울과 같은데 여러 가지 꽃들이 피어 있다’고 기록하고 있다.
4) 기타 유적지
룸비니 동산에 있는 스투파와 사원터의 유적들. 주위에는
보리수 나무들이 늘어서 있다.
싯달타 연못 주변에서 발굴된 유적지는 꽤 넓은 편이 다. 그곳에는 수많은 스투파들이 조성되었던 것으로 추정 되고 연못 동쪽에는 AD 2세기경에 세워진 것으로 보이는 사원의 터와 남쪽에는 AD 1~2세기경에 건립된 것으로 보이는 사원의 터가 남아있고 석주 서쪽에는 아쇼카 왕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추정되는 아주 오래된 스투파들이 군데 군데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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